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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허계임 막달레나

2017.10.29 14:56

기도방지기 조회 수:237

 

과연 저녁에 남편이 돌아오자 크게 화가 나서 아내를 괴롭히며 목에 칼을 대고 협박했다.

“앞으론 하지 않겠습니다.”

결국 그는 굴복함으로써 간신히 죽음을 면했다.

그후 허계임은 이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배교한 것을 개탄했고

순교의 기회를 놓친 것을 후회하며 슬피 울었다.

그 후로도 계속 남편으로부터 박해를 받았으나

더 이상 굽히지 않고 열심히 수계하게 되었다.

 

 

 

성령님 불혀의 표징이여 !

저희 마음속에 당신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

주님 저희가  성녀 허게임 막달레나를  본받게 하소서 !

성녀 허계임 막달레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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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허계임 막달레나는 그의 며느리 선 막달레나의 증언에 의하면 용인에서 출생했다. 부모님은 다 외교인이었으나, 과천의 봉천리에서 외교인이던 성주(星主) 이씨와 결혼 후 시누이 되는 이매임 데레사에게서 비로소 천주교에 대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아들이 없으므로 늘 “나는 열심히 믿다가 죽는 길 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후에 양자를 들였고 선 막달레나를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남편이 수계하지 못하게 온갖 방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허계임은 그의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한 번은 남편이 이른 아침부터 그녀에게 폭행을 가하고 나서 외출했다. 허계임은 집안 식구를 모아놓고 남편에 대해 말하면서 잔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 너희 아버지가 내게 그렇게 난폭하게 굴었으니 저녁에 들어오면 아마 더할 것이다. 천주를 위해 죽기 전에 이렇게 잔치를 베푸는 것이 아마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과연 저녁에 남편이 돌아오자 크게 화가 나서 아내를 괴롭히며 목에 칼을 대고 협박했다.

“앞으론 하지 않겠습니다.”

결국 그는 굴복함으로써 간신히 죽음을 면했다. 그 후 허계임은 이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배교한 것을 개탄했고 순교의 기회를 놓친 것을 후회하며 슬피 울었다. 그래서 그 후로도 계속 남편으로부터 박해를 받았으나 더 이상 굽히지 않고 열심히 수계하게 되었다.

허계임은 남편을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1838년 남편이 임종하게 되자 결국 허사가 되고 말았다. 허계임은 판공 때가 되면 시누이와 함께 상경, 딸집에 머물며 성사를 받고 돌아가곤 했다. 기해년 봄에도 마침 성사를 보러 상경했을 때, 박해가 크게 일어나 교우들이 많이 잡혀갔다.

허계임은 박해를 피할 수 없음을 짐작하고 주님을 위해 치명하기로 결심한 끝에 두 딸과 시누이와 함께 있던 교우 등 6명이 4월 11일 모두 포졸 앞에 나가 자헌하기에 이르렀다.

9월25일 ‘내일 네 어미가 형장에 나갈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아들은 그날 밤 급히 상경해 어머니의 순교광경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는데, 망나니가 첫 번 칼을 쳤으나 목이 떨어지지 않자, 다음 망나니가 다시 한 번 칼을 치니 허계임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때는 1839년 9월26일 서소문 밖 성녀의 나이 67세였다. 9월 26일 처형된 순교자들이 문초당한 이야기는 몇 분만 제외하고 상세히 알려져 있어 그분들의 위대한 행동과 확고한 신념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으나 기록이 가장 적게 남아 있는 것이 허계임에 대해서다.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다만 혹형을 참아 받아 그의 두 딸 이영희와 이정희보다 못지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것뿐이다. 유해는 현재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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