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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부르심

“소명”이란 말은 라틴어에서 왔는데 호출, 초대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이 말은 단순하게 어떤 직업, 혹은 우리가 “하는” 어떤 일 따위로 자주
그 의미가 변질되어 사용되고 있다.
다른 한편 종교계에선 전통적으로 어떤 특별한 부르심과 같은 뜻으로 여겨진다.
즉 사제직이나 수도생활에 대한 부르심으로 통한다.
그래서 성소를 가졌다는 것은 신부, 수도자, 수녀가 되기로 결심하는 것이라고 이해된다.

그러나 성인들의 삶을 보면, “성소”의 의미는 상식적인 의미보다 한편으론 더 넓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더 좁기도 하다.
바오로사도의 말처럼, 우리들의 부르심이 궁극적으로는 거룩함 그 자체가 목적이며
단순히 종교적 서원을 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의미에서 더 넓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성소란 궁극적으로 개인의 문제이며,
어떤 특정한 개인에게 해당된다는 뜻에서 더 좁은 의미를 갖는다.
성소는 우리 각자가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도록 초대된 방식이다.
제라드 맨리 홉킨스는 우리 각자의 고유하고도 특정한 성소가 실현되고 드러나게 표현되는
과정을 묘사하기 위하여 “자기화”라는 단어를 발명했다.

모든 소멸될 것들은 한 가지 같은 일을 한다:
각자가 머물고 있는 내면의 존재를 다루는 일이다,
자아들­은 스스로 행한다. 나의 자아. 그것은 말하고 읽는다,
내가 하는 것이 나라고 울부짖는다: 그것을 위하여 나는 왔다고

물총새나 나무의 자기화작업은 더 본능적이게 마련이다.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표현한다, “나무는 나무가 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
하느님의 뜻대로 되어 가는 것은 그분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분의 창조적 사랑에 ‘동의하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 있는 것, 그러므로 하느님의 정수와 다르지 않는 이데아를 표현하는 것이므로
나무는 나무가 됨으로써 하느님을 닮는다.” 그러나 인간존재는 어떤가? 머튼은 대답한다:
“나에게 있어 성인이 된다는 것은 나 자신이 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거룩함과 구원의 문제는 실상 내가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것,
그리고 나의 진정한 자아를 찾는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소”를 어떤 특정한 일이나 생활방식과 같은 것이라고 여길 수 없다.
성소는 미리 맞춰진 옷을 입는 것이 아니다.
많은 성인들의 투쟁은 당대에 가능한 선택을 넘어 거룩함으로 가는 길을 만드는 것이었다.
안토니오는 사막에서, 베네딕도는 수도원에서, 프란치스꼬와 글라라는 철저한 가난이라는 그들만의 길을 찾았다.
그들 모두는 다른 사람들이 따르도록 길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길은 기존의 방법들을 먼저 거부하는 것으로부터 싹텄다.
무엇인가가 그들로 하여금 다른 길을 찾도록 만든 것이다.

샤를르 드 후꼬(1858~1916)는 퇴폐적인 불란서 기병대 장교로서 초기 삶을 시작했다.
후에 그는 알제리의 한 은둔소에서 사는 자신의 고유한 길을 발견했다.
그는 나자렛 고향마을 목수로서 꽤 오랫동안 살았던 그리스도의 삶의 중요한 부분을,
예수의 “숨겨진” 삶을 닮으려고 했다. 후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느님은 그분이 창조한 모든 영혼들이 그들의 온 존재를 다해 사랑하라고,
현세와 다음세상에서 그렇게 사랑하라고 부르신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들 모두를 거룩함에, 완전함에, 그분을 가까이 따르고 그분의 뜻에 복종하라고 부르신다.
그러나 하느님은 모든 영혼들이 똑같은 일로 그들의 사랑을 그분께 보여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똑같은 사다리로 천국에 오르고 똑같은 방식으로 선을 행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천국에 이르는 나의 길은 어떤 길인가?
어떤 삶으로 나는 나 자신을 정화시켜야 하는가?”

