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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이광열 요한

2017.05.07 10:22

기도방지기 조회 수:223

 

묵상과 관상을 통한 이 요한의 영신수련은 비상한 것이어서

주님과 끊임없는 결합을 누구도 방해할 수 없었다.

이는 겉으로도 드러나 성령을 충만히 받은 자라고 사람마다 탄복했다 한다.

 

 

성령님 ! 사랑하올 영혼의 친구여 !

저희를 가르치시어 아무도 판단하지 않게 하시고

누구의 잘못도 기억하지 않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주님 믿음 약한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

주님  믿음 약한 저희가  이광열 요한 성인을 본받게 하소서 !

성 이광열 요한 이시여 불쌍한 저희 위해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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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년 음력 3월 5일에 이른바 사학퇴치령(邪學退治令)의 공포(公布)와 함께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맨 처음으로 남교우 3명과 여교우 6명이 5월 24일 참수치명 당했다. 그 후 박해는 뜻밖에도 주춤했고 이렇게 한때 중단된 시기를 이용해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려고 상경했던 앵베르 주교도 수원으로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돌연 음력 5월 27일 그간 포졸들이 감시에 태만했음을 책하고 앞으로 철저한 수색을 통해 중형으로 대처한다고 위협하는 훈령이 나왔다.

때를 같이한 김여상 유다스의 상세하고도 정확한 정보 제공에 의해 유진길, 조신철, 정하상 같은 교회 주요인물들이 속속 점거되었다. 날로 강경해지는 조정의 대 천주교 조치는 드디어 7월 20일 다시금 사형 집행을 재가하기에 이른다. 이때 8명의 교우가 참수 치명하니 성 이광렬 요한이 그 중 한 분이시다. 이 용감한 대열의 우두머리인 이광렬 요한은 이광헌 회장의 동생이며 이 아가타의 삼촌이다.

이 요한은 형과 함께 참수될 것이었지만 원래 우리나라 법에 형제를 같은 날 함께 처형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그의 사형이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광렬은 관변측 기록에 나오는 이름이고 교회측 기록인 <기해일기>에는 그의 이름이 경삼으로 되어 있다. 경기도 광주 이씨의 양반 가문에 속해 있었고 신앙면에서 4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이광헌 회장 집안의 한 사람이었다.

원래 외교 집안에서 태어난 그의 천주교 입교는 중년에 이르러 형의 입교가 계기가 되었다. 그때까지 광렬 요한은 총각이었다고 하는데 아마 형이 몹시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 아가타에 따르면 “나는 10여 세에 가끔 외조모를 따라 이 회장 집에 갔었다. 이집 식구들은 아주 가난하게 살았지만 어려움을 잘 참았다. 세상 것을 욕심내지 않고 늘 무릎 꿇고 기도했다. 우리 집에서 두부 장사를 하고 있었기에 외할머니는 나를 시켜 비지를 갖다 주게 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교우들은 거처할 곳 없는 처지를 가련히 여겨 추렴하여 서소문 밖 고마창골에 기와집 한 채를 마련해 공소로 사용하고 형 이광헌이 거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광렬은 어머니를 모시고 따로 살았다. 그는 교우의 본분을 다했기에 착한 표양과 덕행을 칭찬했다. 그는 아주 강직하고 열성 있고 신앙심이 깊어 입교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여러 회장들한테 인정받아 북경으로 가는 사신들과 동행했고 거기서 교회 일을 보는데 참여했다.

이후 북경 사제로부터 세례를 받고 중책을 맡아보는 지도층 교우 틈에 끼게 되었다. 특히 묵상과 관상을 통한 이 요한의 영신수련은 비상한 것이어서 주님과 끊임없는 결합을 누구도 방해할 수 없었다. 이는 겉으로도 드러나 성령을 충만히 받은 자라고 사람마다 탄복했다 한다.

묵상 : 평신도에 의해 시작된 이 땅의 천주교회의 자생적인 발전에는 평신도의 노력이 절대적이었다. 나는 지금 세상과 교회를 위해 하느님께 봉헌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혹은 불림 받았을 때 피한 적은 없는가?


[소공동체 모임 길잡이 작은공동체, 2007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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