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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이정희 바르바라

2017.07.16 19:23

기도방지기 조회 수:360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같은 해 4월초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감동하여서
 

일가족 4명이 포장을 찾아가 자수하기에 이르렀다

 

 

성령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저희를 가르치시어

하느님께 흠숭과 영광이 되고 또한 영혼의 구원이 되며

성모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느님의 쓸모있는 종으로서 죽게 하소서 !  아멘

주님 찬미받으소서 !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저희가  성녀 이정희 바르바라의 믿음을 본받게 하소서 !

성녀 이정희 바르바라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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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이정희 바르바라는 경기도 시흥시 봉천 땅에서 어머니 허계임과 시골 양반인 아버지 이씨 사이에서 1799년에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열렬한 신앙을 가졌으나 외교인이며 천주교 신자를 몹시 미워하는 아버지 때문에 이들은 기도와 수계(守誡)를 몰래 지킬 수밖에 없었고 집안의 귀찮은 일을 수없이 당해야 했다.

이정희가 시집갈 나이가 되자 부친은 어떤 외교인 청년과 약혼을 시켰으나 크나큰 신앙정신과 대단히 강렬한 의지력을 나타냈다. 이정희는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이 결혼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다리를 못 쓰게 되어 일어날 수 없는 체 하였다.

그 후 그녀는 늘 앉거나 누워있었고, 결혼이 연기된 후 이런 고통을 3년 동안이나 견디는 인내심을 보여주었다. 3년이 지나자 약혼자는 그 다리가 낫기를 기다리다 지쳐서 다른 곳으로 장가들고 말았다.

사건의 내용을 속속들이 알고 있던 어떤 신자가 그녀에게 곧 청혼을 해와 간신히 직산(稷山)에 사는 한 교우에게 시집을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결혼 2년 만에 남편을 여의고 수계하기도 불편해서 봉천마을 친정에 와서 얼마동안 지냈으나, 결국 서울의 동생 이영희 집으로 가서 자매가 서로 의지하며 지냈다. 한 때는 고모 이매임 집에도 있었다고 한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같은 해 4월초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감동하여서

순교를 결심한 후 당시 한 집에서 함께 살고 있던 이매임, 이영희, 김성임, 김 루시아 그리고 4월 초순 판공성사를 보러 상경한 모친과 함께 일가족 4명이 포장을 찾아가 자수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이 얼마나 당당하게 자수했고, 옥중 고초와 형벌을 얼마나 의연하게 참아 받았는가는 앞에서 기술했거니와 이매임의 조카 이정희도 그와 못지않게 형벌을 당하고 용기를 보여주고 같은 고문을 당했다.

이정희는 순교에 앞서 옥중에서 올케에게 보낸 편지에서 5명의 순교자를 낸 자기 가문의 영광을 자랑하면서 “우리 집안은 의심 없이 동양에서 첫째가 될 것이니 열심히 수계했다가 이후 천국에서 같이 만납시다.” 하고 격려했다고 한다.

형조에서 다 같은 날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고모와 동생은 먼저 순교했고, 어머니보다는 23일 앞서, 1839년 9월 3일 서소문 밖에 참수 치명하니 성녀의 나이 41세였다. 이정희 바르바라 성녀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묵상 : 우리 순교자 중엔 가족이 많다. 부부는 물론 3~4명이 순교해 성인품에 오른 분들이 많다. 가장 많은 성인가족이 위 다섯 분이다. 우리는 이 분들의 신앙을 보고 우리 가정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가정성화는 하느님께서 제일 바라시는 것이며, 우리 신앙생활에도 기초가 된다. 한 가족이 함께 믿음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것은 가족의 노력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끌어당기는 신비가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소공동체 모임 길잡이 작은공동체, 2007년 12월호]

 

 

절두산 성지

 

한강변에 우뚝 솟은 봉우리의 모양이 누에가 머리를 든 것 같기도 하고 용의 머리 같기도 하다고 해서 잠두(蠶頭) 또는 용두(龍頭)로 불리던 서강(西江) 밖의 봉우리가 절두산(切頭山)이 된 데에는 가슴 시린 아픔이 있다.

대원군이 자신의 쇄국 정책을 버티어 나가기 위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함으로써 당시 절두산에서만 무려 1만여 명의 교우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되지만 그 수가 맞는지 틀리는 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선참후계(先斬後啓), 즉 ‘먼저 자르고 본다.’는 식으로 무명의 순교자들이 아무런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광기 어린 칼 아래 머리를 떨구었고, 그래서 29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 잠두봉 또는 용두봉은 예로부터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고 나룻객들이 그늘을 찾던 한가롭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도성에서 김포에 이르는 나루터 양화진(楊花津)을 끼고 있어 더욱 명승을 이루었던 곳으로,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꼭 유람선을 띄웠다고 전해져 온다.

박물관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세워진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하지만 병인년인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해 오자 대원군은 “양이(洋夷)로 더럽혀진 한강 물을 서학(西學)의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광기 어린 박해의 칼을 휘둘렀다. 당시 대원군은 일부러 천주교도들의 처형지를 이전의 서소문 밖 네거리와 새남터 등에서 프랑스 함대가 침입해 왔던 양화진 근처, 곧 절두산을 택함으로써 침입에 대한 보복이자 ‘서양 오랑캐’에 대한 배척을 표시했다.

