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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남이관 세바스띠아노

2017.11.12 11:40

기도방지기 조회 수:286

 

동일동사(同日同死)하자 했더니, 이는 못해 동지동사(同地同死)합시다.

 

성령님 얼굴도 이름도 아니 가지신분 !

저희를 가르치시어 올바로 기도하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

주님 저희가 성 남이관 세바스띠아노를 본받게 하소서 !

성 세바스띠아노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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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망 높은 가문의 후예이며, 또한 교우부모에게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열네 살 때 일찍이 모친을 여의고 18세에 조 프란치스코의 딸 바르바라와 결혼해 슬하에 한 아들을 두었으나 얼마 안 되어 죽었다. 1801년 신유년에 박해를 당하여 그의 부친 남필용이 잡혀가 혹독한 형벌을 받았으나, 신앙을 고수한 결과 유배되었고, 곧 유배지에서 선종하였다. 이때 남이관은 처가로 피신했으나 결국 잡혀 경상도 단성으로 유배되었다. 여기서 그는 그의 나이 50세가 넘을 때까지 무려 30년간의 귀양살이를 해야 했고, 1832년에야 겨우 귀양살이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단성은 교우가 없는 지방이어서 남이관은 교리를 배우지 못했고, 아침저녁으로 겨우 주모경을 외우는 것으로 그쳤다. 그러는 동안 냉담하게 되고 심지어 첩까지 얻어 자식까지 낳았다. 그러나 그것이 중죄라는 것을 조금도 알지 못했다. 이관의 나이 약 50세가 되었을 무렵 중병에 걸렸을 때 이웃지방에 귀양 온 교우로부터 교리의 가르침을 받아 첩을 멀리하고 대세를 받은 뒤부터는 교우다운 생활을 했다.

그 후 5-6년 만에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우선 처가로 와서 보냈다. 처가는 정하상과 외척간, 이런 인연에서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여하간 이관은 이때부터 하상과 더불어 신부 영접하는 일을 도모했다.

기해년 박해시초에 남이관은 무서워서 그랬는지 시골교우들을 격려하러 갈 생각으로 서울을 떠났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너무도 유명해 수색의 그물을 빠져 나기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신변에 닥칠 위험을 예측하고 진천을 거쳐 이천으로 피신하였다. 그해 6월 9일 포졸이 남이관을 체포하러 왔으나 그를 잡지 못하고 그의 부인과 15세의 딸만을 잡아 갔다. 동시에 그의 집에서 많은 성화, 성서, 성상이 발각되어 압수되었다. 한편 시골로 피신한 남이관도 잡힘을 면치 못할 줄 알고 치명을 예비하며 기도로써 장차 당할 옥중의 고통을 견디어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결국 한 교우가 포졸을 데리고 가서 그를 체포한 곳은 이천 고을 ‘금죄’라는 곳이었다.

포청은 그가 심상한 천주교인이 아님을 알고 즉시 형조로 이송하였고, 이어 김제준과 함께 의금부포 보내어져서 여기서 유진길, 정하상 등과 함께 국문을 받게 이르렀다. 이튿날, 8월 13일의 국청심문에서 그는 부친이 천주학을 한 까닭으로 이를 배우게 되었으나 신유년 이래 30년 동안을 폐기하였다가 5, 6년 전에 비로소 집에 있는 십계에 관한 책과 기타 서적을 보고 그 요지가 심히 좋아서 아내와 한가지로 강습하게 된 것이라고 그의 봉교 경위를 상세히 자백하였다.

드디어 8월 15일 형조는 남이관에 대해 소위 사서를 강습하여 일심으로 고혹하였으며, 죽어도 뉘우치지 아니하니 당일로 서소문 밖에서 부대 시참에 처한다고 결안하였다. 8월 19일(9월 26일) 참수치명하니 남의관의 나이 60세였다.


