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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조 막달레나

2018.02.24 19:33

기도방지기 조회 수:105

 

예, 자수하는 것이 관계없다면

우리 예수님과 우리 주교님의 뒤를 따르기 위하여 그렇게 합시다.

 

 

성령님 영원한 선이여 !

저희로 하여금 선에 항구하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저희가 성녀 조막달레나를 본 받게 하소서 !

성녀 조 막달레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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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조 막달레나(Magdalena)는 같이 순교한 이 카타리나(Catharina)의 맏딸이다. 대세를 받고 돌아가신 아버지 집안 식구들이 천주교를 엄금했기 때문에 어머니와 막달레나는 외가로 돌아와 살기로 하였다. 그녀의 외조모는 매우 열심하였기에 그들은 편안히 본분을 지키며 살 수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고분고분하게 듣고 열심히 배웠으며 천주와 이웃을 사랑하는데 빠르게 진보하였다. 매일 이른 새벽에 일어나 신심의 일을 다 한 다음에야 집안일을 했고, 바느질과 길쌈으로 어머니와 가사를 돌보았다.

   그녀의 나이 18세에 이르자 어머니가 딸을 교우에게 출가시키려 하였고, 막달레나는 비로소 어머니에게 동정을 지킬 결심을 말하였다. 그러나 모친은 그녀의 뜻을 이해하지만 자신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 못하는 집안 친척들과 또 여러 가지로 의심하는 외교인을 피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가 어떤 교우 집의 하녀로 들어갔다. 그러나 쉴 새 없는 노동과 음식이 넉넉지 못하여 병에 걸리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병에서 완쾌되자 그녀는 좀 덜 고된 교우 집으로 옮겨가 여러 해를 살면서 자신을 위해서 극히 필요한 것 외에는 절약하여 시골에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의 생활을 도왔다.

   서른 살이 된 그녀는 이제 혼담을 이야기할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하고 어머니 곁으로 돌아와 효성과 열심함으로 모든 교우들의 모범이 되었다. 교리를 모르는 이에게는 가르쳐주고, 병자를 간호하고 위로하며, 죽어가는 어린 아이들에게는 대세를 주었다. 그녀는 성품이 온화하고 겸손하며 또 너무나 헌신적이어서 쉬운 일은 남에게 시키고 힘든 일은 자기가 도맡아 하였다. 자신의 고생을 돌보지 아니하였고 박해로 인하여 당할 수 있는 위험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1839년에 이르자 외교인들이 교우들을 못 견디게 굴기도 하고 또 박해의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여 위험이 더 급박하여졌으므로 막달레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올라와 살기로 하였다.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는 막달레나 모녀가 서울로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몇몇 회장에게 분부하여 교우 집에 살도록 주선하게 하였다. 모녀는 회장이 주선한 조 바르바라(Barbara)의 집으로 갔다. 그런데 이 집에는 조 바르바라와 그녀의 두 딸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들의 신세는 조 막달레나의 경우와 비슷하였다. 그러나 막달레나가 모면하려던 박해는 다른 어느 지방보다도 서울에서 더 심하였다. 그래서 함께 살던 교우들은 서로 용기를 북돋워주면서 박해를 받으면 잘 참자고 권면하며 지냈다.

   이윽고 기해박해가 시작되어 포졸들이 주교 계신 곳을 알아내려고 사방으로 찾아다닌다는 것을 들었을 때, “만일 주교님이 잡히시면 우리도 자수하도록 합시다.” 하고 한 사람이 제의하자, 막달레나는 힘찬 목소리로 “예, 자수하는 것이 관계없다면 우리 예수님과 우리 주교님의 뒤를 따르기 위하여 그렇게 합시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수할 필요도 없이 한 달도 채 못 되어 기해년 7월 상순 어느 날 수많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포장이 그들을 불러 문초하고 각각 주리 한 번을 틀게 한 다음 옥에 가두었다. 그런데 감방도 좁은데다가 교우들로 가득 차 있었고 또 때는 아주 무더운 한 여름이어서 열병이 발생하였다. 두 모녀는 마침내 열병에 걸려 1839년 9월 하순 며칠 사이를 두고 차례로 천주님을 찬미하면서 옥사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33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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