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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을 애써 구하지 마라.
         죽음이 당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충만하게 만드는  길을  찾아라.
         - 다크 함마숄드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죽음으로,
         그리고  죽음 후에는  심판으로  정하신다.
         그러나 죽어 가는 모습들은 하나도 같지 않다.
        - 아폴로니우스 성인

어떤 의미에서 보면 행복과 죽음에 관한 생각, 죽음의 현실을 화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죽음에 집착하는 것은 우울증의 증상으로 나타난다.
죽음의 손아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마른하늘에서 구름을, 장미꽃 뒤에서 소멸의 그림자를 보기 십상이다,
그런 사람들은 어울리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모든 기쁜 소식에도 그들은 “그래. 하지만, 내일이면 우리 모두가 죽을 꺼야”하고 말한다.

물론 이와 정반대의 극한적인 경향이 모든 소멸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부정하는 광적인 낙관주의다.  
텔레비전 광고, 체육관에서 미친 듯이 운동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이런 모습이 보인다.
이 낙관주의에 의하면, 중요한 사실은 다만 우리가 오늘 살아있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나 진정한 삶은 불멸성을 억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대면하는 삶이다.
죽음의 실제를 회피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망상, 두려움, 삶의 깊이에 몰입하지 못하거나,
내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것뿐이다.

죽음은 가까이 있건 멀리 있건 간에,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어떤 가능성뿐만이 아니다.
죽음은 우리가 숨쉬기 시작할 때부터 우리의 존재 안에 짜여져 있다.
이렇게 본다면, 죽음을 어떤 일직선상의 끝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죽음이란 모든 것에 앞서 있는 어떤 차원이다.
죽음은 우리의 실존자체를 의문으로 만든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질문을 회피하거나 비오는 날로 연기해 버린다.
파스칼이 말했듯이, “죽음, 비참함, 무지를 치유할 수 없어서,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하여,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참다운 행복은 불행한 생각들을 피하겠다는 결심으로 얻어질 수 없다.
그런 태도는 마치 우리가 비올 때를 제외하고 영원한 햇빛의 땅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두려움이나 회피 없이 죽음을 직면하는 만큼, 우리는 두려움 없이 삶을 직면하기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참으로 행복의 시작이다.
만일 성인들의 행복이 더 견고한 기반에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죽음을 끝으로 생각하지 않고
어떤 새로운 것으로 과월하는 것이라고 여겼다는 점이다.
나치정권에 저항하다 처형된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런 확신을 가졌다.
플로센베르크 감옥의 교수대에서 그는 동지들에게 말했다,
“이것이 끝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생명의 시작이다.”

결국 성인들은 “다가올 세계의 생명”을 믿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에게 니체아 신경의 이 구절은 죽음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걸림돌이다.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매 일요일마다 똑같은 믿음을 입으로만 되뇌이고 있다.
아직도 영원한 생명이라는 개념은 구름에 쌓인 성처럼 우리들의 평상적인 체험으로부터 멀리 있다.
아마도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지상에서의 모든 고통이 끝난 후, 거기에 대한 미래의 보상처럼 여기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기도와 섬김의 삶을 살아간 성인들이나, 박해의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진 사람들은
단지 미래의 보상에 대한 희망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영원한 생명을 이미 가졌고 만졌기 때문에 영생을 믿은 것이었다.

삶에 예의를!

성인들로부터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배우고 싶다면 ­특히 신앙이 그다지 굳건하지 못한 우리 같은 사람들은­
미숙하게 영원한 생명의 주제로 뛰어오르는 것은 실수다.
또한 죽음으로 시작하는 것도 잘못이다.
죽음에 대한 성인들의 자세는 먼저 삶에 대한 자세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죽음이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살아있음의 피할 수 없는 측면이라면, 실존이라는 더 넓은 현상이 바로 진짜 신비이다.
다시 말하자면 질문은 단순히 “왜 우리가 죽는가?”가 아니라, “왜 우리는 살고 있는가?”이다.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이 우리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음의 현실에 직면하는가를 결정하게 된다.

1961년 비행기 사고로 순직한 전 유엔사무총장 다크 함마숄드는 개인일기를 갖고 있었는데,
내적인 삶을 기록한 것으로 사후에 「비망록」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한 부분에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누가 ­혹은 무엇이­ 질문을 던졌는지 모르며, 언제 그 질문이 나왔는지 모른다.
나는 대답했던 것조차 기억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나는 어떤 사람에게 ­혹은 어떤 것에­ ‘예’라고 대답했고,
그 시간부터 나는 실존이 의미로 가득 차 있으므로 삶도 목적을 갖고 있다고 기꺼이 승복하며 확신했다.”