[소공동체 모임 길잡이 작은공동체, 2008년 10월호]

 

 

단내 성지는

한국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교우촌 가운데 하나이며

가정 성화를 위한 성가정 성지이다

 

또한 부부인  성녀 조증이 바르바라와  성 남이관 세바스띠아노를 기념하는 성지이다

      

언덕 위에 건립된 성당 외부.이천시 호법면 단천리에 위치한 단내 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당시 광주 유수부인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정은 바오로(鄭溵, 1804-1866년)와 그의 재종손인 정양묵 베드로(鄭亮默, 1820-1866년)의 고향이자 유해가 묻혀 있는 곳이다. 앞에 단천이 흐르고 뒤에 숲이 울창한 와룡산이 감싸고 있는 단내 성지는 한국 교회사에서 처음으로 성직자를 조선 땅에 영입한 주역 가운데 하나인 순교복자 윤유일 바오로(尹有一, 1760-1795년)의 묘가 있는 어농 성지와도 지척이다. 단천리는 또한 한국에 교회가 세워지던 1784년 이전부터 천주교가 들어와 있었던 유서 깊은 교우촌이기도 하다.
 
영동 고속도로 덕평 나들목에서 나와 양 옆으로 시골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논밭 사이의 도로를 따라 7km 정도 달리면 왼편 와룡산 정상 위에서 두 팔 벌려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는 대형 예수성심상을 만나게 된다. 주차장에서 숲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탁 트인 성가정 광장과 붉은 빛의 아름다운 성당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성가정 광장 한편에 설치된 성가정상.광장 한편에 성가정상과 이천 지역에서 태어나거나 체포되어 순교한 5위 성인 순교비(五位聖人殉敎碑)가 자리하고 있고, 그 옆으로 계단을 오르면 말끔하게 단장된 순교자 정은 바오로와 정양묵 베드로의 묘소가 나온다. 묘역 주위에는 유난히 푸른빛을 띠고 있는 소나무들이 우거져 있어 마치 순교자의 굽히지 않는 신앙을 증언해 주고 있는 듯하다.
 
단내 성지가 이렇듯 말끔하게 모습을 갖춘 것은 1987년 9월 15일, 이천 지역 출신의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발족한 ‘이천 성지 개발위원회’가 수원 교구장 김남수 주교의 모시고 윤유일 순교자와 그 일가족을 기념하기 위한 어농 사적지와 함께 이곳 단내 사적지를 축성하면서 본격화되었다.
 
동래 정씨로 그 조부 시절부터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일찍이 서학(西學)을 접했던 정은 바오로의 집안은 이미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촌형인 정섭과 정옥이 신앙을 갖고 있었으며 순교의 모범을 보여 준 바 있다. 신유박해가 지나간 3년 후인 1804년에 태어난 정은 바오로 역시 천주교에 입교했고, 그의 어머니 허 데레사와 부인 홍 마리아 역시 입교하였다. 그들이 살던 단내 마을(단천리) 맞은편의 ‘동산 밑 마을’(동산리)은 103위 한국 순교 성인 중 한 명인 이문우 요한(李文祐, 1809-1840년)의 고향이기도 하다.
 
순교자 정은 바오로와 정양묵 베드로의 묘소.1866년 병인박해의 회오리는 이 마을에도 휘몰아쳤고, 포졸들은 정은 바오로를 붙잡기 위해 매봉에 숨어 망을 보았다. 당시 63세의 노인이었던 그는 추운 겨울날 낮이면 마을 뒷산 ‘검은 바위’ 밑 굴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내려와 잠을 자고 또 올라갔다. 그러나 결국 그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남한산성까지 가파른 산길로 끌려갔다. 이때 그의 형님의 손자인 정양묵 베드로가 작은 할아버지께서 병드신 몸으로 홀로 잡혀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 곁을 지켜드리고자 자진하여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고 함께 잡혀갔다.
 
