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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성인들의 삶

모든 성인이 다 고통에 관한 글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고통을 하나도 겪지 않고 성인이 된 사람은 없다.
박해, 질병, 굶주림, 친구와 가족의 죽음, 위대한 일과 개인적 꿈의 실패,
결실 없는 노동에 의한 소진, 외로움, 영적인 고통 등등. 성인들의 삶은 고통의 연대기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 고통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값이었다.
또 다른 경우에 고통은 신앙이 단련되고, 시험을 받는 도가니와 같았다.
그리고 많은 성인들은 그들의 회심과 소명의 분별 때 고통을 겪었다.

앗씨시의 프란치스꼬 성인의 삶을 보면 중요한 전환점에서 고통이 보이고
그 고통은 성인에게 새로운 “관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해준다.
많은 다른 성인들의 삶에서도 우리는 프란치스꼬의 체험과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음을 본다.
그들의 삶에서 무기력이 끼치는 영향을 방해하고,
새로운 목표에 필요한 에너지를 발산시키는 고통과 불행의 역할을 깨닫는다.
어떤 경우에 그 고통은 질병이 될 수 있고, 또 다른 경우에는 사랑하는 연인의 상실로,
혹은 어떤 야망의 무너짐으로 표현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고통을 겪으면서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성찰하고 더 깊은 대답들을 찾기 위하여 나아간다.
우리는 더 이상 수레바퀴의 표면에서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영적인 안내자

고통이 우리 삶의 황량함과 “헛됨”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 결과는 마땅히 절망일 것이다.
그러나 성인들의 삶에서 고통은 그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 낸다.
고통은 성인들이 갖고 있던 착각과 망상을 벗겨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들을 열어주고, 은총의 현존을 더 빨리 느끼도록 예민하게 만든다.
이렇게 될 경우 고통은 자비로운 친구가 되고, 심오한 영적인 안내자가 될 수 있다.
이 역설적인 진리를 깨달으면서 어떤 성인들은 십자가의 고통에 자신들을 내던질 수 있는 경험을 갈구하기도 했다.
그들의 목적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이었다.
즉 영감. 연민, 깊은 헌신 등, 극한적인 상황이 가져올 수 있는 경험들을 원했던 것이다.

노르위치의 쥴리안(1342~1416) 이야기는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그는 영국의 은둔자이며, 신비가로서 저서인 「거룩한 사랑의 계시」에서 젊었을 때
죽음과 같은 위중한 병에 걸려보기를 기도했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여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 실감있게 느껴보고 깨닫기 위해서였다.
또한 회심, 연민, 하느님에 대한 갈망에서 오는 “세 가지 상처들”을 받고자 했다.

현대인들에게 이런 쥴리안의 기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게 보인다.
그런데 쥴리안이 흑사병 대란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보자.
그는 고통이 말 그대로 실제이고, 만연되어 있던 때에 살았다.
쥴리안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겪었고,
그래서 고통의 본질과 그 의미를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개인적 경험 안에서 발견했다.
그의 말대로 “질병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로 정화되고,
그 후에 그 질병 때문에 더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 위해서”였다.

쥴리안은 고통을 체험하고자 하는 그의 간구가 서른 살 때에 응답을 받았다고 믿었다.
그 때 그는 신비스럽고 파괴적인 질병을 앓았다.
나흘 밤낮으로 그는 마비상태에 있었고, 견딜 수 없게 고통을 겪었다.
마침내 사제가 병자성사를 주기 위하여 왔고, 쥴리안의 얼어붙은 시선 앞에 십자가를 들었다.
그 때 갑자기 모든 고통과 비탄이 그를 떠나갔다.
그 순간에 쥴리안의 표현을 보면, 그는 “살을 입은 예수님, 고통 중에 있는 살을 입은 예수님을 보았다”고 한다.
예수님은 쥴리안에게 말했고, 다른 신비들뿐만 아니라, 그분의 신체적 고통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그는 하느님의 손안에 호두처럼 잠겨있는 세계를 보았고, 확신이 자리 잡았다.
결국 우리의 살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이 “모든 것이 좋을 것이며, 모든 것이 좋을 것이고,
모든 사물의 모습이 좋을 것”이라는 잊을 수 없는 환시를 본다.

