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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홀로 있기 위한 더 나은 길

최근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선불교 등 동방의 종교적 실천방법에서 영감을 받고 있으며,
그것이 각자의 신앙과 아무런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선불교의 특징은 조용하게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훈련이 매우 요구된다.
선수행자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서 그들의 호흡에 주의하며, 마음의 집중을 지향한다.
마음의 집중이란 현재에 충만하게 살아있는 깨우침, 자각을 뜻한다.

고대 불교경전인 “홀로 있기 위한 더 나은 길을 익히기”는 붇다와 테라라는 스님사이의 만남을 그리고 있다.
테라로부터 삶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붇다님은 그에게 “홀로 있는 더 나은 길”을 가르친다.
그것은 “과거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미래가 아직 오지 않았으며,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현재의 순간에 편안히 머무는 길이다.
사람이 이렇게 살아갈 때, 더 이상 마음 속에 주저함이 없다.
사람은 모든 불안과 초조, 회한을 버리며, 모든 욕망의 굴레를 놓아버리고,
그를 자유롭지 못하게 방해하는 족쇄들을 끊어버리게 된다.”

이 경전의 의미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은 아무 의미나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가 홀로 있어도 갈등을 일으키는 생각들과 욕구들에 의해 동요할 때는 더욱 그렇다.
신체적으로 조용하게 앉아있는 행위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오려면,
그에 상응하는 내적인 고요함이나 정적이 함께 있어야 한다.

초기 사막의 은수자들도 이와 똑같은 주제를 다루었다.
평화와 고요를 찾아 사막으로 갔던 사람들은 그곳에서 “악마들”의 군대로부터 창피를 당했을 뿐이다.
모든 분노, 참지 못함, 그리고 질투, 시기가 세상에서 피해간 그들을 동행했다.
동방종교와 만나기 훨씬 전에 이 그리스도교의 영적 탐구자들은 그들 자신의 “홀로 있기 위한 더 나은 길”을 고안했다.
사막의 교부들은 거룩한 성귀나 예수의 이름을 되풀이 하면서 마음을 집중한 기도의 실천을 개발했다.
이러한 실천은 내적인 기도와 하느님 안의 휴식을 구하는 영적인 훈련으로서 “정적, 침잠”을 목적으로 삼았다.

침잠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항상 기도하라”는 바오로의 권고를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항상 기도하라”는 문자 그대로 번역하자면, “와서 쉬어라”는 의미였다.
예수의 이름이나 예수 기도를 (“주 예수 그리스도님,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때때로 호흡의 리듬과 맞추기도 하면서 수도승들은 영적인 실제에 최고로 집중하는 상태에 들어갔다.
그러한 상태에 이르면, 성령께서 그들을 통하여 기도하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아토산의 그리스 수도승인 그레고리오 팔라마스 성인(1359년 사망)은 이 방법의 가장 유명한 대가인데,
그리스도인은 이 기도를 통하여 거룩한 본성을 붙들게 되고, 바위 위에 마음대로 움직이는 로프처럼
자유롭게 세상적인 집착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이러한 침잠(정적)의 영성에 관한 주요자료들이 수세기 동안 수집되어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발간되었다.
이 책의 현대판에 의하면 그것은 “깨우침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고, 주의와 의식을 개발하는 것이며,
거룩함의 표지인 마음집중의 상태를 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1700년대에 그리스어로 처음 출판되었고, 다음세기 초에 슬라브어로 된 책이 모스코바에서 나왔다.
이 책은 러시아의 현대 영성 고전서 중의 하나인 「순례자의 길」에 영감을 주었다.

「순례자의 길」은 1884년 모스코바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는데,
19세기 중반에 러시아 전역과 시베리아를 걸어서 횡단하는 환상적인 여정을 수행했던 익명의
농민 출신 순례자의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을 한 거룩한 수도승으로부터 소개받았다.
그는 수도승에게 바오로사도가 끊임없는 기도라고 말한 것의 설명을 요청하였다.
수도승은 그에게 하루 3천 번씩 예수 기도를 되풀이하는 것으로 시작해 보라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꽤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수 주간이 지난 후 순례자는 6천 번씩 하게 되고, 이어 하루에 만 이천번씩 하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의 온 갈망은 한가지에만 집중되었다. 예수의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기도를 계속하자마자 나는 기쁨과 해방으로 가득 찼다.
마치 나의 입술과 혀가 나로부터 어떤 자극도 받지 않고,
전적으로 그것들 스스로 기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하루를 큰 만족 속에서 지낸다... 마치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다.”

