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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사람

그리스도교의 신비가들은 하느님과 영혼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하여
사랑의 감정, 갈망, 불타는 열정 같은 단어를 사용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하느님과 영혼의 관계란 “지상의 두 사람이 깊게 사랑해서
서로를 너무나 잘 이해하는 것과 같다. 눈길만으로도 서로를 이해하는 것 같은 관계”라고 했다.
성인들은 감정에 대하여 무감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이 말과 감정 그 이상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배우자, 이웃, 적 등 누구를 사랑하든지 간에 사랑은 행동으로 표현될 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카라마죠프가의 형제들」에서 도스토예브스키는 죠시마 신부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실제로 사랑을 하는 경험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존재를 확신한다.
이웃을 적극적으로 끈질기게 사랑하려고 노력하라.
그러면 그런 사랑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우리는 하느님의 존재와
우리 영혼의 불멸을 더 확신하게 될 것이다.
이웃을 완전히 이타적으로 사랑하게 되면,
다시 믿음을 회복하고 어떤 회의도 우리영혼 속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적극적인 사랑? 우리는 사랑에 대해 꿈꾸는 것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없다.
우리는 실제로 사랑함으로써 사랑하기를 배운다.
초기 사막교부들 중의 한 사람인 은수자 테오판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당신에게 겸손이나 사랑이 없다고 말한다.
이런 것들이 없는 한 모든 영적인 것은 없다...
겸손은 겸손한 행위로써 얻어지고, 사랑은 사랑의 행위로써 얻어진다.”
매일 반복되는 사랑의 행위는 사랑의 습관을 만들어준다.
의식적인 노력으로 시작되는 것은 실습을 통하여 삶의 어떤 일정한 행동이 되어간다.
우리의 모습이 자비에 의해 빚어진 것처럼,
그것은 모든 상황과 모든 만남에 대한 우리의 응답을 형성시킨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마워하지 않는다면 어쩔 것인가?
그 때에 우리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충고를 마음에 새겨보자: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심어 보라. 그러면 그 곳에서 사랑을 얻을 것이다.”

사랑의 기술

그래도 우리에게 사랑으로 되갚지 않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자연스럽지 않고”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서 은총의 역할에 대해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은총은 큐피드의 화살과 같은 것이 아니다. 선택과 훈련이 역할을 해야한다.
에릭 프롬이 말한 것처럼, “사랑의 기술”이 필요하다.

리지외의 소화 데레사 성인(1873~1897)은 불란서 노르만디 지방의 한 가르멜 수도원에서
짧은 생애를 살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사랑하는 방법에 관해서는 매우 탁월한 숙련공이었다.
어렸을 때에 이미 데레사는 성인이 되려고 결심했고, 그것을 위한 나름대로의 방법도 고안했다.
그는 그 방법을 “영적인 아이의 길”, 혹은 “작은 길”이라고 말했다.

이 길은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의탁의 태도에 기반을 둔 길로서, 일상생활의 모든 자질구레한 일들,
만남들, 작은 모욕 등에 사랑으로 응답하려는 노력을 의미했다.
데레사는 이 길을 실천함으로써 삶의 일상사를 사랑의 용광로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모든 삶의 상황이 거룩함을 표현하기 위한 마당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행동과 의도의 아주 작은 영향력이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데레사는 자신을 하느님의 정원에 핀 “작은 꽃”이며, “아기 예수의 장난감”이라고 칭하길 좋아했다.
그는 강철같은 의지의 소유자였고, 성인이 되는 목표를 반드시 달성하겠다는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대충하여 달성될 수 있는 목표가 아니었다.
죽은 후 발간된 자서전, 「영혼의 일기」에서 데레사는 모든 성소에 대한 부르심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전사, 사제, 교회의 박사, 순교자 등등.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는 자신의 성소가 “사랑 그 자체”라고 믿었다.
이 사랑의 덕은 모든 성소를 하나도 빠짐없이 포용하는 덕이다.
“나의 성소는 사랑입니다!”하고 그는 썼다.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 안에서 나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이런 확신이 그에게 대가를 지불하게도 했지만, 한편으론 기쁨을 주었다.
거룩함에 이르는 “작은 길”은 데레사에게 공동생활에서 나타나는 모든 일상적인
콕콕 찌르는 아픔들까지 받아들이는 길이 되었다.
동료들을 판단하고 비난하려는 충동을 절제해야 하는
모든 일상의 기회들은 데레사의 인내와 용서를 더욱 확장시켜 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수녀원 안에 적은 없다.
그러나 자연히 어떤 수녀는 좋아하게 되고, 또 다른 수녀는 마주칠 기회를 피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피하고 싶은 수녀를 사랑해야 하고,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게 만드는 행동을 한다고 해도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성서말씀을 인용한다, “너희들이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을 사랑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죄인들도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한다.”

