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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전경협 아가다

2017.12.09 08:56

기도방지기 조회 수:178

 

나는 대군대부(大君大父)이신 천주를 흠숭하고 섬기는 것이니

결코 사도를 좇는 것이 아닙니다

 

다섯차례나 삼릉장(三稜杖)을 맞았다.

살이 해어져 떨어지고 뼈가 부러지며 피로 땅을 적셨으나

조금도 안색을 변치 않는 그녀의 용기를 보면서 외교인들은 놀라마지않았다

 

내가 여기서 죽을 자격조차 없으니 그것은 한평생 죄만 지었던 탓이리라.

모든 것은 천주의 명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니, 

 

 

성령님 모든 은총을 베푸시는분 !

저희를 가르치시어 겸손하고 소박하게 살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주님 저희를 불상히 여기소서 !

저님 저희가 성녀 전경협 아가다를 본 받게 하소서 !

주님의 기적을 받았던 성녀 전경협 아가다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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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6일에는 또 한명의 궁녀가 하느님의 품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녀의 성명은 전 경협으로 본명을 아가타라고 하였다. 그녀의 용기와 항구심은 이미 그녀가 박희순루치아와 함께 체포되었을 때 나타났으며, 한편으로 그녀가 당한 박해의 고난은 우리에게 또 다른 의미를 보여준 것이었다.

전아가타는 1787년(정조11년)에 서울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곤궁하게 살고있는 것을 안 형광이라는 궁녀가 그녀를 궁중으로 데리고 들어가 함께 생활하였다.

그녀는 외교인들의 미신행위 가운데서 생활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희순루치아에게서 삶과 죽음에 대하여 깊은 이야기를 듣고는 곧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러나 궁중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 훌륭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자 용감하게 이 사치한 생활을 떨쳐버리고 병을 칭탁하여 궁중을 빠져나왔다.

궁중을 나온 후 아가타는 집으로 돌아와 있으려 하였다.

그러나 집안에서 그녀의 의도를 완강히 반대하였으므로 루치아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도와 독서와 수덕에 전념하였다. 본래 성품이 점잖고 강직하며 영리하였던 아가타는 상냥함과 겸손한 태도로 교우들에게서 사랑을 받았으며 여러 외교인들의 마음까지도 감동시켜 이들을 신앙의 길로 인도하였다. 그녀는 자주병을 앓으면서도 언제나 불평을 말하지 않았으며 이전에 맛보았던 궁중의 사치도 그리워하는 일이 없었고 신앙의 힘을 통하여 언제나 곤궁과 고통을 기쁨으로 이겨내었다.

박해가 일어나자 아가타와 함께 있던 교우들도 곧 체포대상에 오르게 되었다. 언젠가는 체포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던 아가타는 4월 15일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이는 천주의 성의(聖意)다』라고 하며 조금도 당황하는 빛이 없이 포청으로 끌려갔다. 당시 그녀와 함께 체포된 사람들은 루치아 박봉손(朴鳳孫) 막달레나 김율리에따 등이었다.

아가타는 궁녀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더 혹독한 문초와 고문을 당하였다. 포장은 그녀에게 『너는 궁녀로서 다른 부녀자들보다 탁월한 자이거늘 사도에 혹하였다고 하니 그것이 진실이냐?』고 반문하였다. 이에 아가타는『천주는 천사와 사람과 만물의 임금이시요 주재자이십니다. 이 천주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기르시며,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여 주시고, 또한 착한 이를 상주시고, 악한 자를 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대군대부(大君大父)이신 천주를 흠숭하고 섬기는 것이니 결코 사도를 좇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다른 문초 중에 이와 비슷한 질문을 받고나서 그녀는『만일 대들보가 집의 가장 중요한 재목이라면 천주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아니십니까? 그러므로 그분을 공경하는데 무슨 죄가 있다고 하시겠읍니까?』라고 하여 재치 있고 변치 않는 대답을 하였다고도 한다. 포장은 이러한 신앙을 꺾기 위하여 형벌을 가하기도 하고 혹은 감언(甘言)으로 달래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내 그녀의 마음이 변치 않을 것임을 알고는 형조로 이송하게 되었다. 형조로 이송된 아가타는 포청에서와 마찬가지로 배교를 강요당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거절하고 그 댓가로 다섯차례나 삼릉장(三稜杖)을 맞았다. 살이 해어져 떨어지고 뼈가 부러지며 피로 땅을 적셨으나 조금도 안색을 변치 않는 그녀의 용기를 보면서 외교인들은 놀라마지않았다.

이러한 형벌 외에도 아가타는 또 다른 박해를 받아야 했다. 그의 오라버니는 외교인으로 상당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는데 누이를 배교시킬 힘은 없고, 한편으로 관직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누이가 옥중에서 죽었으면 하였다. 그리하여 독약이 든 음식을 차려 아가타에게 보내어 먹게 하였다. 그러나 천주께서는 이를 보살펴 먹은 것을 토해내게 함으로써 목숨을 건져 주셨다. 다시 오라버니는 옥졸을 찾아가서 돈을 주며 누이를 매질하여 죽여 달라고 청하였다. 형리는 이 말을 들어 여러 차례 형벌을 가하였으나 아가타는 죽지 않고, 『다만 내가 여기서 죽을 자격조차 없으니 그것은 한평생 죄만 지었던 탓이리라. 모든 것은 천주의 명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니, 그를 위하여 치명할 수 있기 바란다』고 순교의 원의를 나타낼 뿐이었다.

후에 오라버니의 딸은『고문으로 받은 고모의 상처가 하루사이에 씻은 듯이 나았으니, 그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라고 하여 그녀의 몸에 내린 천주의 섭리를 증거 하였다. 이렇게 6개월가량을 옥에 있은 다음 마침내 아가타는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 당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53세였다.

[가톨릭신문, 1984년 6월 17일,
김옥희 수녀(한국순교복자회 · 오륜대순교자기념관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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