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 타이틀1

슬라이드 타이틀2

슬라이드 타이틀3

성녀 권희 바르바라

2017.06.30 16:33

기도방지기 조회 수:190

 

형리들은 그녀의 아이들을 따로 불러,

부모가 배교하여 석방되어 집에 돌아가 기다린다고 속였으나 오히려 아이들은

 

“저희 부모님이 배교하고 안하고는 그분들의 일입니다.

저희들은 저희들이 늘 섬겨온 천주님을 배교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여 형리들을 놀라게 했다.

 

성령님 ! 온세상의 미래를 아시는분 ! 

저희를 도우시어 육신과 악마의 지배를 뿌리치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저희가  성녀 권희 바르바라의 믿음을를 본받게 하소서 !

성녀 권희 바르바라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9.26.jpg

 

성녀 권희 바라바라는 이광헌의 아내요 이광렬의 형수가 되며 이 아가타의 어머니가 된다. 그는 외교(外敎)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23세에 남편과 같이 천주교에 입교하여 열심히 수계하면서, 박해의 영향으로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회장의 직무를 맡은 남편을 도왔다.

그의 남편이 서울에 거처하면서 회장으로서 주교와 신부를 보필하고 있었으므로 내조자로서의 그녀는 생명의 위험을 무릎 쓰고 앵베르 주교와 전교 신부들에게 숙소를 제공했으며, 교우들이 그의 집에서 고해성사를 타당하게 예비하도록 여러 교우들을 힘써 인도하고 가르치면서 미사에 참례케 했다.

1839년 4월 7일(음 2월 25일) 한 밤중에 포졸들이 습격해 와 체포되었다. 체포된 가족 중에는 17세의 딸 아가타와 12세의 아들 다미아노라는 어린 자녀도 함께 있었다.

그는 수많은 형벌을 당했는데 특히 그녀의 마음을 가장 괴롭게 한 것은 자기와 같이 붙잡혀 들어와서 혹독한 곤장을 여러 차례 얻어맞고 주림과 목마름과 추위로 가혹한 시련을 당하는 열일곱 된 이 아가타와 12세 된 다미아노의 고통이었다.

어린 것들이 목마름과 열병의 옥고와 고문당하는 처참한 광경을 지켜보며 천 갈래 만 갈래 마음이 찢어졌지만 끝내 모정을 억제하고 모든 유혹과 형벌을 견뎌냈다. 자식의 고통을 지켜보는 어머니 권 바르바라의 마음은 얼마나 가슴을 태웠으랴 마는 그러나 천주를 만유 위에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을 굽히지는 못했다.

형리들은 그녀의 아이들을 따로 불러, 부모가 배교하여 석방되어 집에 돌아가 기다린다고 속였으나 오히려 아이들은 “저희 부모님이 배교하고 안하고는 그분들의 일입니다. 저희들은 저희들이 늘 섬겨온 천주님을 배교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여 형리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형리들은 아이들을 이용하여 바르바라의 배교를 요구하였다. 뼈를 깎는 고통을 주님께 봉헌하면서 주님의 은총이 자녀들에게 항상 함께하기를 빌 뿐이었다.

그런가 하면 권 바르바라는 너무나도 무례한 언동을 한다고 포교를 꾸짖은 일이 있었다. 이때 그녀의 남편 이광헌의 경고를 듣고 크게 깨달은 바 있어 그 후로는 형벌과 욕을 받았으나 다 감수하면서 인내하게 되었다.

앞서 발한 바와 같이 권 바르바라 일가족은 모두 같은 날 체포되었고 같은 날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래서 같은 날에 함께 순교하기를 간절히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우리나라 법에 아주 가까운 친척을 한 날에 죽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부득이 부부 중 한 명의 사형 집행이 연기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권 바르바라는 남편이 순교한 후 여러 차례의 곤장과 주리를 틀렸으나 끝내 관헌에게 굴복하지 않고 남편이 순교한 뒤 4개월 후인 1839년 9월 3일 서소문 밖에서 46세의 나이로 참수 치명했다.


[소공동체 모임 길잡이 작은공동체, 2007년 10월호]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