데레사는 공동체생활의 일상적인 괴로움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악성폐결핵으로 마지막 수개월 동안
몸과 정신이 큰 고통 속에서 단련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방법을 끝까지 고수했고,
그러한 충실함 속에서 마지막 승리를 증언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어느 날 수녀 하나가 데레사에게 영원한 행복에 대한 책을 읽어 주고 있을 때,
그는 갑자기 이렇게 외쳤다: “나를 끌어당기는 것은 영원한 행복이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이 나를 사로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상에 다시 돌아와 하느님의 사랑이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이 임박하면서 그는 말했다,
“나의 사명은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듯이, 영혼들이 좋으신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것이며,
나의 작은 길을 영혼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나의 이런 갈망이 채워진다면,
세상종말까지 이 지상에서 나의 천국을 지낼 것입니다.
그래요, 나는 나의 천국을 지상에 선한 일을 하면서 보낼 것입니다.

데레사는 겨우 24세였다. 그렇지만 그의 메시지는 세계에 엄청난 호응을 일으켰다.
그리고 시성된 후, 오늘날 가장 인기있는 성인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의 “작은 길”은 모든 사람들에게 와 닿았다. 위대한 일을 하도록 불리운 사람은 소수이다.
그러나 데레사가 표현하듯이,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해야 하는 모든 상황에 대한 응답과
성인들과 순교자들이 증언했던 “위대한” 응답들 사이에는 어떤 연결의 원칙이 있다.
데레사에 의하면 사랑의 정신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모든 순간은 영웅이 되는 순간이며,
행복과 거룩함으로 가는 길에서 한 걸음씩 더 내딛는 행동이다.

사랑하기를 선택하기

데레사가 죽던 해, 1897년에 태어난 도로시 데이는 “소화”와 별로 닮은 점이 없다.
실제로 도로시 데이는 데레사를 처음 알았을 때 호의를 가지지 않았다.
1928년 고백신부에게서 데레사의 자서전을 받았을때, 도로시 데이는 이렇게 말했다,
“열여덟 살에 엄격한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면서 약을 먹거나 식사를 할 때,
추위와 더위를 견디고, 수녀원 안의 악의 있는 동료들을 참아내는 일이 영웅적인 애덕을 실천해야
하는 일이었다고 느꼈다니, 도대체 이 성인은 어떤 성인이었는가?”
개혁자 아빌라의 대 데레사나 쟌다크 같은 성녀에게 도로시 데이는 더 이끌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데이는 소화 데레사를 좋아하는 성인으로 삼았고, 그에 대한 책을 쓰기도 하고,
“작은 길”의 영성에 대해 표현하기도 했다.
데이는 소화 데레사의 가르침에서 사회적 의미를 파악한 몇 안되는 사람이 되었다.
“작은 것들의 중요성을 우리는 무시한다. 작은 것들을 위한 항의와 입장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성인이 되도록 불리었고,
거룩함이란 사랑의 실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라고 데이는 주장한다.

