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 타이틀1

슬라이드 타이틀2

슬라이드 타이틀3

성녀 이카타리나

2018.02.11 17:58

기도방지기 조회 수:122

 

열심히 남편에게 권고를 하고 모범을 보여

마침내는 남편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남편이 대세를 받고 행복한 죽음에 이를 수 있도록 하였다.

 

 

 

성령님 당신의 충만함에서 저희는 모든것을 받나이다 !

저희에게 침묵을 가르치시어 제때에 말할 수 있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주님 저희를 불상히 여기소서 !

주님 저희가 성녀 이카타리나를 본받게 하소서 !

성녀 이카타리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9.46.jpg

 

성인들 중에는 모녀가 함께 순교해 영광의 자리에 오른 다섯 가족이 있는데, 그 중 모녀가 함께 체포되어 거의 같은 날에 옥사한 경우는 성녀 이 가타리나와 그녀의 딸 성녀 조 막달레나 뿐이다. 모녀 순교성인들은 모두 기해박해 때 발생했으며, 이런 사실은 당시 많은 사람들이 가족적인 교리전습(敎理傳習)으로 성교의 진리를 이해하고 이를 신봉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성녀 이 가타리나(과부, 1783-1839)는 교리에 별로 밝지 못한 신자 부모에게서 1783년(정조 7년)에 태어나 시골에서 살았기에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었지만 깊이 신봉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 후 장성해가면서 그녀는 점점 이를 깊이 이해하게 되고 계명을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14세 때 외교인과 결혼한 까닭에 교리를 좀 더 철저히 배울 수가 없었고, 신자의 본분도 제대로 이행할 수가 없었다. 이에 가타리나는 보다 열심히 남편에게 권고 하고 모범을 보여 마침내 남편의 마음을 움직여, 남편이 대세를 받고 행복한 죽음에 이를 수 있도록 하였다. 

 

남편이 죽은 후 외교인으로 남아있는 시집 식구들은 그녀가 행하는 어떠한 천주교 규칙도 받아들이지 않고 이를 엄금하였다. 가타리나는 이러한 환경에서 도저히 성교의 도리를 지키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자녀들을 데리고 친정어머니에게로 돌아와 그들의 신앙생활을 좀 더 자유롭게 하기로 결심하였다.

 

서울에 와서 가타리나 모녀가 생활한 집은 조 바르바라와 그녀의 두 딸인 이영덕(막달레나), 이인덕(마리아)이 생활하고 있는 조그마한 집이었다. 바르바라는 완고한 외교인이었던 남편을 피해 딸들과 함께 집을 나온 후, 범 앵베르 주교의 허락을 얻어 그 집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터였다. 이에 이 다섯 명의 진실한 여교우들은 서로 용기를 북돋아주고 의로운 덕을 쌓아가면서 박해를 받으면 이를 참아내고자 권면하였다. 박해가 시작되고 포졸들이 주교를 찾기 위해 돌아다닐 때, 그들은 함께 모여 “주교님이 잡히면 우리도 자수합시다.”라고 의논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님과 목자들의 뒤를 따라갈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 다섯 여교우는 자수의 기회를 갖지 못했는데, 이유는 포졸들이 그 집에 들이닥쳐 모두 체포했던 까닭이다. 이 때 가타리나의 나이 56세, 그의 딸 막달레나는 32세의 동정녀였다. 그들 모녀는 처음에는 포장대리에게, 다음엔 포장에게 문초를 당했지만, 그들이 받는 어떤 형벌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굳게 참아 내었다.

 

3개월 여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이 가타리나는 오직 주님의 영광을 뒤따르고자 하는 마음만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계속된 형벌로 몸이 쇠약하게 되었고, 당시 옥중에 만연하던 장티푸스에도 걸려 마침내 1839년 9월 옥사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그녀가 바라던 천상의 영광된 길이었다. 며칠 후 딸 막달레나도 그녀의 뒤를 따르게 되었으며, 이에 두 모녀는 하늘에서 한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소공동체 모임 길잡이 작은공동체, 2009년 7월호]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