그리스도의 고통에 대한 쥴리안의 환시는 병리학적으로도 생생하다.
나는 왕관 밑으로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고,
그것은 뜨겁고 마음대로 풍부하게 흐르며, 살아있는 시내였다.
떨어지는 커다란 핏방울... 마치 청어의 비늘처럼”
그러나 이 모든 고통을 지켜보면서 그의 관상은 사랑의 깊이에 모아졌다.
“왜, 그리고 누구를 위하여” 그분이 고통을 받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쥴리안에게는 이 모든 사실이 위안과 기쁨의 원천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 “갑자기 그분은 기쁨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분이 고통을 받았던 이유는 그분의 본질적인 선함 때문에,
우리를 그분과 함께 그분의 기쁨의 상속자로 만들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거룩한 사랑의 계시」에서 그리스도는 당신의 의미를 드러낸다.
“내가 너를 위하여 고통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완전히 만족하는가? ...
네가 만족한다면 나도 만족한다.
너를 위하여 수난 받는 것이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며, 끝없는 즐거움이다.
그러므로 내가 더 고통받을 수 있다면, 분명코 나는 더 고통받을 것이다...”

모든 예상과 빗나가며 쥴리안이 죽지 않고 완쾌되었을 때, 그는 받은 계시를 모두 라틴어가 아니라 중세영어로 썼다.
그는 자신이 살았던 노르위치의 교회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았다(지금까지 그의 본명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먼저 극한의 고통을 겪었으나 패배하지 않고, 오히려 고통으로부터 더욱 강해지고 에너지를 충만하게
받은 삶의 지혜를 절실하게 구하는 많은 사람들의 방문을 받으며 살았다.

14세기의 쥴리안이 가졌던 비전들이 오늘날 우리자신의 고통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줄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고통에 대한 쥴리안의 신비적인 관점은 교회의 전통적인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예수는 십자가의 고통으로 인류의 모든 죄의 빚을 대신 “갚았다”.
많은 사람들은 이 빚을 대신 갚았다는 말에 대해 위안을 받지 못하며, 편안하지도 않다.
그러나 쥴리안의 관점은 이 대속의 의미를 넘어선다.
쥴리안에게 예수의 고통이 지닌 깊은 의미는 하느님의 연민이 얼마나 깊은가­
우리와 함께 기꺼이 고통을 겪으시는 하느님­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지혜에서 위로를 얻을지 모르지만,
쥴리안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강조했다.
쥴리안은 고통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라서 그는 우리 모두가 “영혼과 육체로서 하느님의 선함으로 옷을 입고,
그것에 둘러싸인 존재” 라는 거룩한 진리를 통찰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쥴리안이 스스로 고통을 겪으면서 터득한 영감이며, 절망이나 금욕적인 체념이 아닌 깨달음이었다.

이 단계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이 연민을 실천하는 기회라고,
다시 말하자면 하느님과 함께 고통을 겪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또한 사랑을 표현하는 길이기도 하다.
생각으로는 간단하지만, 실천하기엔 엄청난 사랑의 이야기이다.
그렇게 성인들은 우리를 가르친다.

수동적 축소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뇌의 작은 부분만 사용하게 된다.
우리 몸에는 운동이 부족한 근육들이 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 인간성의 어떤 부분들은
어떤 체험들이 일어날 때까지 ­사랑에 빠진다든가,
아이를 가지거나, 죽음에 직면하는 등­ 잠들어 있거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체험을 하게되면, 생명을 얻는다.
고통은 이러한 체험들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불란서의 가톨릭 작가인 레온 블로이는 이렇게 썼다.

“사람은 그의 빈약한 마음 속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자리들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자리들로 고통이 들어가 생명을 불어넣는다.”

마음 속의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이 자리들은 그렇게 할만한 가치가 있는가?
우리 모두는 고통이 필연적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키거나,
좋은 모습이 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고통은 회한, 자기연민, 냉소를 더 가져오기 십상이다.
고통 그 자체를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그러나 고통은 생산적일 수 있다.
우리가 행복을 절대적으로 고통을 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모든 고통과 두려움은 단지 장애물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나 성인들은 목표를 다르게 설정한다.
그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미하고 존경하며 섬기도록” 창조되었다고 확신하며,
그렇게 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그런 사명을 충만하게 수행하는 만큼 행복을 얻게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목표를 설정한다면, 고통은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과 동맹자가 될 수도 있다.