데레사의 “사랑의 기술”이 지닌 실천적인 지혜는 도로시 데이에게 있어서
“무시되고 상처받은 이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생활로 광범위하게 확인되었다.
가톨릭일꾼운동은 아직도 어떤 규칙이나 심사규정을 갖고 있지 않다.
모두가 환영되고 받아들여진다.
결과는 도스토예브스키의 소설에서 보이는 것처럼, 온갖 사람들의 집합체로 나타난다.
순례자들, 학자들, 그리고 “거룩한 바보들”, 젊은이들과 나이든 사람들, 노동자들, 부랑자들,
미친 사람들, 하층사람들, 쓸모 없는 사람들이 모인다. 사랑만이 그런 집구석을 유지시킬 수 있다.

또한 데이는 이런 집에서 나타나는 긴장과 갈등, 어려움을 모르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짐은 너무 무겁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고, 내 사랑은 너무나 작다.
어떤 폭력까지 느낀다. 내 마음 속엔 사랑이 없고, 아무것도 그들에게 줄 것이 없다.
그래도 마치 사랑이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하고 아름다운 일은 그런 가장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당신이 사랑하길 원한다면, 곧 당신은 사랑하게 된다. 이 미치광이 노인을 사랑하길 원한다면,
언젠가 당신은 그렇게 사랑하게 된다. 당신이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가에 달린 것이다.”
도로시 데이가 분명히 사랑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그가 매우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이다.

가톨릭일꾼운동의 무정부적인 기능은 전형적인 수도원의 체제와 너무나 다르게 보이지만,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비슷하다. 즉 일꾼운동에 모여든 사람들 하나 하나가 “애덕의 학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념해야 할 것은 공동체로 산다고 해서 자연적으로
협력과 이해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 반대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다.
소화 데레사의 생각을 다시 살펴보자. 우리는 한 식탁에 앉아 소리내어 먹으면서
신경을 거슬리는 사람을 참는 것보다 추상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다.
이처럼 일상의 작은 일을 하며 치러야 할 단련이 우리의 사랑하는 능력을 정제시켜 준다.
우리는 용서해야 할 일이 있을 때에 비로소 용서를 배우게 되고,
우리의 인내가 불가피하게 시험될 때에 인내를 배우기 때문이다.

토마스 머튼은 수도공동체를 “우리가 행복하게 되는 길을 배우는 학교”라고 불렀다.
이것은 수도원이 소위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머튼에 의하면,
수도공동체에서 우리는 우리의 행복이 “하느님의 행복을 나누는데” 있다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아니면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바보들을 쫓아버리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길이라고 믿기 쉽다.

이런 관점은 가족에 관해서도 사실이다.
가족은 우리가 선택해서 만드는 공동체가 아니다.
때때로 가족은 자연적인 사랑과 지지의 장소이다.
또 다른 때에 가족은 숨막히게 만드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가족 역시 애덕의 학교이다. 우리가 가장 친밀하게 알고 있고,
또 우리를 그렇게 알고 있는 가족 안에서도 우리는 단순히 서로 참아낼 뿐만 아니라,
더 용서하고 더 인내하는, 더 나은 우리자신이 되라는 도전을 받는다.
그런 도전을 찾아 다른 자리로 나아갈 필요가 없다.
도전들은 매일, 매순간이 아니라도 우리를 찾아내고 있다.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 일꾼가족 안에서 보여지는 실패와 불화에 끊임없이 울었다.
그리고 천국을 일별하는 것 같은 짧은 순간의 친절함과 동료애로부터 위로를 받았을 뿐이다.
「긴 외로움」에서 데이는 모든 소명의 핵심에 있는 근본적인 고독에 대하여 표현한다.
그러나 그는 책을 이렇게 끝내고 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
우리는 빵을 쪼개면서 그분을 알고, 빵을 쪼개면서 서로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우리 모두는 긴 외로움을 알고 있고,
유일한 해결책이 사랑이며, 그 사랑은 공동체와 함께 온다는 사실을 배우고 있다.”

