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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는 것을 배우기

       세상의  눈은 교회  문이  닫혔을 때,
       나의  눈이  벽  그 이상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지상의 삶, 그 이상을  더  멀리  보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의  눈은  영원  깊숙이  들여다보는  눈이다.  
        - 아르스의 본당신부 성 요한 비안네

“죽는 것을 배우기”로 행복으로 가는 길에 있어 마지막 부분에 도착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결국 생각해보면, 우리 지상의 여정이 끝나는 곳도 죽음이다.
“나머지”는 햄릿이 말한 것처럼 “침묵”이다.
그러나 성인들은 우리에게 더 가르쳐 줄 것이 남았다.
그들의 눈에는 삶이나 행복에의 소명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지상의 삶이 담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을 위하여 창조된 존재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삶의 목적은 더 큰 행복을 향하여 우리를 이끄는 것이고, 우리의 갈망, 행위,
그리고 고통들을 그것들의 참다운 가치에 따라 행복의 빛 안에 자리잡게 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우리의 마지막 행복이 성취되는 그 목표를 보는 행위,
진복의 비전이라고 서술하여 왔으며,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이라고 했다.
이 진복의 비전은 무엇보다도 어떤 중재 없이 받게되는 빛, 명료함이 특징이다.
바오로사도가 썼던 것처럼,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Ⅰ고린토 13,12) 이다.
그 비전은 또한 우리를 변화시켜서 우리의 마음과 의지를 재조정하여
눈에 보이는 것들의 참된 가치를 볼 수 있게 한다.

단테는 지옥의 심연으로부터 연옥의 산까지, 그리고 마침내 천상낙원의 황홀경에 이르기까지
상상에 의한 순례 여정을 「신곡」에서 묘사한다. 시인이 목적지에 도달할 때, 그는 삼위일체를 응시할 수 있게 인도된다.
삼위일체는 마치도 세 개의 무지개가 서로를 반영하는 모습으로 눈부신 빛을 발하고 있다.
시인이 이 신비를 꿰뚫어보려고 할 때 갑자기 마음 속에 “거대한 이해의 섬광”을 받게 되고,
그래서 그는 이렇게 적는다. “완전한 균형을 갖춘 바퀴가 돌아가는 것처럼,
나는 나의 의지와 욕망이 태양과 별들을 움직이는 그 사랑에 의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단테가 사용했던 그런 말들로 그리스도교 예술가들은 결단코 다 표현될 수 없는 진복의 상태를 묘사하려고 애썼다.
단테 이후 지금까지도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림, 시, 영화 등으로 시도하고 있다.
한편 현대물리학도 외계에 대한 연구로 “해와 별을 움직이는” 힘에 대한 이해를 더욱 증가시키고 있다.
그러나 과학이나 예술이 답할 수 없는 문제들이 여전히 남는다.
완전한 행복이란 것이 참으로 있는가?
있다면, 그러한 궁극적인 행복이 “우리가 알고 경험하는” 이 지상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우리들과 단테의 상상 속에서 등장하는 그 진복의 비전이 연결되는 것을 지금 보게 해 주는 길이 있는가?

대부분의 성인들은 진복의 비전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그들은 가장 무미건조하고 단조로운 상황 속에서도 특별한 차원을 알아보았다.
어거스틴 성인은 모든 참되고 사랑스러우며 선한 것들은 우리를 그것들의 궁극적인 원천으로 이끌어 당기는
촉매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바로 이러한 관점, 방향에 대한 이런 인식 ­원천을 향하여 아무리 희미하게 인식된다
하더라도­ 이 성인들의 특징이다. 원천을 향하는 이런 자세가 우리들에게도 역사, 상업,
그리고 자연의 칙칙하고 우울한 표면을 넘어 제라드 맨리 홉킨스가 칭했던 것처럼,
“사물의 심연 속에 있는 가장 사랑스러운 신선함”을 볼 수 있도록 해 준다.

진복의 비전은 어떤 특별한 “종교적” 장소에서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다른 눈으로, 다른 방식으로 보는 것을 배우기만 하면 된다. 어거스틴 성인은,
“이 지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하느님이 계시는 우리 마음의 눈을 건강하게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성인들은 건강한 마음의 눈을 가졌고, 행복으로 가는 그들의 모든 가르침과 안내에서 그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성인들은 신앙의 눈으로 보면서 그들의 행동과 태도에, 즉 그들의 일, 사랑, 침묵, 슬픔 등에
목표를 부여한 더 포괄적인 실제 속에서 살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것이 그들의 행복에 원천이었고,
만일 우리가 그들의 모범에서 배울 마음이 있다면 우리 행복의 원천도 될 수 있다.

모든 길은 천국으로

많은 신학자들, 설교가들, 그리고 예술가들은 천국에 있는 성인들의 행복을 상상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지상에서 누리는 성인들의 행복에 관해서는 거의 주의를 두지 않았다.
실제도 어떤 사람들은 지상의 삶에서 참다운 행복이 얻어질 수 있는 것인가
혹은 원할 수 있는 목표인가 하며 회의를 품었다.
많은 가톨릭인들은 이젠 소수에 지나지 않겠지만,
아직도 교리문답서의 시작구절을 암기할 수 있다:

누가 너를 지었느뇨? 하느님이 지으셨도다.
왜 하느님이 너를 만들었느뇨?
이 세상에서 그분을 알고, 사랑하고, 섬김으로써,
내세에서 그분과 함께 영원히 행복하기 위하여 만드셨도다.

