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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나를 붙드는 존재를 신뢰하기

헨리 나웬이 생의 마지막 수년 동안에 쓴 저서들을 보면, 그가 이 특별한 본향(죽음)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관상하고 준비했는가를 잘 알아볼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내가 얼마나 더 오래 살 것인가?... 한가지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매일 매일을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단순한 진리인가!
그런데도 나의 노력은 아직도 부족하다.
나는 오늘 평화를 주었는가?
어떤 사람의 얼굴에 웃음을 띄게 했는가?
치유의 말들을 했는가?
내가 지닌 분노와 회한을 놓았는가?
용서했는가?
사랑했는가?
이런 것들이 진실한 질문들이다!
내가 지금 심는 작은 사랑의 씨앗이 지금 이 세계에서,
또한 앞으로 다가올 삶에서 많은 열매들을 맺을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이것은 그냥 우연히 지나치는 생각들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에 대한 관망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던 사람,
그리고 그런 관망에 따라 온 삶의 태도를 순응시켜 나갔던 사람의 깊은 성찰이다.
죽음에 대하여 던져야 할 중심적인 질문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죽어 가는 모습이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
그리고 우리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과 하느님의 성령을 보내는 새로운 길이 되도록”
어떻게 죽음을 준비할 것인가 이다.

이러한 나웬의 성찰에 특별한 촉매제가 되었던 것은 새벽공동체로 옮긴 후 겪었던 교통사고였다.
그는 이 사고로 거의 죽을 뻔했는데, 목숨이 위태로웠던 것 이외에 어떤 다른 체험을 하게 되었다.
후에 그는 이 체험을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예수에 대하여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내가 경험했던 그 거룩하고 충만한 현존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내가 본 것은 따스한 빛도, 무지개도, 혹은 열린 문도 아니었다.
내가 느낀 것은 인간적이지만 거룩한 현존, 그 자체였다.
그 거룩한 존재는 나에게 가까이 오라고, 또한 모든 두려움을 놓으라고 초대하고 있었다.”
그는 매우 혹독한 고통을 겪었지만 한편으로 인생에서 가장 편안한 시간을 가졌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쓴다. “죽음은 그 권세를 잃었다.
그리고 나를 너무나 친밀하게 둘러싸고 있던 생명과 사랑 속에 소멸하고 말았다.
마치도 바다를 걷고있는데 파도들이 멀리 사라져버리는 것 같았다.
나는 다른편 해안가로 안전하게 가고 있었다.
모든 질투, 회한, 그리고 분노가 부드럽게 사라져 갔고,
지금까지 내가 걱정했던 그 어떤 권세보다 사랑과 생명이 더 크게, 더 깊게, 더 강하게 나타났다.”

그 전에 나온 책을 읽은 독자라면 나웬의 타고난 걱정하는 성향을 알고 있을 터이고,
그래서 위의 표현이 지닌 의미가 얼마나 큰 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평화의 선물”을 받으면서 나웬은 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깨달음을 나눠야 한다고 느꼈다.
영원과 만나는 체험을 한 후, 그는 그에게 주어진 덤 같은 시간을 “지상 그 건너편”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만일 신학이 “하느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라면,
그에게는 “좀 더 신학적으로 살고 다른 이들도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이전에 나온 책에서 나웬은 우리들의 생명이 우리에게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속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제 그는 그런 인식을 죽음에까지 적용한다. 우리가 죄책감, 수치감, 분노, 회한을 갖고 죽는다면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세상에 남기는 유산이 되어 우리가족과 친구들의 삶을 옭죄고 무겁게 만들 것이다.
또 다른 한편, 죽음을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느끼는 평화를 다른 이웃에게 전해주는 선물이요 기회로 여기고 떠날 수 있다.

