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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남명혁 다미아노

2017.01.26 10:49

기도방지기 조회 수:351

 

  이 세상은 주막집에 지나지 않고

  우리의 참된 고향은 천국이요

 

  성령님 모든 은총을 베푸시는분

  저희를 가르치시어 고통의 가치를 깨닫게 하소서 !

 

  주님 믿음 약한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

  주님 믿음 약한 저희가 남명혁 다미아노성인을 본 받게 하소서 !

  남명혁 다미아노 성인이시어 믿음약한 저희 위해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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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혁 다미아노는 1802년(순조2년)에 유명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젊었을 때는 생활에 질서가 없어서 제멋대로 생활하였으며, 온갖 난봉꾼들과 어울려 놀고 노름 밖에는 생각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약 30세에 이르러 천주교의 교리를 배우고 나서는 열심히 교회 본분을 지키기 시작하였고, 유방제(劉方濟) 신부가 조선에 들어오자 곧 영세 입교하여 정성스럽게 교리를 지켜나갔다.

영세 후 그는 많은 외교인 친구들과 교제를 끊고 끊임없이 교리연구에 몰두하여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데 열성을 보였고, 이에 여러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끌었다. 그는 가족들을 특별히 보살폈으나 냉담자들과 외교인들도 마찬가지로 보살펴 주었다. 병자들을 찾아가 위문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도움을 주었으며, 죽음을 앞둔 외교인 어린이들이 세를 받도록 마련하는데 힘쓰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교우들의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천주를 위하여 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루는 친구 한 사람이 웃으면서 그에게『저 세상에서 자네 이름을 무어라고 부를 것인가?』하고 물으니, 『천주를 위하여 순교한 성의회(聖衣會)의 남 다미아노라고 불러주면 원이 없겠네』라고 하여 순교의 뜻을 말하였다 한다. 이러한 그를 본받아 성품이 강직하고 영리한 그의 아내 이연희(李連熙) 마리아도 교리에 열심이었고 착한 일을 많이 하였다.

1839년(헌종5년)새해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이미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고 있었으며, 서울에서나 지방에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고 있었다.

이 당시 남명혁은 자기 집을 빌려 주어 앵베르(Imbert) 주교에게서 많은 교우들이 고해를 받도록 하고 있었다.

그러나 4월 7일 사백주일(御白主日)에는 한 좋지 못한 예비교우가 교우들의 모든 것을 포졸들에게 일러바치고 말았으며 이에 좌우 포도청(捕盜廳)의 포졸들이 교우 이광헌(李光獻) 아우구스띠노의 집과 남명혁의 집을 습격하기에 이르렀다. 남명혁은 곧 체포되었고 이광헌의 집으로 피신하였던 그의 형수와 조카들도 체포되었다. 이 때 주교의 제의류(祭衣類)와 경본(經本) 한 권과 주교관(主敎冠)이 포졸들의 손에 들어갔는데, 이는 앵베르 주교가 전날 저녁에 놓고 간 것이었다.

신문은 체포된 이튿날부터 시작되었다. 포장은 배교를 요구하려 하였으나 체포된 사람들은 모드 이를 거부하였다. 특히 남명혁은 그의 집에서 압수된 주교의 물건들이 자신의 개인적 사건이 되어버려 처지가 난처하게 되었다. 그는 이 물건들이 1801년에 순교한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것이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포장은 이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그 물건도 천주교를 포교하고 있는 서양인들 소유라는 사실을 감지하였다. 그러나 포장은 이 사건을 확대시켜 서양인들을 체포한다면 국가적으로 난처한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이에 남명혁의 말을 믿는체하였다.

그 후 체포된 신자들은 포도청에서 형조로 이송되었고, 이들에 대한 실제의 무서운 신문이 4월 21일에 가해졌다. 형관은 다른 사람들에게 위협을 주기 위한 본보기로 남명혁을 지목하였다.

형관은 그에게 말하기를『너는 네 집에서 압수된 제의류와 주교관에 대하여 위증(僞證)을 하였다. 그 물건들은 새 것인데 어찌 40여 년 전에 참수당한 주 신부의 것일 수 있느냐?』고 하며 매질을 하여 그의 다리뼈를 부러뜨렸고 팔과 갈빗대, 마지막에는 온몸을 매질하라고 명하였다. 이렇게 심한 고문으로 인하여 그는 의식을 잃었고 전혀 회생할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천주께서는 그에게 은총을 베풀어 건강을 다시 회복하게 해 주셨다.

한편 그의 아내도 남편의 거짓말을 거들었다 하여 보다 야만스럽게 다루어 졌으며, 다리뼈가 부러지는 형벌을 받았다.

그 후 5월 말까지 그는 고문과 배교의 유혹을 이겨내어 가면서 꿋꿋하게 교리를 지켜나갔다.

그리하여 남명혁은 다른 교우들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으며 의정부의 확정판결을 받았다. 이 말을 듣고 그는 옥중의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이 세상은 주막집에 지나지 않고 우리의 참된 고향은 천국이요 천주를 위하여 죽으시오. 그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당신을 만나길 바라오』라고 신앙의 뜻을 전하였다. 마침내 5월 24일 금요일 오후 3시 예수께서 숨을 거두신 그 시각에 남명혁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의 나이 38세였다.

그의 아내 李 마리아도 그 후 9월 23일 같은 장소에서 순교하여 남편의 뜻을 따랐다. 그리하여 이들 부부가 모두 기해박해(己亥迫害)의 순교자가 되었던 것이며, 이 부부의 순교정신은 다른 교우들에게 또 하나의 모범을 보여준 것이었다.

[가톨릭신문, 1983년 11월 20일,
김옥희 수녀(한국순교복자회ㆍ수원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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