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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권득인 베드로

2017.02.05 15:34

기도방지기 조회 수:346

 

 

어찌하여 천주교를 믿느냐?

 

천주는 천사와 사람과 만물의 임금이시요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며 이 모든 물건을 사용하고 하느님께 무한한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감사할 생각을 두지 않는것이 어찌 옳은일이라 하겠습니까?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다 천주를 공경하고 섬길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 바닥이 보이지 않는 은총의 보고여 !

저희를 가르치시어 소중한 시간들을 올바로 사용하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주님 믿음 약한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믿음 약한 저희가 성 권득인 베드로를 본받게 하소서 !

성 권득인 베드로시여 불쌍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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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득인 베드로는 1805년(순조 5년)에 서울 문안에서 태어났다. 그를「성도」라고도 불렀으니 아마 이는 그의 자(字)일 것이며、성장해서는 계속「득인」이라고 불리었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고, 이어 열여섯살 되던 해에는 어머니마저 여의게 되었다. 어머니가 열심한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그도 어머니의 훌륭한 표양(表樣)을 따라 열심히 교리를 받들었다.

이러한 어머니를 여의고 얼마 안되어 그는 결혼을 하였고 약장수를 하는 형 프란치스꼬의 집에서 함께 지내기도 하였다. 그후 그는 사직골에 거처하면서 소규모의 장사를 하여 살림을 근근히 꾸려나갔다.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그의 봉교(奉敎)생활은 변하지 않았으며 특히 너리골로 이사를 한 후에도 십자가와 성패 (聖牌)를 만들어 팔아 전교의 역할을 하는 한편 이것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30세가 되자 권베드로는 열정을 크게 발하여 천주를 믿고 염경(念經)하기를 부지런히 하였다. 평상시에도 첫 닭이 울녘에 일어나 등잔불을 켜고 날이 밝기까지 신공에 잠겼다고한다. 또한 남의 일을 돌보는데 힘을다하여 어떠한 어려움에도 상관치않았으며 그러한 일이 마치 자신의 사명인양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주위사람들도 이러한 그의 주밀하고 성실한 봉사에 탄복하여 칭송이 자자하였다고한다.

베드로가 35세 되던 1839년(己亥年ㆍ헌종5년)에 들어서자마자 그에게 박해의 시련이 닥치게 되었다. 이 해 1월 16일 저녁 자기를 찾아온 처남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베드로는 그 소리가 이상하였으므로 부인을 제지하고는 자기가 나가보겠다고 말하였다. 대문을 열자 횃불을 든 포졸들이 문 안으로 들이닥쳐 그에게 포승을 지우고 나서 방 안으로 들어가 그의 처남과 부인을 향해『너희들도 천주학을 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그들은 묵주를 꺼내 보이면서 천주교도임을 밝혔다. 그러자 포졸들은 베드로와 함께 이들도 포박하여 압송하였다. 이때 압송된 베드로의 가족들은 어린아이들을 포함하여 모두 5명이었다 한다.

이렇게 하여 베드로의 가족은 기해박해에 있어 제일 먼저 체포된 가족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체포로 인하여 받은 교회의 놀라움과 충격은 대단히 컸다.

이 슬픈 소식은 곧 수원 갓등이를 방문 중이던 범 주교에게도 알려졌으며, 범 주교는 인천으로 가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서울로 되돌아 왔다. 그렇게 한 것은 이러한 박해를 알고 나서 두려워하는 교우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주님의 격려를 주기 위해서였다. 포청으로 압송되어 투옥된 후 권베드로 가족은 여러 가지로 고문을 당하였다.

이 때 그의 부인과 처남은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베드로는 이에 옥중에서도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회개하고 순교의 길을 걷도록 하였다. 사실 그의 며느리 이 아가타의 증언을 보면 부인은 이후 배교의 잘못을 깨닫고 진심으로 뉘우쳤다고 한다.

가족과는 달리 베드로는 백절불굴의 용기로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아니하였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문헌 기록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어찌하여 천주교를 믿느냐?』는 포장의 질문에 그는 『천주는 천사와 사람과 만물의 임금이시요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며 이 모든 물건을 사용하고 하느님께 무한한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감사할 생각을 두지 않는것이 어찌 옳은일이라 하겠습니까?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다 천주를 공경하고 섬길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포장은 성이나서 무섭게 매질하라고 명령하고, 『네동교인(同敎人)들을 대라』고 소리질렀다.

그러나 그는『천주교에서는 남을 죽이거나 해하는 것을 엄금하니 어찌 감히 내 말로써 사람들에게 죽을 위험을 당하게 하겠습니까?』라고 반문하였다. 포장은 그를 강제로라도 배교시키기 위하여 못된 형리들에게 내맡겨 고문을 시키기도 하였다.

포청에서 형조로 이송된 후에도 베드로는 많은 고초를 겪어야 하였으며, 다른 죄수들로부터도 온갖 모욕과 곤욕을 받아야 하였다. 포졸들이 그를 어찌나 매질하였던지 그가 두번이나 죽은 줄 알고 내버려두기까지 하였다 한다. 그의 의지는 더욱 굳어지고 열성은 더하여 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형조에서는 그를 배교시키고자하는 의도를 버리고 사형을 언도하기에 이르렀다.

권 베드로의 죄명은 일찍이 천주교인으로서 교구(敎具)를 만들어 팔았다는 것이었다.

형조의 판결문에서도『권득인은 여러 해 동안 사학(邪學)을 강습하고, 스스로 사구(邪具)를 만들어 널리 흉도에게 전파하였다』하여 이 사실을 특별히 지적하고 있다.

5월 24일 권 베드로는 교우 8명과 함께 형장으로 이끌려 갔다. 수레가 경매골의 한 교우집 앞을 지날 때 그는 침착하고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그 쪽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 때 많은 교우들이 그 집에 모여 이 행렬을 지켜 보았다고 한다. 이 아홉명의 교우들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으며 이때 베드로의 나이 35세였다. 그의 용감한 죽음을 들은 나 신부는『전엔 베드로가 내 앞에 꿇어서 인사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베드로 앞에 꿇고 인사해야 할 차례이다』라고 그의 순교를 칭송하였다고 한다.

[가톨릭신문, 1983년 11월 27일,
김옥희 수녀(한국 순교복자회ㆍ수원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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