나웬은 이 주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특히 일생 서커스에 매료되어 있던 그는 한 이미지를 서커스에서 뽑아낸다.
가까이 지냈던 서커스 일가의 한 공중곡예사가 “날으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를 붙잡는 사람이 모든 것을 한다”라고 말했을 때, 나웬은 깊은 감명을 받는다.
그 곡예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내가 밑에서 붙잡는 사람에게 날아갈 때,
난 그저 내 팔과 손을 그를 향해 뻗칠 뿐이지요.
그러면 그는 나를 붙잡아서 밑의 착지대 안에 안전하게 내리도록 끌어당깁니다...
날으는 사람은 날아야 하고, 붙잡는 사람은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날으는 사람은 팔을 뻗으면서 붙잡는 사람이 그를 위해 밑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 서커스의 지혜에서 나웬은 위대한 힘과 위안의 메시지를 발견하였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얼마나 모든 것을 잘 통제하며 다스릴 수 있는가에 따라 우리의 정체성과 성공여부를 판가름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우리 삶의 최종의미는 우리가 얼마나 믿고 놓으며 타 존재의 손에
우리자신을 맡길 수 있는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그는 십자가 위의 예수님이 했던 말씀을 상기한다.
“아버지! 당신의 손에 제 영을 맡깁니다.” 나웬은 “죽는 것은 붙잡는 이를 믿는 것”이라고 성찰했다.

나웬은 자신이 죽기 몇 달전, 아담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았다.
아담은 그가 새벽공동체에 온 첫 해에 돌보았던 심각한 장애를 지닌 청년이었다.
나웬은 그를 통하여 늦은 나이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가 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진정으로 깨달았다.
아담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일상적 일들(먹고 말하고 입는 것 등)을 혼자서 전혀 할 수 없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왜 그런 사람이 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보다,
“왜 하느님이 그런 사람을 살게 했는가?”가 먼저 던져질 질문이었다.
그러나 나웬은 아담의 삶과 죽음에서 복음이야기의 인간적인 재현을 보았다.
“아담은 매우 단순하게, 조용히, 그러나 파문을 일으키며 그곳에 있었다.
그는 단지 그의 삶 자체로서 우리 하느님의 놀라운 신비를 선포하였다.
‘나는 소중하고 사랑 받는 존재, 온전하며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난 존재입니다.’
아담은 침묵으로 이 신비를 증언하였다.
그 신비는 그가 말을 하거나 못하거나, 걷거나 못 걷거나,
자신을 표현하거나 못 표현하거나 상관없이 존재하는 신비였다.
그 신비는 다만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와 상관 있는 신비이다.
아담은 하느님의 사랑 받는 아이였고, 사랑 받는 아이로 존재한다.
그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선포했던 소식과 같은 소식이다... 삶은 선물이다.
우리 각자는 고유하며 이름으로 알려지고 우리를 만들어 내신 존재에 의해 사랑 받고 있다.”

예수님 역시 짧은 공생활 동안에 별로 성취한 바가 없었다.
그분도 세상의 눈으로 보기엔 “실패”하고 죽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아담은 모두 하느님의 사랑 받는 아들들이다
­예수님은 본성으로, 아담은 ‘입양’으로­ 그리고 그들은 우리들 사이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로 살았다.
그것이 아버지 하느님께 봉헌해야 할 유일한 제물이었다.
자녀로서의 삶, 그것이 예수님과 아담에게 유일하게 맡겨진 사명이었다.
그것은 또한 당신과 나의 사명이기도 하다.
그 사명을 믿고, 그것으로부터 살아가는 것이 참다운 거룩함이다”라고 나웬은 쓴다.

나웬은 아담에 관한 책을 썼다.
그는 아담의 삶을 통하여 우리 각자의 삶이 예수의 삶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의 삶 역시, 예수의 삶 안에서 설명된다고 믿었다.
나웬은 아담의 죽음으로부터 팔을 뻗쳐 자신의 비상을 준비해야 한다는 초대를 느꼈던 것 같다.
중력으로부터, 육체와 정신의 온갖 뒤틀림으로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는,
붙잡는 존재의 품안으로 스며들어가는 비상을.
나웬은 이렇게 썼다. “마치도 아담이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헨리! 두려워하지 말아요. 나의 죽음으로 인해 당신이 죽음을 맞아들이는 것을 돕도록 해 주세요.
당신이 더 이상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당신은 충만하게,
자유롭게, 그리고 가득찬 즐거움으로 살수 있어요.’”

그 소리는 전에도 들었던 소리였다.
사후에 발간된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8년 동안 많은 친구들과 친척들이 떠나갔다.
나 자신의 죽음도 그렇게 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전보다 더 깊고, 더 강한 사랑의 소리를 안으로부터 듣는다.
나는 그 소리를 계속 믿고 싶다.
그리고 그 소리에 이끌려서 나의 짧은 삶의 경계를 넘어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시는 곳으로 가고 싶다.”