기도는 그가 일상생활을 하는 동안 한결같은 친구가 되었고,
그는 고독의 길을 계속해 갔다.
점차 그는 기도가 그의 입술에서 마음으로 옮겨가는 것을 느꼈다.
이 시점에서 그는 더 이상 말을 되풀이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제 기도는 그의 호흡, 그리고 그의 가슴의 박동과 일치되었다.

삶의 가난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순례자는 그의 끊임없는 “마음의 기도”를 통해서 세상을 영광의 빛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느꼈을 뿐만 아니라,
“바깥세계 전체도 매력과 즐거움이 넘치게 보였다.
모든 것이 나를 사랑으로 이끌어 하느님, 사람들, 식물들, 동물들에게 감사했다.
나는 그들 모두를 마치 피붙이처럼 보게 되었고, 그들 모두에게서 하느님의 이름이 지닌 마술적인 힘을 발견했다.”

예수 기도를 되풀이하면서 얻게되는 내적인 침묵은 세상과 그 움직임으로부터 물러서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이 더 투명하게 보인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모든 것은 그에게 하느님을 말해준다.
모든 얼굴은 그에게 그리스도의 모습을 반영해 준다.
결과는 커다란 행복이고, 그는 열정을 다해 만나는 모든 사람과 그 행복을 나눈다.

현재의 순간

선의 대가인 베트남의 스님 티크 나트 한은 행복과 현재순간에 현존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주시한다.
“현재로 돌아가는 것은 생명과 만나는 일이다.
생명은 오직 현재의 순간에서 발견될 수 있다.
왜냐하면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처됨, 해방, 깨달음, 평화, 기쁨, 그리고 행복은
오직 현재의 순간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생명과의 해후는 현재의 순간에 일어난다.
우리의 약속의 장소는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있다.”

많은 사람들은 현재의 순간에 대한 불교의 강조가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그리스도교의 희망과 대조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불란서의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까뮈 같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교가
“내세의 삶”에 대한 선입견으로 현재에 대한 우리의 윤리적 참여 능력을 약화시킨다고 비난하였다.
의심할 바 없이, 거룩함을 추구하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비난을 받아 마땅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위대한 성인들과 영적인 대가들 중에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을 가졌으나,
현재를 무시하는 것과 달리 매순간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느끼며 투신한다.

그런 사람들 중에 18세기 불란서의 예수회 회원이었던 쟝-삐에르 드 꼬사드가 있다.
그의 명성은 1751년 그가 죽은 후 100년 만에 발간된 책 「거룩한 섭리에의 의탁」에서 왔다.
로렌조 수사의 회상록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실천」을 성찰하면서 꼬사드는
매일의 과제와 의무를 수행하는 가운데에서 거룩함에 이르는 길을 요약했다.
꼬사드에 의하면 모든 매순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순간이므로 하느님의 뜻을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 사랑과 양보로 우리에게 혐오와 권태를 일으키는 것을 견딜 때”
우리는 거룩함의 길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순간”이란 말은 꼬사드의 저서에서 중심이다.
심지어 “현재 순간의 성사”라고 까지 말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성찬례 안에서 빵의 형상아래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눈으로 알아볼 수 있는 것처럼,
충실한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느님의 뜻이 비록 숨겨져 있지만 참으로 현존하고 있음이 분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성찬례는 그냥 평범하고 일상적인 예식에 불과할 것이다.

한편으로 꼬사드의 영성은 노동과 다른 행위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그의 영성은 우리를 침잠과 깨어있음으로 초대한다.
꼬사드는 우리가 삶의 매순간을 하느님의 뜻이 그 뒤에서 우리의 식별을 기다리고 있는
어떤 베일이나 그림자로 생각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러한 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우리 실존의 거룩한 심연에 깨어 있는 것이다.
현재의 순간에 하느님이 보내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너무나 작아서 사람들이 거의 알아보지 못하거나, 추수하지 못하는 겨자씨이다.
찾기엔 너무나 잘 숨겨져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이 보물을 찾는 비결은 무엇인가?
그런 것은 없다.
이 보물은 어느 곳에나 있다.
보물은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다.

삶은 불가피하게 지루한 상황들을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교통혼잡 때문에 정지되어 있다던가, 줄을 서서 기다린다든가 등등.
그러나 이런 일들이 우리의 영적인 실천을 중단시키거나,
산만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하느님의 뜻은 편안하고 기쁠 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지루한 순간 속에도 있으며,
우리를 더 큰 인내와 겸손,
연민으로 이끌고 있는지 모른다.