새로운 눈

사랑은 우리에게 새로운 눈으로 보도록 허락한다. 표면 밑에 있는 더 깊은 진실과 가치를 보도록 해준다.
분명한 가치나 품격이 보이지 않고 초라하며 낡아빠진 어떤 것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것일 때, 혹은 우리가 특별히 행복할 때,
거기에는 헤아릴 수 없는 가치가 부여된다. 우리 아버지의 낡은 스웨터, 어머니의 오래된 찻잔 등을 보면,
그 낡은 겉모습 아래 숨겨진 진실을 느낄 수 있다. 모든 것은 고유한 비밀의 삶을 지니고 있다.
사랑은 이 공통점이 없는 것들을 한데 모으고, 그것들이 은총의 도구가 되도록 만든다.
성인들에게 온 자연질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므로 무한한 소중함과 잠재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이 사랑에 참여하는 만큼, 모든 것들은 자신들의 초월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모든 것들은 제각기 우리를 우리의 진정한 집으로 초대한다.

성인들은 보이지 않는 실제에 조율을 맞춘 사람들이었다.
즉 우리 모두가 사랑의 그물망 속에 연결되어있다는 사실,
그래서 온 우주가 한 실제에 뿌리를 두고 있고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에 깨어 있었던 사람들이다.
만일 우리에게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서로 갈라져있다는 꿈에서 즉시 일어나 경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실제를 성인들은 보았다.

이런 “사랑의 빛들”에 깨어있었던 한 젊은 가톨릭사제 잉겔마르 운자이티그는
바바리아 지방의 나치 수용소 한 가운데에서 그의 사명의 의미를 이해했다.
다카오의 이십만 수용인들 중에는 2500명이 넘는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이 있었고,
운자이티그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나치 점령자들은 성직자들을 따로 분리시켜 수용했다.
그래서 성직자들은 직분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미가를 만들고, 비밀미사를 하거나, 동료 수용인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다카오는 “세상에서 가장 큰 수도원” 이었다.

유대인들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서품된지 얼마 되지 않아 오스트리아에서
체포된 운자이티그 신부는 다카오에서 첫 번째 소임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는 수용소를 거룩함을 배우는 학교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누나에게 몰래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때때로 불운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매우 큰 행운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삶의 학교에서 오로지 경험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우는 지요.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다른 이들을 위하여 세상에 얼마나 평화가 부족한지 느끼고 경험해야하며,
또한 그들이 참다운 평화에 이르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 때에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에게서 매우 소중하고 아끼는 것을
가져가신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1944년 12월 수용소에 장티푸스가 발병했다. 첫 번째 달에 2천명 이상의 수용인들이 죽었다.
전염된 사람들은 지저분한 막사에 격리되었고, 아무런 돌봄도 받지 못한 채 죽어갔다.
다카오의 지옥 안에서도 이 격리된 곳은 내적인 지성소가 되었다.
병자들을 위한 잡역부 소집에 운자이티크 신부는 20명의 자원 사제들과 함께 응답했다.
장티푸스의 심각한 전염 사태를 볼 때, 자원의 의미는 모두에게 확실했다.
이 자원자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사제들은 이 없음 속으로 자신들의 사랑과 믿음을 가져갔고,
사람들에게 위로와 존엄성을 표현할 수 있었다.
병자들을 돌보고, 그들을 깨끗하게 하는 일은 끝이 없는 일이었다.
사제들은 또한 고백을 들었고, 마지막 성사를 주며,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했다.
나치들이 병동에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그곳은 인간애가 표현되는 특별한 자리가 되었다.

수주일 후, 잉겔마르 신부는 열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는 1945년 3월 2일, 서른 네 살 생일 다음날, 그리고 미군이 수용소를 해방시키기 수주 전에 죽었다.
죽기 바로 전에 쓴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선은 죽지 않습니다.
그리고 승리는 하느님 편에 있어야 합니다.
비록 때때로 세상에 사랑을 전파하는 것이 우리에게 쓸모없는 일로 여겨진다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마음이 사랑에 깨어 있음을 ,
그리고 그 사랑이 피조물이 아니라 참으로 하느님께 바탕을 두지 않는다면,
오래 지탱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알게될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바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여 사랑과 평화가 곧 다시 피어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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