죽음의 경고

시간은 다양한 얼굴들을 갖고 있다.
오랫동안 시간은 마치 고양이처럼 늘쩍지근하게 기지개를 켜며 별다른 변화 없이 한 가지에
이어 또 한가지 일이 일어나며 지나간다.
그러나 때때로 성서가 kairos라고 표현한 것처럼, 특별한 때가 생겨난다.
무엇인가 숨겨진 의미를 드러내기 위하여 무르익은 때,
어떤 결정적인 응답을 요구하는 위기의 때가 이른다.

죽음도 마찬가지로 다른 모습들을 입는다.
멀리 떨어진 나라의 지진피해자들, 혹은 신문에 난 유명인사의 부고기사로 만나는
죽음의 모습은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인 얼굴이다.
그 때 만나는 죽음은 우리자신의 죽음을 잠깐 상기시키며 스쳐 지나가는 모습이다.
한가지 일화 같은 모습에 불과하다.
그러나 죽음이 우리와 매우 중요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닥칠 때는 다른 느낌을 주기 마련이다.
그 때에 죽음은 일화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보는 모든 것에 다른 빛을 던지는 치명적으로 중요한 사실이 된다.
이 대격변에 영향을 받지 않는 별들, 모든 무죄한 피조물들이 우리를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죽음의 사건이 이처럼 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일어날 때, 모든 것이 달라진다.
가까이 와 있는 죽음을 숙고해도 그것이 가장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것 이외에 아무런 새 정보를 얻을 수 없다.
세계는 바로 그 지점으로부터 다르게 보인다.
두려움, 절망, 공포가 다가온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준비가 되지 않았는지,
다르게 처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수많은 일들,
미완성과 미해결의 많은 일들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죽음이 가까이 오면, 이상하게도 해방의 느낌을 가질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다는 사실에 직면했을 때만큼
삶을 충만하게 느껴본 적이 없다고 증언한다.
많은 걱정들과 주의들이 별 상관이 없게 된다.
많은 것들이 그것들의 참다운 가치에 따라 분명해지고 확연하게 드러난다.
또한 더욱 심오해진다.
1945년 나치수용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던 알프레드 데프(예수회)신부는 감옥에서 이렇게 썼다.
“지난 마지막 주간 동안 삶은 갑자기 훨씬 더 온순해졌다.
너무나 단순하고 평범하게 보였던 수많은 것들이 새로운 차원을 띄게 되는 것 같다.
보이지 않던 온갖 측면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거의 만질 수 있게 된다.
항상 알고 믿었던 것들이 지금은 너무나 구체적인 모습을 보인다.
나는 그것들을 믿지만, 또한 그것들을 살고 있다.”

죽음은 가장 용감한 사람들에게도 공포와 두려움을 일으키게 할 수 있지만 더 긍정적인 영향도 가져다 줄 수 있다.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강력하게 정신을 집중시켜서 영적인 통찰과 도덕적 분별력을 크게 해주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들은 “행복한 죽음”이란 적절한 예고와 준비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죽음이라고 한다.

초기교회시대의 영적인 대가들은 죽음에 대한 깨우침을 영적인 혜택이라고 하며 감사했다.
예를 들면, 「준주성범」의 저자인 토마스 아 켐피스는 이렇게 썼다.
“당신은 마치 오늘이 당신의 죽음의 날처럼 여기며 모든 행위와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결국 모든 날은 우리의 마지막 날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항상 준비하고 살아야 하며, 그래서 죽음이 준비 안된 당신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해야한다.”
책의 또 다른 부분에서 아 켐피스는 이렇게 썼다.
“만일 사람이 사는 동안 내내, 죽을 때에 발견하고자 하는 자기의 모습이 되려고 노력한다면,
그는 행복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사람이다.”