만일 전통적인 교리가 이 세상에서 행복의 가능성을 무시했다면, 그건 큰 실수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삶을 단지 수단으로,
더 큰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매우 오래된 경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한 행복” 이라는 목적은 결코 죽음을 겪는 존재들이 도달할 수 없는 목적이 되고 만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이 질문에 많은 설명을 할애했는데, 주로 행복이 궁극적인 의미에서
“거룩한 정수를 보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재물, 명예, 명성, 권력, 건강, 쾌락 등 일시적인 재화들을 재고한 후,
아퀴나스는 이런 것들이 완전한 행복을 마련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주장했다.
아퀴나스는 “완전한” 행복에 너무나 단호하게 초점을 맞춘 나머지
그 목적에 미달하는 모든 것은 거명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 목적에 초점을 둔다는 의미에서 아퀴나스는 오랜 전통의 상속자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지상의 삶은 우리의 지정한 나라에서 “외롭게 유배된 추방”의 상태일 뿐이다.
마리아를 흥숭하는 중세 때의 찬송가 “살베 레지나”의 가사를 보면,
우리는 “가난하고, 쫓겨난 에와의 자녀들이며 눈물의 골짜기에서 울며 슬퍼하는” 자들이다.
지상의 삶에서 행복해 보려는 노력은 헛될 뿐 아니라,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로 가야 하는 사람인가를 잊게 할 수 있으므로 꽤 해롭기조차 하다.

어거스틴 성인에 따르면, 모든 것은 우리가 마지막 목적지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만큼만 선하고 가치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지상에서의 지나친 행복은 우리가 “수단”에 고착하게 되고 참다운 목표를 잃어버리게 할 위험을 갖고 있다.

물론 어거스틴의 이런 경고에는 우리가 유의해야 할 부분이 확실히 있다.
이 지상의 삶에서 우리는 영원히 변치 않을 집을 구할 수 없으므로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면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완전한 행복”을 지상에서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에게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의 경고는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 부분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경고인가?
우리가 가장 귀를 기울여야 할 유일한 경고인가?

고통과 시련 한 가운데에서 모든 슬픔이 위안을 받고, 모든 눈물이 씻어질 미래의 삶에 우리의 희망을 두는 것은
격려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다가올 어떤 이상적인 낙원을 선호하여 지상의 삶이 지니고 있는 모든 축복,
“여정의 즐거움” 자체를 무시해 버리는 영적인 처방에 대해서는 의심해 볼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러한 태도는 무관심과 소극적인 경향을 키울 뿐만 아니라, 최악의 경우에는 냉정한 광신주의를 발생시킨다.
아무리 영향이 적다해도 은총을 망각하는 경향이 나타날 수 있다.

디트리히 본 회퍼 목사도 독방 감옥에서 편지를 쓰면서 이런 유혹에 저항했다. “나는 우리가 이 지상의 삶 안에서,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보낸 모든 좋은 것 안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때가 오면 그분께 사랑, 신뢰, 그리고 즐거움을 갖고 갈 수 있도록”

비록 천국이 우리 행복의 완성이요 완전함을 나타낸다고 해도,
우리가 그곳에 갈 수 있는 것은 죽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거룩함에 의해서이다.
그렇게 성인들은 가르쳤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천국을 준비하는 길은 하느님의 사랑과 선하심에 한결같이 순응하는 것뿐이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시작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상의 삶이 단지 눈물의 골짜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한다.
지상의 삶에도 참다운 달콤함이 있으므로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고 인정할 수만 있다면,
그 달콤함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고 축복해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성인들은 천국의 완전한 행복과 우리의 매일의 삶에서 보이는 그늘진 행복사이에 깊은 틈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나 많은 성인들은 대부분 지상의 참다운 행복과 천상의 행복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아퀴나스조차도 이런 말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지상의 어떤 행복이 천상의 참다운 행복을 어느 의미에서 닮아있다고 평가한다.
그런 평가가 다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일리가 있다고 본다.”

아퀴나스는 그 연결점이 관상이라고 생각했다.
관상에 의해 우리는 하느님의 정수에 더 가까이 이끌린다.
다른 한편 아일랜드의 6세기 수녀원장이었던 브리지드 성인은
지상의 거룩함을 강조했던 사람으로 연결점을 환대의 실천이라고 본다.
성인은 천국을 맥주호수 주변에 둘러앉은 거대한 가족이라고 비유했다.
성인들마다 제각기 다른 길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인들의 삶을 보면,
여기”와 “다음” 세상 사이에서 보이는 틈이 사라지는 통찰의 순간들이 있었다.
그 순간은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인이 썼던 것처럼,
“모든 천국으로 가는 길이 바로 천국”이라는 사실이 분명해 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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