1868년 남연군 무덤 도굴 사건, 1871년 미국 함대의 침입 등의 사건은 대원군의 서슬 퍼런 박해에 기름을 퍼붓는 꼴이 되어 살육은 6년간이나 계속되었고,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회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록되었다.

절두산에서 순교한 이들 중에 기록이 남아 있는 맨 처음 순교자는 이의송 프란치스코 일가족으로, 병인년 10월 22일 부인 김이쁜 마리아와 아들 이붕익 베드로가 함께 참수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렇듯 이름과 행적을 알 수 있는 22명과 단지 이름만 알려진 2명 그리고 이름조차 알 수 없는 5명을 합해 29명 외에는 아무런 기록도 전해지지 않는 무명 순교자들이다. 절두산 순교성지에서는 2016년 1월 10일 병인박해 150주년을 기념하며 절두산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 13위 순교자화를 축복하고 이들의 시복시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들은 현재 시복 추진 중인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포함된 순교자들이다.

1966년 10월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해 그 옛날 수많은 순교자들이 목을 떨구었던 바로 그 자리에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과 순교 기념관(현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건립을 시작해 이듬해 10월 봉헌식을 가졌다. 무심히 흐르는 한강물 속에 애달픈 사연들은 기념관이 서고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머무르면서 오늘날에 다시 되살아나고 있다.

우뚝 솟은 벼랑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은 우리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대변해 준다.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날 선비들이 전통적으로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쓰는 갓을, 구멍을 갖고 있는 수직의 벽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칼을, 그리고 지붕 위에서 내려뜨려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

절두산 순교자 기념성당 지하의 성해실. 27위의 성인과 1위의 무명 순교자 유해가 모셔져 있다.웅장하게 세워진 절두산 기념관은 순례성당과 순교 성인 27위와 1위의 무명 순교자 유해를 모신 지하 성해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수많은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전시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특히 순교 기념관에는 초대 교회 창설에 힘썼던 선구 실학자 이벽 · 이가환 · 정약용 등의 유물과 순교자들의 유품, 순교자들이 옥고를 치를 때 쓰였던 형구(刑具)를 비롯해 갖가지 진귀한 순교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한국인으로 두 번째 사제였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 일대기 31점과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 일대기 27점은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절두산 순교 기념관은 2001년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을 맞아 절두산 순교 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명실상부한 전문 박물관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했고, 2004년 개축공사에 이어 2007년 첨단 시설을 갖춘 수장고를 설치하고, 2008년 8월에는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이란 이름으로 서울시 박물관 제63호로 등록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전시장으로서의 역할보다 박물관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한 시설 보완을 거쳐 2009년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으로 재개관하였다.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자료 4,5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는 절두산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은 전시실을 최대한 ‘열린 공간’으로 살려 특별전, 기획전 및 초대전까지 유치할 수 있는 가변적 시설로 설계해 보다 다양한 유물들을 관람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광장에 조성된 십자가의 길.또 박물관 아래 광장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동상, 오타 줄리아의 묘, 박순집 일가 16위 순교자 현양비, 남종삼 성인의 흉상과 사적비,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일행이 앉아 쉬었던 ‘오성바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 흉상, 십자가의 길 등이 마련되어 있다. 특히 순례자들은 부친 · 형제 · 삼촌 · 고모 · 형수 · 조카 · 장모 · 이모에 이르기까지 한 집안 열여섯 명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치명한 박순집 일가의 이야기가 새겨진 공적비 앞에서 가슴 뭉클한 감동을 가눌 길이 없다. 절두산 성지에 모셔졌던 증거자 박순집 베드로(朴順集, 1830-1911년)의 유해 일부는 2001년 인천교구 갑곶 성지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2000년 11월말에 절두산 순교 기념관과 꾸르실료 회관 사이에 이춘만 조각가의 웅장한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이 제작 설치되었다. ‘큰칼’ 모양의 주탑과 절두(切頭)된 머리가 올려져 ‘절두탑’으로로 불리는 우측탑, 일종의 오벨리스크 형식으로 제작되어 수많은 무명 순교자를 조각해 넣은 좌측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주탑 하부에는 16명의 순교자를 새겨 넣었고, 우측탑 하부의 정면과 양면에는 신문 과정에서 배교했다가 마음 고쳐먹고 순교의 길을 간 신앙의 선조들을 표현했다. 좌측탑은 병인박해 과정에서 순교한 수많은 치명자들을 위한 ‘무명 순교탑’으로 박해의 과정에서 자신의 이름이 순교자로 드날리는 영예마저도 하느님께 봉헌하고 무명 순교자로 남은 치명자들을 기억하고자 했다.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

절두산 순교성지는 한국 천주교회사를 대표하는 성지이나 인근 지역의 무분별한 개발과 변화로 인해 주변 환경이 급속도로 훼손되었다. 그래서 1997년 11월 교회의 노력과 정부의 지원으로 절두산 순교성지 일원을 ‘양화나루, 잠두봉 유적’이란 명칭으로 사적 제399호로 지정했다. 그동안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성지는 있었으나,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성지는 절두산 순교성지가 처음이었다.

서소문 밖, 새남터, 당고개 등 큰 소리로 부르면 화답할 수 있는 순교성지들은 도시의 소음에 묻히고 아파트 그늘에 가려 그 옛날의 아픔도 함께 가려진 듯하다. 하지만 유유히 흐르는 한강물과 같이 고요함 속에서도 우리에게 굵고 강한 목소리로 소리 높여 꿋꿋한 신앙을 가르치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6년 1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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