「무지의 구름」(14세기 페스트가 창궐할 때 쓰여진 신비적 고전서)을 쓴 익명의 영국저자는 기도할 때
어떻게 마음을 모을 수 있는지 다음의 충고를 하고 있다.
“기도를 시작할 때 ­그 기도가 길건, 짧건 상관없이­ 가장 당신에게 도움이 되는 길은 기도가
끝났을 때에 당신이 죽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기도를 끝내기 전에 당신이 죽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저자는 이어 덧붙이기를, “물론 확실하게 당신은 기도보다 더 오래 살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에 의지하는 것은 잘못이고, 당신자신에게 그것을 약속하는 것은 실수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인정을 하든, 안하든 간에 우리 모두는 탄환이 들어있는 권총을 우리 머리에 대고 살고 있다.
오늘 권총이 발사되지 않으면, 아마도 내일 발사될 것이다. 내일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발사될 것이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다르게 행동해야 하는가?
모든 말과 행위가 우리의 궁극적인 의도를 담는다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나?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떤 일이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인가?
어떤 이가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총을 겨누고 있다면, 어떤 걱정들을 놓아야 할까?

우리는 전쟁, 테러리즘, 그리고 비이성적인 폭력 등으로부터 오는 죽음의 영상과 실제에 둘러싸여 있을 뿐 아니라,
핵 재앙, 환경파괴로 인한 영혼의 무기력에서도 죽음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우리문화 속에서 개인의 죽음은 대부분 병원이나 양로원에 숨겨져 있다.
그래서 죽음은 우리의 행동과 우선순위를 조정해야 하는 중대한 이유나 급박한 약속처럼 보이지 않고,
통계숫자로 우리의식 속에 남게 된다.

물론 삶에 대한 우리의 역량을 마비시킬 수 있는 죽음에 대한 병적인 집착현상도 있다.
그러나 그런 현상보다 더 일반적인 현상은 죽음을 피하려는 두려움에 찬 선입견,
전심을 다해 참여하기를 요청하는 삶에 무디어지게 만드는 선입견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쉽게 모험, 위험에 대한 두려움, 불편함에 대한 두려움,
우리로 하여금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식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뀔 수 있다.
그리하여 죽음의 망령은 우리가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모두를 갇힌 죄수로 만들 수 있다.
그러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왕 앞에 자신의 양심을 내보이며
죽음을 불사했던 토마스 모어의 평온함, 자유와 비교해 보자.

왕에게 최고의 충성을 서약하라는 친구의 말에 토마스 모어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나는 오늘 죽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내일 죽을 것입니다.”

성인들이 우리들 모두보다 매 순간이 그들의 마지막 순간이라고 인위적으로 기대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지만, 죽음에 대한 정기적인 성찰을 통하여 삶의 의미와 종착점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매순간의 가치와 긴급성을 진심으로 깨어 기억하면서 그들은 자신들과 모든 중요한 것들에 대한 명확한 의식을 유지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더 이상 그들에게 족쇄를 채우지 못했다.
그들은 다른 편으로 건너갔다. 그들은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과월했다.
그리고 죽음이 그 권능을 잃었을 때, 모든 것 (­행복마저도)­이 가능하다.

생명의 씨앗

영국의 가톨릭 작가인 도날드 니콜은 암으로 죽으며 생의 마지막시기에 감동적인 일기를 썼다.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살아있는 그 어느 누구도 죽음에 대하여 나에게 가르칠 수 없다. ­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하여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죽었거나, 어떤 식으로든 그 경험을 목격한 사람들뿐이다.
순교자들(증거자들)은 적어도 우리에게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순교자들과 선조들에게 우리를 동반자로 받아달라고 청한다.
그들이 가르쳐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온 마음을 다해 죽음 속으로 들어가고,
온 마음을 다해, 그리고 즐거움 안에서 죽음에 대한 경험을 포옹하라는 것이다.”

처음의 순교자들은 참으로 그들의 죽음을 진심으로 포옹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처형대로 나아가면서 찬송가를 부르거나 공개적으로 기도했다고 초기순교사화는 전한다.

용기와 확신에 가득찬 그들의 모습에 처형자들조차 놀라움과 두려움에 떨었고,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을 북돋아 주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자인 터틀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던 것이다.