성인들에게 삶의 의미는 부분적으로 그리스도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에서 드러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삶의 의미와 목표를 드러내고 있다면, 그것이 실제의 본질에 관한 어떤 진실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 실존의 경계선과 한계를 지웠으며,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진실이다.
그러므로 삶의 실제에 근본적으로 ‘예’라고 응답하면서 성인들은 그 대답을 예치해 두었다가
죽음의 순간에 현금으로 바꾸는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그들의 ‘예’는 기본적으로 현재 속에서 삶을 향하여 취한 태도였다.
그것은 새로운 생명이 오직 우리의 옛 생명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통찰하고 경험한 것에 바탕을 둔 태도였다.

죽으면서, 우리는 산다

고기잡이 그물을 호숫가에 버린 시몬과 안드레아 사도이든, “죽은 사람들의 장사는 죽은 이에게 맡겨라”는
소리를 들은 예비 제자이든, “용서받고, 더 이상 죄를 짓지 마라”는 말씀을 들은 간음한 여인이든,
예수를 따른 사람들 중에 무엇인가 뒤에 남기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이 점이 본 회퍼의 사상에 기반이기도 했다.
“십자가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행복한 삶을 끝맺는 비참한 종말이 아니며,
그리스도와 우리의 일치가 시작되는 점에서 우리를 맞이한다.
그리스도가 사람을 부를 때, 그분은 그에게 와서 죽으라고 명령한다.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제자들이 무엇인가 ­재난, 무기력, 죄악 등­ 뒤에 남기는 것은
무한히 더 가치있는 것을 위해서이다.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오 13,44).
그리스도가 추종자들을 부를 적에 그분은 그들에게 와서 살라고 한다.

죽음과 삶의 주제가 상호 혼합 되어있는 모습은 바오로서간에 자주 나타난다.
이미 제자들은 이 지상의 삶에서 죽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에 부활했다고 바오로사도는 주장한다.
“예전의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로마서 6,56).
또 다른 곳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따뜻한 동정심과 친절한 마음과 겸손과 온유와 인내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서로 도와주고,
피차에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그 뿐만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십시오”(골로사이 3,2. 12-13).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것은 죽을 때만이 아니라, 오늘 이 순간이며,
그리스도교 입문예식의 중심인 세례성사의 의미이기도 하다.
세례성사는 정화예식이 아니라, 실상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적으로 재현하는 성사이다.

세례를 받으면서 초기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세상에” 죽고 어리석게 보이거나 미친 것같이 보이게 하는,
심지어 전복적으로 느껴지는 가치관을 받아들였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세주와 동맹을 선포하였다.
그것은 구세주의 운명, 즉 체포와 고문과 수치스러운 죽음에 동참하는 선택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런 죽음은 자기 자신과 죄에 죽는 우선적이고 자발적인 과정의 정점일 뿐이었다.
바오로사도의 말처럼, “우리는 매일 죽는 것 같으나,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Ⅱ고린토 6,9)

박해시기가 끝났지만, 사막의 교부들은 광야 속에 머물며 다른 영역에서 그들의 생명을 바치고자 했다.
그들의 욕망과 세상의 가치관에 죽으면서 그리스도교 시대에도 사람들이 악덕, 탐욕, 권력에 대한
갈증으로 물드는 것을 보았고, “새로운 생명 안에서” 거닐기 위하여 노력했다.
그러한 영감은 후기 수도회 전통 속에 이어졌고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모든 회심이 다 바깥세상과의 급격한 단절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가장 즉각적인 회심의 결과는 처음에 내면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죽는 것 자체는 여전히 실제적이다.
어거스틴 성인은 죄에 대해 죽는 것이 단순히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성찰한다:
“나는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 줄 죽음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성인들뿐만 아니라 우리들 모두에게도 삶과 죽음은 많은 차원에서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는 육체적 죽음의 문제와 그 너머에 있는 모든 문제들을 직면하기 훨씬 전에 그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어 가는 것이 아니라, 무기력함이다.
무기력으로 치닫는 삶의 방식들을 우리는 확실히 알고 있다.
또한 동시에 신비스럽게도 더 활기찬 삶으로 이끄는 죽음의 길도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신앙생활에 각인되어 있는 어떤 표지를 드러내 준다.
그 표지를 읽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단순히 적이나 끝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의 눈에 의하여 우리는 직면하는 모든 상황 속에서 새롭고
더 위대한 생명으로 이끄는 길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우리는 육체적 죽음에 직면했을 때조차,
하느님이 그런 길을 마련하신다고 믿는 것이 더 이상 어떤 비약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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