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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박후재 요한

2017.07.07 08:58

기도방지기 조회 수:188

 

1839년 5월 아내를 피신시키고 혼자 체포된 박후재는

포청에서 치도곤 40도를 맞는 가혹한 형벌을 당했다.

 

살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드러나 피가 낭자하게 흘렀으나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을 뿐더러

함께 갇힌 교우들을 권면하고

또 흉악한 죄수들에게는 천주교의 바른 도리를 강론했다.

 

 

성령님 !  저의미래또한 아시는분 !

저희 가족과 친구와 은인들과 모든 이를 당신 보호에 맡기나이다 !

주님 찬미받으소서 !

 

주님 저희를 불상히 여기소서 !

주님 저희가 성 박후재 요한을 본닫게 하소서 !

성 박후재 요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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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년 9월 3일에는 이미 체포되어 몇 달씩 고난을 겪고있던 여섯명의 교우들이 순교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대 박해로 인하여 감옥이 비좁고 부족하게 되자 관헌(官憲)들이 옥을 정리하려고 신자들에 대한 사형집행을 서두는 이유에서였다.

이날 서소문밖의 형장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제일 먼저 참수 치명하였던 사람이 바로 요한 박후재였다.

박요한은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순교한 박라우렌시오의 아들로 1799년(정조23년) 경기도 용인(龍仁)에서 태어났다.

관찬기록(官贊記錄)에는 그의 이름이「후재(厚載)」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기해일기(己亥日記)」에는「명관」으로 나타나있다. 「명관」은 그의 아명인 듯하다.

본래 친척이 없었던 관계로 부친이 치명하게 되자 모친과 더불어 고독한 생활을 하였다. 모친은 교우들의 집에 물을 길어다주어 생계를 유지하였으며, 요한은 이러한 모친을 도와 짚신장사를 하여 가난을 극복하였다.

장성하여 감에 따라 요한은 교리를 밝히며 경문을 부지런히 배워 익히고 매사에 확실함과 충직함을 나타내었으며, 모친을 극진히 효봉(孝奉)하였다. 모친이 돌아가신 후에는 처자를 데리고 서울로 이사하여 생활하였다.
 

비록 가난한 생활을 하였으나 요한은 열성과 충직함으로 인하여 많은 교우들의 주의를 끌었다. 그의 본받을 만한 몇 가지 행적에 대하여 그 아내의 말을 빌면, 그는 평상시에도 대단히 열심으로 교리에 따른 본문을 지키고 일을 부지런히 하며 『내 영혼을 구하려면 치명을 해야 한다』고 항상 말하였다 한다.

또한 자신의 몸을 괴롭게 하고 천주를 사랑하는 표현으로써 짚신 삼을 때 쓰는 방망이로 정갱이를 치곤하였으며, 아내에게도 괴로움을 잘 참아 받으라고 권면하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이 비천한 육신이 고통을 어떻게 참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늘 설명해 주었다고 한다. 이미 그의 마음에는 현재 육신의 부귀보다도 영원한 삶에 대한 원의(願意)가 있었던 것이다.

기해년의 박해가 일어나자 요한은 아내에게 『교우들이 많이 붙잡혔으니 우리는 더욱더 조심합시다』라고 말하였으나, 사실 자신은 지금도 체포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시 그들 부부는 가진 돈이라고는 없었는데 어느 날 요한은 큰 질그릇을 40푼에 팔아 그중에 절반은 자신이 갖고 나머지는 아내에게 주면서 그날 저녁으로 아주머니의 집에 가서 밤을 지내라고 하였다.

아내는 아주머니 댁에 가서 밤을 지내고 이틑날 아침 남편이 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없자 사촌오라버니에게 부탁하여 남편의 거처를 알아보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미 그때는 요한이 포졸들에게 체포된 후였다.

이미 치명할 원의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요한은 포청에서의 신문이나 심한 형벌에도 굴하지 아니하였다. 포장이 성명과 직업을 물은다음 『네 부모가 아직 살아있느냐』고 하자 그는 『어머니는 몇 해 전에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제가 여기에 끌려온 것과 같은 이유로 신유년에 참수되셨으며, 그 외에는 친척이 없읍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포장이 『임금께서 이교를 금하고 있으니 너는 그 금령을 어기는 것이다』라고 핍박(逼迫)하자, 요한은 『천주는 저의 창조주이시고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저는 임금님보다도 천주께 더 복종할 의무가 있읍니다』라 하여 오직 교리를 따르고자 한다는 의도를 밝히고 나서, 『저의 교는 목숨보다도 더 귀중한 것이니 배교하느니 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읍니다』라고 순교의 의사를 강조할 뿐이었다.

이리하여 그는 곤장 40도를 맞아 살이 떨어져 나가고 피로 범벅이 되었다. 곤장이 뼈에 부딪치는 소리로 옆에 있는 사람들이 가슴을 조일 지경이었다.

포장이 한편으로 달래며 만단으로 유인하였으나 그의 신심은 점점 확고해질 뿐이었다. 그렇게 형벌을 받은 후 다시 옥에 갇히자, 요한은 교우와 도적들 앞에서 교리를 강론하며 고난을 참아 견디었다.

그 후 형조로 옮겨져 형관이 문초와 형벌을 가하였으나 요한의 결심은 변하지 아니하였다. 마침내 그는 여러 교우들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고、9월 3일에는 형이 집행되기에 이르렀다.

회광이는 그의 목을 여러번 내리쳤으나 완전히 베지 못하자 칼을 돌에 대고 오랫동안 갈았다. 그동안 요한의 몸은 무섭게 경련을 일으키며 떨고 있었다. 다시 회광이가 요한의 목을 내리쳐서 땅에 떨어뜨리니, 평소 그가 갈망하던 순교의 월계관이 그의 머리에 얹혀진 나이는 4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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