교회는 시작부터 이들 순교자들을 특별한 안내자로 삼았다.
그들의 죽음은 어떤 한 죽음이 아니라 뽈리까르뽀 성인의 죽음처럼, “복음과 하나된” 죽음이었으며,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재현한 죽음이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면서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닮았을 뿐만 아니라,
부활에 대한 그들의 강력한 신앙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순교시대는 네로와 디오클레시안 시대로 막을 내리지 않았다.
현대세계의 곳곳에서 많은 남녀들이 그들의 신앙에 댓가를 치루었고
그들의 죽음은 그런 의미에서 “복음에 일치된” 삶이었다.
그리고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친다.
그들의 이야기는 죽음에서 끝났기 때문에 특출한 것이 아니다.
또한 그들이 우리에게 모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가르쳐 준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최소한도 그들은 한가지 진실을 증언하고 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과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진실이다.
즉 인간 삶의 가장 고귀한 목적은 할 수 있는 껏 우리의 신체적 실존을 연장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르틴 루터 킹 2세 목사는 1967년의 한 인터뷰에서 위의 진실을 표현하는 태도를 보인다.
“나는 매일 죽음의 위협과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수년 전, 만일 죽음이 나를 정복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전혀 내가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오래 사는가가 아니라 높고,
고귀하고, 선한 진실들을 전하는 나의 의무를 얼마나 잘 수행하는가 이다.”

실상 킹은 공적인 여정을 시작하던 초기에 이미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1956년 1월 어느 늦은 밤 걸려온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사악스러운 죽음의 위협을 느꼈다.
그런 전화가 하루에도 수십 번 걸려왔고 그 때는 보통 일어나는 일이었다.
이미 그는 몽고메리 버스타기 거부운동 이후로 엄청난 폭력과 증오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 자신과 가족들은 더 이상 위협을 견딜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
그는 부엌으로 가서 커피 한잔을 앞에 놓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께 향했다.
후에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어디에선가 알 수 없는 곳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마르틴 루터! 의를 위하여 일어서거라. 정의를 위하여 일어서라.
진리를 위하여 일어서라. 그러면 보라,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그 후에 그는 “모든 것을 대면할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다.

마르틴 루터 킹의 이어지는 길은 끊임없는 위험에 노출되는 길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지 사흘 후, 그의 집은 폭발했다.
계속해서 감옥에 투옥되었다.
어떤 때는 거의 치명적으로 칼에 찔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의심과 절망의 유혹을 받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그는 계속 사회 불의와 증오의 뿌리에 더 깊숙이 내려갔으며,
복음의 근본적인 도전 속으로 더 나아갔다.
그러면서 그는 마지막 약속을 향하여 서서히 다가갔다.
1968년 4월 그는 멤피스에서 청소원들의 파업에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분위기는 긴장으로 고조되어 살벌했다. 폭력이 코앞에 있었다.
그의 유명한 “꿈”은 점점 더 악몽이 되어 가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월 3일 저녁, 그는 한 시위에서 연설을 했고 다음의 말들로 끝을 맺었다:

“자, 이제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앞날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에게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산꼭대기에 가 본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걱정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오래 살고 싶습니다.
오래 사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다만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그분께서 나를 산꼭대기에 올라가라고 하실 것입니다.
나는 꼭대기에서 둘러봅니다. 약속된 땅을 봅니다.
아마도 여러분들과 함께 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오늘밤 우리가 한 백성으로서,
약속의 땅에 이를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나는 오늘밤 행복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아무도 무섭지 않습니다. 나의 눈은 영광스럽게 오시는 하느님을 봅니다.”

그는 다음날 암살되었다.
순교자로서 죽는 것을 교회는 특별한 소명이라고 여겨왔으며,
소수의 사람들이 순교에 초대되므로 아무도 순교를 적극적으로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 킹이 암살전야에 암시했던 행복이 그의 죽음보다 우리와 더 깊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성인들의 행복에 관한 한, 그것은 주로 내적인 신뢰의 문제이며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라고 해도 내적인 신뢰만 있다면,
그것은 행복으로 가는 올바른 길이며, 그의 영혼과 운명은 사랑스러운 하느님의 손안에 있다.
성인들에게 행복의 기반은 또 하루나, 또 하나의 절기를 보장받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신뢰와 확신이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로마서 1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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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13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고요히 머무는 것을 배우기 1 [1] 기도방지기 2013.02.03 903
239 12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노동하는 것을 배우기 3 [1] 기도방지기 2013.01.27 836
238 11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노동하는 것을 배우기2 기도방지기 2013.01.21 846
237 10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노동하는 것을 배우기 1 [1] 기도방지기 2013.01.12 965
236 9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놓아버리는 것을 배우기3 [1] 기도방지기 2013.01.02 826
235 8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놓아버리는 것을 배우기2 [1] 기도방지기 2012.12.28 828
234 7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놓아버리는 것을 배우기1 기도방지기 2012.12.21 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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