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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박큰아기 마리아

2017.06.20 09:24

기도방지기 조회 수:190

 

자매가 함께 있으면서 의식을 절약해 애긍에 힘썼으며

묵상과 신공(神功)을 부지런히 하여 신자의 본분을 착실히 지켰다.

 

성령님 당신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나이다

저희를 가르치시어 악마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

주님 찬미받으소서 !

 

주님 저희를 불상히 여기소서 !

주님 저희가 성녀 박큰아기 마리의 믿음을 본받게 하소서 !

성녀박큰아기 마리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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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5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박큰아기 마리아는 입교 동기와 출가 전후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별로 없다. 시집을 가서 남편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나 생별인지, 사별인지도 알 수 없다.

여하간 동정 궁녀 박희순 루시아의 언니이다. 동생인 희순이 궁중에서 빠져 나온 후 그들 자매는 완강한 외교인 아버지를 피해 조카집에서 함께 생활했다. 그는 본시 충직하고 순수했다. 자매가 함께 있으면서 의식을 절약해 애긍에 힘썼으며 묵상과 신공(神功)을 부지런히 하여 신자의 본분을 착실히 지켰다.

궁녀 출신 동생 희순은 국문과 한문에 능통해 공주에게 글을 가르칠 정도였기 에 언니 박 마리아도 글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기해박해 때, 조카 집에서 1839년 4월 15일 동생 희순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을 거쳐 형조로 이송되어 동생 희순과 함께 같은 날 참형이 선고 되었으나 두 근친자를 한 날 죽이는 것은 조선법에 금지되어 있었기에 동생 희순 먼저 처형되고, 언니 박 마리아는 집행이 연기되었다.

비록 박큰아기의 행적과 신심의 표현은 나타난 것이 없으나 동생 희순과 함께 잡혀 같은 형벌을 받은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녀의 동생 루시아 희순의 빛나는 순교에 비길 만한 것은 못되어 약간 빛을 잃은 느낌이 없지 않지만, 그러나 끝까지 신앙을 지키면서 일생 중 또는 죽을 때 훌륭한 신앙심과 위대한 영혼의 모범을 보여준 것으로 보아 그녀의 동생 못지않게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한 것이 분명하다.

그녀의 동생 박희순 루치아가 처형된 지 4개월 후 - 동생을 잃고 난 후 4개월이라는 옥고는 말로 다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 1839년 9월 3일 서소문 밖에서 치명하니 성녀의 나이 54세였다.

순교자 성월에 임하는 자세와 묵상 : 우리 믿음은 신앙의 선조들이 물려준 귀한 재산이다. 그저 물려준 것이 아니라 피로써 남긴 소중한 유산이다. 신앙을 받아들였던 특이한 사실로부터, 신앙을 지키고 물려주는 과정의 100여년 세월, 그리고 순교로 이어 온 뜨거운 신앙을 물려받은 우리는 믿음의 선조들을 어떻게 공경해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겠다.

▪ 첫째,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복음을 받아들였고, 어떻게 신앙을 지켰는지 가능한 한 많은 사실들을 알아야겠다. 순교자들의 생활과 순교과정, 무수한 고통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야겠다.

▪ 둘째, 하느님에 대한 찬미와 감사기도를, 아울러 순교자들의 전구를 요청하는 정성어린 기도를 꾸준히 바쳐야만 할 것이다. 순교성인마다 적당한 기도를 드리는 것은 더욱 바람직할 것이다.

▪ 셋째, 참된 순교정신을 찾아내 스스로 받아들임으로써, 현재 각자의 삶 안에서 순교정신을 발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 넷째, 민족을 위한 기도와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 다섯째, 참회 정신이다. 순교자들을 거울삼아 자신을 비추면서 생활해야 한다.


[소공동체 모임 길잡이 작은공동체, 2007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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