한 달여를 남한산성에 갇혀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은 두 사람은 그 해 12월 8일(음력) 얼굴에 물을 뿌리고 그 위에 백지를 덮어 숨이 막히게 해 죽이는 백지사형(白紙死刑)으로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그들이 순교한 뒤 시체는 남한산성 동문 밖으로 시구문을 통해 던져졌는데 가족들이 몰래 정은 바오로의 시신을 찾아 이곳에 안장했다. 그러나 정양묵 베드로는 당시 함께 순교한 수많은 시신들 틈에 섞여 미처 찾아오지 못했다. 끝까지 작은 할아버지 곁을 지키다 순교한 정양묵 베드로의 뜻을 기억하고자 2000년 4월 11일 남한산성 동문 밖의 흙 한 줌을 가져와 할아버지 묘 옆에 가묘를 만들어 모셨다.
 
순교자 묘역 입구에는 5위 성인 순교비와 성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또한 단천리는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1821-1846년) 신부가 머물렀던 은이 마을과는 12km 남짓 떨어진 곳이기도 하다. 성 김대건 신부는 1846년 귀국한 이후 동산 밑 마을을 방문하고 이웃한 단내 마을을 찾아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그런 다음 현재 정은 바오로의 묘소 앞 오방이 산모퉁이를 지나 배마실 공소를 거쳐 새벽 어스름에 은이 공소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렇듯 단내 성지는 한국에 존재하는 가장 역사가 오래된 교우촌 가운데 하나이며 성 김대건 신부의 사목활동지이기도 하다. 아울러 한국 103위 순교성인 가운데 이천에서 태어났거나 체포되어 순교한 5위의 성인을 기념하는 성지이다.
 
특별히 단내가 가정성화를 위해 순례하는 성가정 성지로 명명된 것은 성지에서 기념하는 다섯 명의 성인과 순교자 중 이문우 성인을 제외하면 모두 가족 순교자이기 때문이다. 정은 바오로와 정양묵 베드로 순교자는 작은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 이호영 베드로(李~, 1802-1838년)와 이조이 아가타(李~, 1784-1839년)는 남매 사이, 조증이 바르바라(趙曾伊, 1782-1839년)와 남이관 세바스티아노(南履灌, 1780-1839년)는 부부이다. 또한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인 김제준 이냐시오(金濟俊, 1796-1839년) 역시 순교 성인의 한 분이다.
 
정은 바오로와 가족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생활하던 검은 바위 앞에 성모상이 세워져 있다.수원교구는 1998년 4월 26일 순교자 광장에 4m 높이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성상을 안치하여 제막식을 가졌고, 5월 31일에는 십자가의 길 14처와 청소년 캠프장을 새롭게 단장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이어 2003년 7월 12일 지상 1층에 3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성당을 건립하여 봉헌했고, 그 해 10월 9일 5위 성인 순교비를 5m 높이의 화강석으로 제작하여 제막식을 가졌다. 또한 단체 순례객을 위한 영성관을 마련하여 가정 성화를 위해 순례하는 성가정 성지로 관리하고 있다. 그리고 성지 사무실 및 사제관과 소성당 앞 광장에 십자가 화단을 조성하고 그 앞에 야외제대와 성모상, 성 요셉상 등을 설치하였다.
 
또한 와룡산 정상에 설치된 예수성심상 앞에 서면 이문우 성인의 고향인 동산리와 성 김대건 신부의 사목 활동 경로를 조망할 수 있다. 예수성심상에서 와룡산 계곡을 따라 20분 정도 올라가면 정은 바오로와 그 가족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생활하며 기도했던 검은 바위가 있다. 수원교구는 이 검은 바위에 성모상을 세우고 묵주기도를 바치며 박해의 괴로움을 이겨냈던 그들의 신심을 본받고자 하였다. 검은 바위에서 와룡산 능선을 타고 30분 정도 가면 정은 바오로 순교자의 가족들이 가산을 몰수당하고 마을에서 쫓겨나 피난생활을 했던 굴바위가 나온다. 이곳에서는 굶주림과 추위와 두려움 속에서도 신앙과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꿋꿋이 견뎌낸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6년 12월 22일)]
 
정은 바오로와 정양묵 베드로 순교자 묘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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