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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김 바르바라

2017.02.26 17:19

기도방지기 조회 수:189

 

매일같이 주리를 틀리고

곤장을 몹시 맞아 팔이 부러지기까지 했으나

시종 일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신앙을 고백했다.

 

성령님 당신의 풍요로움은 아무도 측량할 수 없나이다

저희를 가르치시어 쓸데없는 상상과 생각들을 물리치게 하소서 !

 

주님 믿음 약한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믿음 약한 저희가 성녀 김바르바라를 본받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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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김 바르바라는 시골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동생들은 천주교 도리를 알고 있었지만 독실하게 믿고 있지 않았다. 13세 때 서울 부자 황 마리아 교우집에서 하녀로 일하면서 입교하였다. 본성이 솔직하고 굳세고 정직했으며 진주 엄마라고 널리 불렸다.

본시 동정할 원의가 있었으나 “혼인하여도 부부 한 가지로 천주교를 봉행하는데 방해가 없을 것이고 또한, 너 자신이나 네 부모와 동생을 위해서도 유익할 것이니 고집하지 말라.”며 아버지가 여러 차례 권유함으로 부득이 결혼에 동의했다. 바르바라는 상대 청년이 교우인지를 알아보니 외교인이었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뒤 15년 동안 남편을 예로써 섬기며 입교를 권면했으나 고집불통이었다. 이로 인해 부부 사이는 날이 갈수록 힘들었으며 겪어야 했던 고초는 이루 형용키 어려웠다. 자녀 여럿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딸 진주만을 영세시킬 수 있었고, 결국 남편이 개종하지 않고 말년에 이르러 빌어먹다가 객사하였다.

과부가 된 후, 바르바라는 딸을 데리고 기도와 선행에 전념할 수 있었고 선교 신부가 입국해 성사를 받게 된 후부터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가일층 독실하게 계명을 지키게 되었다.

1839년 4월 중순께 그가 세들어 있던 집주인들과 같이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붙잡혀가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당시 옥중에서 죽은 자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열병과 기아와 갈증이 옥중 교우들의 고통을 더욱 견디기 어렵게 만들었으며, 이로 인한 옥사마저 영광된 순교로 간주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여 당시 순교를 열망하는 교우들의 마음을 불안케 했다.

그래서 모방 신부는 자수하는 도상에서 모든 교우들에게 “비록 칼 아래에 죽지 아니하고 옥에서 죽을지라도 일정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이고, 칼 아래에서 치명한 사람과 같이 일정 영복을 얻을 것이니 마땅히 실망치 말고 주님을 배반치 말지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통해 이 문제에 관해 교우들의 마음에 안정을 주고자 했다.

포장이 김 바르바라에게 배교하라고 했으나 거절하고, 공범자라 하여 교우들을 대라고 했으나 그것을 단연 거부했다. 매일같이 주리를 틀리고 곤장을 몹시 맞아 팔이 부러지기까지 했으나 시종 일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신앙을 고백했다.

형조로 이송된 후, 고문에 주림과 목마름이 겹쳤고 드디어는 열병에 걸려 이로부터 두 달 후, 옥의 맨바닥에 누워 거룩하게 세상을 떠나니 때는 1839년 5월 27일, 성녀의 나이 35세였다.


[소공동체 모임 길잡이 작은공동체, 2006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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