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 타이틀1

슬라이드 타이틀2

슬라이드 타이틀3

성 이광헌 아우구수티노

2016.12.26 11:19

기도방지기 조회 수:352

  "제가 세상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것이 제 종교이니 차라리 모든 것을 잃을지언정 교는 배반치 못하겠습니다.”

  “너는 목숨을 조금도 아끼지 않는구나, 그러나 아내와 아이들이 불쌍하지 않느냐?”

  “저는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마음 약한 표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님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는분 !

  저희를 가르치시어 마음을 비우고 평화속에 살게하소서  !

  

  주님  저희가 성 이광헌 아우구스티노의 믿음을 본 받게하소서  !

  성 이광헌 아우구스티노시여 믿음 약한 저희위해 빌어주소서 !

9.9.jpg

 

 

이광헌 아우구스띠노는 1787년(정조11년)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순조1년) 辛酉迫害에 여러 순교자를 낸 경기도 慶州李氏는 그의 가문이었으며 1839년(헌종5년) 7월에 순교한 李光烈(요한)은 그의 동생이며 그 해 9월에 순교한 권희(權喜ㆍ바르바라)는 그의 부인이고 17세의 나이어린 처녀로 순교한 이아가 타는 그의 딸이다. 그리하여 그의 가족은 네 명이나 다함께 순교의 영관을 받았고 성인반열에 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본래 성격이 너그럽고 재주와 지혜가 뛰어났으나 젊었을 때에는 절제함이 부족하였고 쾌락을 좋아하여 일찍이 유흥장에 드나들면서 마음대로 방탕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 후 그는 30세가 채 못 되어 비로소 천주교를 알게 되어 그의 부인 權喜와 함께 入敎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영세할 때 크게 회개한 아우구스띠노 聖人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그도 아우구스띠노의 本名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지난날의 방탕했던 생활을 심히 뉘우치고 은총의 도우심으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모든 언행을 지극히 삼가게 되었고 곧 점잖고 규범있는 사람으로 변하여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영세 후 박해를 피하여 여러 차례 피신을 다녔으므로 얼마 남지 않은 가산을 모두 탕진하여 대단히 가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참다운 참회의 정신으로 많은 수난을 인내롭게 참았다. 그가 거처할 집조차 없게 되자 당시 교우들이 경비를 모아 서소문밖「고마창골」이라는 곳에 기와집 한 채를 마련해 주어 살게 하는 한편 公所집으로 쓰게 하였다. 아마 이때부터 그는 신자들의 회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언제나 남을 도와주기에 힘썼으며 냉담자들을 권면하고 外敎人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열성으로 입교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그는 아내와 함께 공소 때가 되면 보살펴 주었고 특히 병자들을 찾아 위로해 주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알아 동분서주 하였다.

이때 마침 박해가 시작되고 있어서 경향 각지의 신자들이 많이 체포되고 있었는데, 1839년 4월 7일 사백 주일에 한 좋지 못한 예비교우가 53명의 교우명단을 주며 밀고했던 그 명단에 그의 가족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마침 그와 그의 가족 전부가 체포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가 체포 될 때 그의 집에는 南明赫(다미아노)가족들이 피신해 있었기 때문에 두 집안 가족 전원이 함께 체포되었고 가산도 전부 몰수되고 말았던 것이다.

신문은 체포 이튿날부터 시작되었다. 포장(捕長)은 갖은 악형으로 이들에게 배교를 요구하였으나 그들은 모두가 배교하기를 거부하였고 가족 모두가 한 마음으로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때 옥에는 남명혁의 12세 된 아들과 역시 12세 된 이광헌의 아들 및 17세 된 이광헌의 딸 등 3명의 어린이들이 함께 갇혀 있었는데 포장은 이 어린이들을 쉽게 배교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어린이들은 용감한 마음으로 꿋꿋하게 어떠한 고문에도 굴하지 아니하였으며 도리어 포장이 이들의 태도에 놀라 이상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또 이광헌의 80세 된 노모는 여덟 살 된 손자를 데리고 있으면서도 석방을 원하기 보다는 가족과 함께 옥에 남아 있기를 끝까지 고집하여 이를 허락 받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개인적으로 천주교인들에게 많은 호의를 갖고 있었던 대왕대비 김씨는 5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발표하기에 이르렀으며 다시 수인(囚人)들에게 고문의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첫 번 신문에서 이광헌은 가장 심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몽둥이로 맞아 다리가 부러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배교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다시 옥에 갇혔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의 반대당들은 대왕대비 김 씨가 신자들을 처형시키지 않는데 대하여 몹시 불평하였다.

한편 형조판서는 천주교인들을 고문하는데 지쳐서 인자한 권고의 방법을 쓰고자하였다. 이광헌은 이러한 판서의 마음씨를 틈타서 다른 옥에 있는 자신의 두 자녀를 자기에게 보내달라고 청하였다.

이광헌의 청을 받아들인 판서는『네 청을 들어주마, 그리고 네 아내와 어린것들은 배교하지 않아도 놓아주겠다. 다만 네가 배교한다는 조건으로 말이다』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는『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이광헌은 5월 24일 서소문 밖에서 네 번째 칼 아래 참수당하여 순교하였으며, 이때 그의 나이 53세였다.

즉 그의 가족은 모두 4명이 한 박해 때 순교하였고 시복되었으며 또한 성인품에 올려질 것이다. 이러한 순교의 영관은 그 다음의 교우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어 그의 뒤를 따르도록 하였다.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