니체는 말했다, “나를 파괴시키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그러나 성인들은 대부분 힘보다 연민을 더 고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쟁기가 굳은 땅을 뒤엎어 물을 더 스며들게 하듯이,
고통도 굳어진 마음을 열어 더 깊은 지혜를 받아들이도록 할 수 있다.
초기 사막의 교부들 가운데 한 사람인 표티키의 디아도코스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노동과 약함으로 시험되어야 하느님의 거룩함이라는 인증을 받을 수 있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고통이 “십자가로 가는 왕도”라고 하면서
그 길은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이고 준비하신 길이라고 한다.
그러한 빛으로 조명한다면, 우리를 파괴시키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의 모상을 더 잘 간직할 수 있게 만든다.
불란서의 예수회 회원이며 신비가였던 피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는
고통과 실패가 가져오는 건설적인 영향에 대해 썼다.
“성인들의 삶, 그리고 일반적으로 볼 때 지혜와 선함이 출중한 모든 사람들은 그들을 비하시키거나,
영영 보잘 것 없게 만들 것 같이 보이는 시련, 추락으로부터 단련되고 정제되어 고귀하게 된 사람들이다.
그런 경우 실패는 마치 식물을 전지하는 칼처럼 그를 더욱 순결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고통은 우리 내면의 생명수가 흐르도록 길을 열어주고, 우리 존재의 가장 순결한 ‘성분들’을 자유롭게 풀어줘서
우리가 더 높이, 더 강하게 피어날 수 있도록 해준다.”

신학자요, 고생물학자였던 떼이야르는 바오로사도의 우주적 신비주의와
진화론 및 현대우주론의 사상을 화해시키고자 했다.
그는 수십 년을 중국의 고비사막에서 인간의 유래에 관한 발굴을 하면서 돌과 화석화된 유물을 수집했다.
그는 별들의 폭발, 거대한 대륙 형성, 그리고 산과 협곡들을 만들어내는 지각변동 등을 과학적 상상력으로
가능한 한 가장 넓게 관망하면서 그 안에서 생명과 우주를 보려고 했다.
그러나 또한 신앙의 눈을 가지고 무생물로부터 원시적인 형태에 이어 더 복잡한 형태로
변해 가는 생명의 모든 변화 뒤에 있는 어떤 운용의 원리를 진화과정 속에서 분별하였다.
이러한 유기체들은 변화를 거듭하며 의식, 사랑, 그리고 더 고귀한 영적 에너지의 형상으로 진화한다고 보았다.

떼이야르는 개인의 삶에서도 이와 비슷한 변화를 알아 볼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최고의 영적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인간화의 원리이다.
다시 말하자면 거룩해지는 변화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의식적인 선택에서 뿐 아니라,
아마도 더 큰 변화를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겪는 것에 의하여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떼이야르는 이것을 수동적 축소의 원리라고 불렀다.
우리의 삶에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모든 형태의 불운들이 있으며, 이것들도 수동적 축소에 포함된다.
“즉, 우리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 우리를 둘러싸는 벽, 우리 몸에 침투하는 보이지 않는 병균,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말 한마디... 다양한 종류와 다른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들과 사고들,
비극적인 개입과 중단... ‘다른’것들의 세계와 우리로부터 투사되는 세계사이에서 오는 모든 것들”이다.
또한 수동적 축소에는 이런 것들 이외에도 세월의 덧없는 흐름, 노년이라는 점차적 쇠퇴가 있다.
세월과 나이는 “조금씩 우리자신을 훔쳐서 결국 마지막에는 우리를 막다른 벽”에 밀어 놓는다.
떼이야르는 우리가 성취뿐만 아니라 패배에 의해서도, 우리의 힘뿐만 아니라 약함에 의해서도,
우리가 하는 것뿐만 아니라 참아내야 하는 것에 의해서도 형성되며, 평가된다고 생각했다.
즐거움과 고통 모두가 우리의 영적 에너지를 해방시켜서 실제의 거룩한 중심과 연결시켜주는 것이다.

