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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이연희 마리아

2017.07.27 08:48

기도방지기 조회 수:279

 

12살 된 어린 아들의 고문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는 주님의 영광입니다"

고 하며 모정을 억누르고 자신도 혹형과 고문을 감수하였다. 

 

 

 

성령님 !  당신의 영광스러운 옥좌에서 내려오시어

당신 종의 마음 안에 당신의 장막을 세우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

주님 저희가 성녀 이연희 마리아를 본받게 하소서 !

성녀 이연희 마리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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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이연희는 성인 남명혁 다미아노의 부인으로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남명혁과 결혼한 후 28세 경 남편과 함께 입교하였다. 입교한 다음 남편과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회장 직무를 맡은 남편을 도와 공소를 세워 예비신자와 교우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며 성사를 예비시키는 등 부지런히 교회 일을 도왔다.

그녀는 영리한 머리와 남성적인 용기를 가졌으며 교리에 밝아 앞서 말했듯이 많은 여교우들을 가르쳐 성사를 합당히 받도록 지도했다. 그녀는 남편과 같은 날 순교하기를 간절히 원했으나 당시 법으로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 남명혁 다미아노가 회장으로 있으면서 자기 집을 공소로 사용하고 교우들을 위해 마치 여관처럼 사용했으며, 주교와 신부를 보필하고 있으므로 자기 집을 공소로 제공했으므로 주교와 신부를 정성껏 집에 모시고 봉사하며 내조함으로써 헌신적으로 일했음이 분명하다.

남편 남 다미아노와 같이 체포되었고 12세 된 어린 자식이 있었는데 그들이 겪어야 했던 수많은 형벌은 말할 것도 없지만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 것은 어린 자식이 받는 고통이었다. 그는 어린 아들과 다른 감옥에 갇혔는데, 형리들이 그 아들을 형벌한 뒤 잔인하게도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와서는 가엾은 어머니인 이연희에게 그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녀는 아들이 가혹한 형벌을 이기지 못해 혹 배교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럴 때일수록 그녀는 설레는 가슴을 진정하고, 아니 그보다도 마음을 천주께 향해 말하며 평온한 마음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이것은 주님의 가장 크신 영광을 위하는 것입니다.”

또한 체포 당시 포졸들의 무례함을 보고 언동을 준절히 꾸짖었다. 그러나 남편 남 다미아노로부터 이런 주의를 듣고서는 갖은 모욕과 학대를 받으면서도 원망하지 않고 참아냈다.

“교우는 천주를 위해 순량한 양같이 죽어야 하는 것이니, 이런 훌륭한 기회를 놓치지 말라.”

그녀는 마음을 오롯이 바쳐 천주를 진실이 사랑했고, 그 영혼의 원(願)은 오직 천국을 향해 있었다고 어떤 증인이 단언했다.

이 마리아는 여러 차례에 걸쳐 곤장을 맞고 주리를 틀렸다. 마침내 그에게 참수형이 언도되어 1839년 9월 3일 당일 지체 없이 참수 치명하니 성녀의 나이 36세였다.

묵상 : 성녀 이연희 마리아는 회장인 남편의 모든 일을 적극 내조하였고, 형벌 때에 어린 아들의 고문을 보면서도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았을 정도로 신앙의 깊이를 알 수 있다.

특히 십자가 옆에 서 계셨던 성모 마리아의 특별한 도우심이 있었으리라 확신된다. 성모님께 매달려 전구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질 수 있음을 우리는 이런 점을 묵상해 보도록 하자.


[소공동체 모임 길잡이 작은공동체, 2008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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