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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장성집 요셉

2017.02.12 13:47

기도방지기 조회 수:284

 

  제가 전에 지은 죄는 모두

  넉넉한 살림을 해 보겠다는 욕망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같은 모양으로 죄를 짓기보다는

  추위로 얼고 굶주림으로 고생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의 괴로움을 잘 참아 받음으로써

  저는 죽은 뒤에 하늘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 !  퍼내도 퍼내도 다함이 없는 은총의 보고여 !

  사랑없음과 교만에서 저희를 보호하소서 !

 

  주님 믿음 약한 저희를 불상히 여기소서 !
  주님 믿음 약한  저희가 성장성집 요셉을 본받게 하소서 !

  성 장성집 요셉이시여 믿음 약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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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집 요셉은 1786년(정조 10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한강의 서쪽에서 살았다. 한때 호조에 예속된 광흥창(廣興倉)에서 官의일을 본 적도 있었으며, 두번 결혼하여 모두 상처한 후로는 약국의 일군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본래 성품이 양선 온화하였고 한편으로 단정 강직하기도 하였으나, 외교인으로 속세의 생활에 빠져 생의 향락만을 추구하였다.

나이 30에 이르러 비로소 성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수계함이 독실하더니, 문득 천주강생(天主降生)의 교리에 대한 의심을 품게 되었다.그리하여 천주의 사랑하심을 깨닫지 못하고 천주가 사람이 되었다거나,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거나 하는 사실이 도무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차차 냉담에 지게 되었다.요셉은 다시 외교인 친구들과 어울려 세속생활에 몰입하였으며, 조만과(朝晩課) 신공마저 폐하여 의식(衣食)의 여유만을 찾게 되었다.

교우들은 그를 회두시키고자 노력하여 열심히 교리를 설명하고 여러 차례 권유도 하였다.마침내 한 열성적인 교우가 그의 의심을 풀어주는데 성공하여 다시 성교로 인도하였으며, 요셉은 지난 날의 잘못을 깨달아 이전보다 더 열심히 교리를 행하고 신앙에 헌신하였다. 더욱이 세속의 유혹을 피하기 위하여 외교인과의 접촉을 단절한 상태에서 오로지 기도와 묵상에만 전념할 뿐, 빈곤과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요셉의 이러한 행동에 때때로 집안 사람들이나 친구들은 경망히 생각하여『이전처럼 출입도 하고 몸도 돌본다고해서 무엇이 나쁘겠는가』라고 권해보았지만 그는

 

『나의 지난날의 죄가 오로지 의식을 풍족히 하려는 욕망에서 온 것이었으니

난의포식(暖衣飽食) 하느니보다 차라리 주님과 추위를 택하려고한다.

이 세상에서 잠시 괴로움을 견디어 냄으로써

죽은 후 천국에가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면 이 어찌 즐거운일이 아니겠느냐』

 

라고 변호하면서 조금도 굽히려들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굳세고 독실한 수계생활에 모두가 경탄하여 마지않았다한다. 마침내 요셉은 비상한 결심을 갖고 1838년 4월에 영세와 견진성사를 받았다.

이듬해 기해박해가 일어나 교우들이 체포됨을 보고 또 그들이 어떠한 혹형에도 굴하지 아니함을 목격 하게된 요셉은 자진하여 순교할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러나 이때 그의 대부가 主命을 기다림이 옳은것이라고 하였음으로 그는 이말에 따라 주의 뜻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런던 중 5월 18일 드디어 그 자신이 체포되기에 이르렀으니 그의 딸 로사의 시동생이 포청에 밀고함으로써 포졸들이 그의 집을 습격했던 것이다.

당시 요셉은 염병에 걸려 앓고 있던 환자였으므로 포졸들은 그를 가마에 태워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나 같은 죄인이 감히 교군(轎軍)을 타고 갈 수 있겠는가』라 하며

이를 거절하고 걸어서 포졸들을 따라갔다.

 

포졸들은 그의 성품에 감탄하고 또 그의 생명을 아깝게 여겨서

그를 배교의 길로 유인하고자 하고 또 이전의 외교인 친구들도 그를 동정하며 유혹하였으나,

요셉은 결코 동요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천지만물을 만드신 천주께서 계시므로 사람들은 마땅히 그 분을 공경해야 한다.

또한 천주는 우리를 생양보존(生養保存)하시고,

천당과 지옥을 만드시어 선악을 상벌하고 계시니

어찌 내가 잠시 생명을 사랑하여 영원한 하늘의 대사를 그르치겠는가』라

하며 성교의 이치를 성명할 뿐이었다.

포졸들은 거의 한나절 동안이나 그에게 배교를 강요하며 힐난하였으나, 요셉의 대답은 견고하여 추호도 허약한 빛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이리하여 결국 포졸들은 어떠한 강권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를 포청의 옥에 가두어 버렸다. 옥에 갇히고 나서 그는 밤새도록 형벌받기를 고대하였다.그런데도 이튿날 아침까지 아무런 기별이 없었다.

이에 그는 소리를 지르며, 『사형에 처하려고 잡아온 사람을 어째서 형벌도 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버려두는가』라고 항의까지 하였다. 그러나 포졸들은 병자의 헛소리로 취급하여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아니하였다.

며칠 후 포장이 그를 불러내어 문초하며 배교를 거듭 강요하였다.그러나 요셉은 처음과 같이 교리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굳은 신앙심만을 표시할 따름이었다.

포장은 여러 태형으로, 그를 괴롭힌 다음,

치도곤 20도의 형벌을 내리고 다시 옥에 가두도록 명령하였다.

감옥으로 돌아온 후 그는 즉시 숨을 거두었다.

때는 1839년 5월 26일로 그의 나이는 54세였다.

[가톨릭신문, 1983년 12월 25일,
김옥희 수녀(한국순교복자회ㆍ수원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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