떼이야르 자신도 성취와 패배를 직접 경험했다.
그가 살아있을 때, 교회당국은 그리스도교 신학과 진화론을 통합시키려는 그의 노력을 의심스럽게 생각했다.
그들은 그가 원죄교리와 성서의 청조이야기를 훼손시킨다고 비난했다.
그는 공개적으로 신학적 견해를 피력하거나, 책을 출간할 수 없었다.
그는 교회당국의 끊임없는 비난과 그의 정통성에 대한 중상 아래 연구했다.
이러한 제재는 그에게 큰 고통을 안겼으며, 수동적 축소에 관한 생각도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형성되었다.

떼이야르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에 미국의 여 작가 훌래너리 오코너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작품 주제가 “은총을 결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미치는 은총의 행위” 라고 서술했다.
오코너는 그의 소설에서 소시민의 덕, 사회적 지위, 자기 만족적인 이성주의, 혹은 조용하고 고상한 기호 등
착각과 망상이 억지로 벗겨지고 잘려져 버린 인물들을 자주 묘사했는데,
그럼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더 깊은 진실과 용서의 필요를 깨닫게 된다.
오코너는 독자들에게 의미 없는 바보짓으로 여겨지는
육화, 원죄, 구원 등의 주제에 관해 써야 한다는 도전을 강렬하게 느꼈다.
가톨릭 신앙과 인간의 지성이 어울릴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반증으로 떼이야르 샤르댕의 저서들을 권유했다.
그리고 떼이야르의 작품들 중에서도 수동적 축소의 개념이
특히 오코너에게 개인적으로 강한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오코너는 일찍이 루퍼스를 앓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는데, 아버지도 같은 병으로 사망하였다.
나중에는 치료약의 영향 때문에 관절이 점차 쇠약해져서 지팡이에 의존하며 걸었다.
그래서 죠지아의 밀레쥐빌에 있는 가족 농장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고,
그곳에서 매일 아침 두시간 정도 글을 쓰거나, 가축들을 구경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오코너는 부조리에 대해 날카로운 안목을 지니고 있었고,
우스꽝스러운 것과 비참한 것을 화해시키는 능력을 지녔다.
그는 감상적인 동정심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의 저술 활동과 병력을 연결시켜 평가하려는 비평가들에게 강한 반발을 가졌다.
그렇지만 그는 병 때문에 저술에 도움이 되는 훈련을 받았고, 우선 순위들에 대한 감각을 갖게 되었다.
그는 그가 가장 존경하는 사상이 떼이야르의 “수동적 축소”라고 하면서 어떤 노력으로도 변화시킬 수 없는
고통이나 상실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고귀한 자질이라고 평했다.
“나는 쓸 수 있는 에너지를 충분히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 오코너는
“어쨋건 내가 할 일은 쓰는 것뿐이며, 모든 것을 은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예술가로서 그의 가장 큰 책임이 예술을 훌륭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는 자신의 삶이 진행 중에 있는 하나의 작품이라고 여겼다.
그러한 삶의 의미는 바깥으로 드러나는 성공에 따라 평가받지 않는다.
인간존재로서 우리의 가장 고귀한 책임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우리 각자가 갖고 있는 선물들을 사용하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존경하며 섬기는 것”이다.
오코너는 말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창조적 삶의 행위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 행위는 이 세계의 재화들이 최대한으로 거기에 충만하게 활용되어야 하는 지속적인 행위이다.
긍정적인 선물들과 함께 떼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가 말한 ‘수동적 축소’ 까지 다 포함하여 활용되어야 한다!”

오코너는 물론 자신의 긍정적 탈렌트와 고통 등 모든 재화를 “활용”하여
그가 “진정한 나라”라고 불렀던 나라를 향해 살았다.
한 친구에게 이렇게 썼던 것처럼, “나는 결코 아픈 것말고는 아무 곳에도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아픔은 장소이다.
그 장소는 유럽으로 긴 여행을 가는 것보다 더 배울 바가 많은 장소이다.
또한 언제나 아무도 함께 있지 못하고,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장소이다.”

오코너는 39살에 죽었다.
그의 짧은 삶에는 소위 흥미로운 드라마가 부족하다(일생 집과 닭장 사이에서 살았기에).
그러나 그의 삶이 피폐한 삶이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는 상식적인 의미에서 신비가도 아니었지만, 그리스도교적 신비의 핵심을 매우 깊게 살았다.
그것은 노르위치의 쥴리안이 거룩한 “계시” 속에서 받은 것과 같은 영감으로서,
이 세계가 그 모든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위하여
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느님께서 인정하셨다는 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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