상황과 그 적절한 응답이 어떻든지 간에, 꼬사드는
거룩함의 길이 하느님의 뜻에 대한 주의와 복종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우리 삶에서 보여지는 모든 혼란과 무질서에도 불구하고 그런 정신으로 살려고 노력할 때에
“우리는 거룩한 지혜의 모든 사랑스러움과 완전함을 보게될 것이다.
신앙은 지상을 낙원으로 바꾼다.
신앙에 의하여 우리의 마음은 천국에 가까이 있다는 즐거움으로 고양된다.
모든 순간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드러내준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의 의미라고 꼬사드는 주장한다.
신앙은 “장막을 옆으로 치우고, 우리가 영원한 진리를 볼 수 있게 해준다.”
만일 우리가 그런 빛으로 살지 못한다면 “행복도, 거룩함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신심행위를 열심히 수행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정주

서구의 수도전통은 나름대로 고요에 접근하는 방법을 지녀왔다.
그것은 말 그대로 신체를 움직이지 않는 것보다,
뿌리에 닿아있다는 의미를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가난, 정결, 순명의 서원에 더하여 베네딕또 성인은 정주, 결단의 서원을 더 첨가했는데,
원칙적으로 자신의 본래 수도원에 그대로 남는 것을 의미한다.
베네딕또는 이 수도원에서 저 수도원으로 쉬지 않고 돌아다니는 소위
“순회수도승”들을 꾸짖으면서 그들이 절대로 결단을 하지 않으며,
“그들 자신의 뜻과 취향에 노예가 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한 결단이 없다면, 상황이 악화되거나 지루할 때
더 마음에 맞는 초원을 찾아 나서는 유혹에 걸려 넘어진다는 것이다.

결단을 싫어하는 모습은 비단 순회수도승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결혼에 대한 결단을 끝없이 연기하기도 한다.
그들은 배우자를 결정하는 것이 다른 선택들을 미리 막아버리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만일 오늘 발견하는 이 사람과 결혼한다면, 내일 혹은 내년에 더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어쩔까?
한편 결혼을 결정하면서도 정신적으로는 항상 다른 선택의 문을 열어놓고 결단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가 상황이 어려워지면 도피구를 찾기가 더 쉬워지기 때문이다.

인간본성의 불완전함을 볼 때, 실제에 있어 “완전한 배우자”나 “완전한 공동체”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어떤 곳에, 저 밖의 어느 곳에 우리를 위한 더 나은 선택이 기다리고 있다는 불안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리는 진짜로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삶의 바닥에 닿아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미끄러지듯 도망치며 살게될 때,
우리는 인간존재로서의 충만함을 얻지 못할 것이다.
끝없이 무지개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행복에만 몰두할 때에
우리는 앞에 다가온 행복을 잊기 쉬울 것이다.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항상 미래에 대해 행복을 꿈꾸고 있으므로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순간인 현재에 결코 행복할 수가 없게 된다.

사막의 수도승들은 이렇게 쉴 수 없는 음울함을 나태, 무감각이라고 불렀다.
지금 우리는 그런 모습을 고요하게 있을 수 없는 무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사막의 교부는 이 나태함에 대하여 이렇게 관찰한다,
“나태함이 행복하지 않은 마음을 사로잡으면, 자기가 살고 있는 자리를 혐오하게 되고,
방에 머물러 있기가 지루해지며, 함께 사는 형제들을 비난하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우리는 다른 곳에 멀리 떨어져 있는 수도원들을 칭송하고,
그들이 수도생활의 진전에 더 도움이 되고, 영혼의 건강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토마스 머튼은 이 “한낮의 악마”에 사로잡혀 고통을 겪었다고 일기에 분명히 밝히고 있다.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가 그곳이 “아메리카의 중심”이며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했던
그가 후에 쓴 일기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수도원의 일상적인 운영에 화가 나고, 장상과의 갈등,
고독한 기도의 생활에 대한 자신의 염원을 질식시킬 것 같은 종교적 체제에 대한 두려움 등.

그래서 그는 더 “순수한” 수도회로 가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로마에 청원하여 더 적막한 곳에 암자나 새로운 수도공동체 설립까지 꿈꾼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장상들에 의해 무산된다.
그 후 머튼은 자기가 살고있는 겟세마니 수도원 내의 작은 암자에서 살 수 있는 허락을 받고,
기도와 글쓰기에 더 좋은 조건 속에서 지내게 된다.
마침내 더 포용적인 장상의 허락으로 그는 수도원 바깥으로 여행할 수 있게 되고,
결국 1968년 방콕의 회의에 참석중 전기사고로 죽는다.
그때쯤 머튼은 자신의 성소와 정주서원에 관하여 평화를 되찾고 있었다.