후꼬의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어떤 종류의 일, 어떤 자리에서 나는 나의 진정한 자아를, 그렇게 되어야 할 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가?
머튼이 쓴 것처럼,“그 자리를 찾는다면 우리는 행복할 것이다. 그것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완전히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성서에서 부르심은 하느님과 노아, 아브라함, 야곱, 사무엘 등 신앙의 영웅들이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단순히 “여기 제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던 의미 있는 만남들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성서에서 이렇게 되풀이되는 응답들은 그냥 똑같이 “여기 있습니다!” 라고 소리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이 중대한 순간임을 선포한다.
그것은 한 사람의 정체성 전체와 목표에 대한 감지가 응답 속에 녹아들어
어떤 초월적인 도전이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도전은 어떻게 우리에게 오는가? 모세에게 온 것처럼 불타는 덤불 한 가운데에서?
프란치스꼬의 경우처럼 무너진 교회 안의 십자가에서 “나의 교회를 다시 세워라”하고 말하는 소리 속에서?
많은 다른 성인들의 경우처럼 성서의 어떤 구절을 마치 그들 자신에게 말하고 어깨를 움켜쥐는 구절로 듣는 가운데에서?
성인들의 삶은 이러한 결정적인 순간들에 달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인들에게서 보여지는 특징은 그들의 부르심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거나 나그네의 요구를 채움으로써,
혹은 현재 순간에 대한 어떤 도덕적인 도전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인들이 부르심을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들었고,
따라서 전적인 응답을 요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때가 올 때 ­오늘날 나의 온 정체성과 목표가 녹아있는 초월적인 도전의 질문에 대해 대답할 의지가 있다면­
그러한 부르심을 알아차리는 것은 더 쉬워질 것이다.


육체와 영혼

도로시 데이에게 그런 질문은 이미 아이 때에 형성되고 있었다.
그는 1897년 뉴욕의 부르클린에서 한 자유 스포츠 기고가의 딸로 태어났다.
집에선 하느님이라는 이름이 거의 언급되지 않았으나, 어린 나이 때부터 그는 성인들의 삶에 매료되었다.
그는 병자들, 절름거리는 사람들, 나병환자들을 돌보는 성인들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았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또 다른 질문이 내 마음 속에 있었다, ‘왜 악을 처음부터 피하지 않고,
그것을 치료하는 일에만 매달려 있는가?’ 사회질서의 변화를 위해 일하는 성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노예들을 보살피기만 하지말고, 노예제도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성인들은?”
이런 질문들에 대해 고심한 끝에 그는 종교에 문을 닫고, 당대의 진보적인 정치에 희망을 두게 된다.
그의 친구들은 공산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로서 그들과 함께 다양한 좌익간행물이나,
반제국주의 연맹 같은 조직에서 일하기도 한다.

이같은 “역사”에 대한 흥분된 참여에도 불구하고, 도로시의 초년 삶은 외로움과 도덕적, 영적 혼동으로 가득했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를 동료들로부터 구분짓게 하는 초월에 대한 염원을 항상 가졌다고 한다.
어떤 친구는 후에 그가 좋은 공산주의자가 되기엔 너무 “종교적인”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도로시 데이도 나중에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도스토예브스키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의 말을 빌려
“살아오는 동안 내내 나는 하느님에게 사로 잡혀 왔다”고 말했다.

초월적인 것에 대한 이 염원이 결국 그를 가톨릭 교회로 가게 했다.
슬픔과 실망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그의 회심은 슬픔 때문이 아니라,
임신과 딸의 출산이라는 “자연적인 행복”의 경험으로 찾아왔다.
그는 즐거움과 감사의 충동을 너무나 크게 느꼈기 때문에 하느님께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하였다.

그러나 그의 회심은 친구들과 관습에 의한 남편(데이는 그를 이렇게 불렀다)의 이해를 엄청나게 뛰어 넘은 비약이었다.
불가지론자이며 무정부주의자였던 남편은 가톨릭주의를 경멸했고,
그가 종교를 받아들인다면 그들의 관계가 끝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데이는 “하느님인가 사랑인가를 택해야 하는 단 하나의 질문에 봉착했었다”고 쓰고 있다.

이런 고뇌에 더하여, 가톨릭이 되려는 그의 결정은 노동계층을 배신하는 것같이 비쳐졌다.
한편으로 그는 가톨릭교회가 가난한 이들, 서민대중, 이민자들의 교회라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 그의 진보적인 친구들과 도로시 데이 자신에게도 교회는 더 자주 부자들의 교회, 기존특권 그룹의 옹호자로 보였다.
그는 그의 초기신앙과 사회정의에 대한 투신을 어떻게 화해시켜야 하는지 몰라서 상심하고 있었다.
1927년 세례 후, 그는 5년의 외로운 시간을 방황 속에서 자신과 딸, 타말의 생계를 불확실한 자유기고가의 수입으로 지탱하면서 보낸다. 그러면서 “육체와 영혼을 이 세계와 다음세계에서 화해시킬 수 있는” 삶의 길을 찾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응답은 하늘에서 들려온 것이 아니라, 강한 불어의 억양으로 말하는 한 덥수룩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1932년 어느 날 데이가 그를 만났을 때, 그의 주머니는 팜플랫과 자료 따위로 불룩해 있었다.
때는 경제공황시기였고, 도로시 데이는 워싱턴에서 열린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한 실업자행진을 취재하고 막 돌아온 뒤였다.
여행은 그의 갈망에 위기를 더욱 부풀렸다. 워싱턴의 성모무염시태 성당에 가서 “내가 가진 모든 탈렌트를 동료노동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어떤 길이 열리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나서 뉴욕에 돌아가자, 곧 피터 모린이 집 문 앞에 도착한 것이다. 그는 불란서의 농가출신으로 55세였다.
그는 지난 20년 동안 세계를 돌아다녔고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복음을 행동에 옮기는 고유한 비전을 구상하였다.
그는 데이의 이름을 들어 알고 있었고, 서로 만나기도 전에 이미 데이가 그의 비전을 실제화 시킬 인물이라고 결정하고 있었다.

모린은 데이와 함께 복음서의 철저한 사회적 메시지를 수행하는 운동을 구상했다.
그들은 단순히 불의를 고발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질서, “노동의 철학”과 가난한 이들안의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것에 기초한 새 질서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피터 모린은 말했다.
그들은 교회나 정부가 그러한 프로그램을 시행하도록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그들의 비전에 따라 오늘을 살기 시작할 것이며,
“사람들이 선해지기가 더 수월한” 사회를 창조하는 일을 할 것이다.

얼마 지난 후에야 도로시 데이는 이 이상한 사람이 자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임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 만남과 이어 운동을 통하여 그는 나머지 생애 내내 거의 오십 년 동안이나 자신이 관여하게 된 일이라고 깨달았다.
가톨릭노동자 신문은 1933년 5월 1일 그 첫 호가 유니온광장에서 배부되었다(노동자 성요셉 축일에).
신문은 미국 전역에 있는 “환대의 집”에 중심을 두고 있는 운동의 도구가 되었다.
가톨릭 일꾼공동체들 안에서 전통적인 “애덕의 활동”(굶주린 이를 먹이고,
벌거벗은 이를 입히며, 집 없는 이에게 잘 곳을 주는)은 평화와 사회정의 활동과 결합되고 있다.

그래서 데이는 어린 시절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었다. 사회질서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성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 질문은 도로시 데이 자신의 삶이라는 대답을 요구했다.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섬기며, 불의와 싸우고 평화적인 대안을 창조하기 위한 작은 방법들을 시도하면서
그는 자신의 성소의 의미를 발견했다. 새로운 거룩함의 모형을 개발함으로써 데이는 행복에 이르는 자신의 길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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