겟세마니는 결국 그의 집이며, 거룩함을 추구하는 영역이었다.
그는 그곳이 그의 구원을 위한 자리였음을 확신하게 된다.

물론 정주서원은 베네딕도가 간략하게 표현한 것처럼 “태도의 변화”,
즉 성장과 영적인 성숙의 지속적인 과정이 일어날 때에만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자신과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일이나 관계를 일생 끌어간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없다.
수도원의 정주는 수도회원들이 서로와 하느님께 대한 책임을 나누는 것이다.
수도회 회원들이 각자의 깊숙한 마음을 깨닫거나 영혼의 성소와 삶의 상황을 깊게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에,
즉 보다 깊은 것을 추구하려는 결단과 합쳐질 때에 정주는 의미가 있고 영적인 가치를 갖게 된다.

사막의 교부들은 수도생활의 리듬과 절기에 관하여 탁월한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은 위안에 대한 경험이 달의 변화만큼이나 다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결과 수도승들은 그들이 마음의 동요라고 부르는 현상에 대해 연민을 가졌다.
그들이 고안한 처방은 노동이며, 계속적인 기도나 쇄신된 훈련이었다.
에바그리우스 수도승은 특히 예리한 방법을 제시한다:
“나태함의 악마와 만나게 될 때,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우리의 영혼을 두 갈래로 갈라놓아야 한다.
한 부분은 격려해야 할 부분이고, 또 다른 부분은 격려 받아야 할 부분이다.”

여린 소리

성인이란 하느님의 거룩함에 대해 맛을 들인 사람이다.
그의 마음은 사랑의 리듬에 조율되어 있다.
일상생활의 소음과 동요 가운데에서 그 리듬을 듣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듣기 위해서는 어떤 장소와 침묵, 그리고 시간이 요구된다.

많은 성인들은 우리들 대부분처럼 마감과 책임감 때문에 소진되어 그런 특정한 장소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들은 나름의 “내적인 성”을 만들었다.
시에나의 가타리나(중세 이태리의 신비가이며, 예언자였던)는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한 가족을 두고 이런 방법을 썼다.
아버지가 그를 집안에 가두고 하인처럼 부렸을 때,
가타리나는 “마음 속에 작은 기도방”을 짓고, 일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그곳으로 들어가 침묵의 기도를 했다.
바깥에서 보면 바쁜 집안 일에 정신이 없었지만,
그러는 동안 그의 참다운 삶은 자신의 비밀 방에서 피난처를 구한다.
이렇게 하여 일상의 과제와 의무들을 천국에 이르는 사다리로 변화시켰다고 가타리나는 후에 말하고 있다.

성서에 나오는 가장 신비한 이야기들 중의 하나인 열왕기Ⅰ서 19,11-12를 보면,
예언자 엘리야가 그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에게서 도망치며 동굴에 숨어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기다린다.
“크고 강한 바람 한줄기가 일어 산을 흔들고, 야훼 앞에 있는 바위를 산산조각 내었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이어 지진이 일어났으나, 또한 큰불이 일어났으나, 야훼는 거기에 계시지 않았다.
그러나 불길이 지나간 다음 엘리야는 “한 조용하고 여린 소리”를 듣는다.

하느님의 소리가 지진도, 큰불도, 혹은 강한 바람 속에도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분별이 필요하다.
그러나 작고 조용한 소리 속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분별 그 이상의 것이 요구된다.
즉 작은 침묵이 필요한 것이다.

보통 우리는 우리자신을 이 침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세상에 의지한다.
무엇보다도 세상의 소음과 수많은 기분전환의 기회들은
우리 안의 내적인 공간에 있는 공포스러운 침묵을 피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그런 기회들을 붙잡으면서 우리는 값을 치른다:
끝없는 변화, 권태, 불안의 댓가를 지불해야한다.
그것과 대조적으로 성인들의 행복은 어느 정도의 내향성을 제안한다.
그것은 단순하게 말해 내적인 삶을 추구하는 역량이다.
표면에 빠져 살면서 어떻게 내적인 삶을 만들 수 있을까?

기도의 위대한 스승들은 영적인 삶을 대양에 비교했다. 표면의 삶은 바람과 파도가 심하다.
그러나 표면 아래에는 아무리 폭풍이 몰아쳐도 고요한 물이 있을 뿐이다.
행복의 추구는 이 깊은 심연에 닻을 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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