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 타이틀1

슬라이드 타이틀2

슬라이드 타이틀3

성 최경환 프린치스코

2017.08.20 12:08

기도방지기 조회 수:271

 

그는 태형 3백 40도와 곤장 1백 10도를 맞았다.

그 후 프란치스코는 포장대리 앞에 끌려 나가 치도곤 50대를 맞으니

그것이 최후의 출두요 형벌이요 신앙고백이었다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지이다”

라고 말한 후 몇 시간 뒤에 숨을 거두었다.

 

 

성령님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신분 저희를 가르치시어 

지극히 높으신분의 뜻을  따라 살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주님 저희를 불상히 여기소서 !

주님  저희가 성 최경환 프란치스의 믿음을 본받게 하소서 !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9.31.jpg

 

그의 집은 매우 부유하엿으며, 특히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되었을 때 제일 먼저 입교한 집안 중의 하나였다. 이에 프란치스꼬도 어려서부터 부모에게서 교리를 배워 천주교의 본분을 지켜 나갔다. 본래 성질이 괄괄하여 일어나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신앙의 힘을 얻어 노력한 끝에 점차 온화한 성품을 갖게 되었다 한다.

장성하여 감에 따라 프란치스꼬는 우상숭배에 빠진 주변의 사람들 속에서는 구령(救靈) 하기에 많은 장애가 있음을 깨닫고 형들에게 다른곳으로 이사하자고 권하였다. 그러나 형들이 이를 듣지 않았으므로 어느 날 그는 하직 편지만을 남겨놓은 채 집을 나가버렸다. 그의 편지를 읽은 형들은 매우 놀라 곧 집안 사람을 보내 돌아오도록 간청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더욱 열심히 형들을 설득하여 마침내 가족들이 그의 말을 이해하고 다래골을 떠날 수 있도록 하였다. 프란치스꼬의 가족은 서울 벙거지골이라는 곳으로 이사하여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는 이사하자 마자 외교인들과의 송사(訟事)에 져서 가산을 잃게 되었다. 친구 몇몇이 상소(上訴) 하자고 권하였음에도 그는 『악으로 악을 갚으면 안된다』고 하며 이를 거절하였다.

그 후 프란치스꼬는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다가 마지막에는 과천(果川) 고을 수리산에 정착하여 생활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열성으로 교리의 본분을 지키며 종교서적을 자주 읽고 자녀들에게 성교의 진리를 가르쳤다. 가난한 중에도 애긍시사(哀矜施搭)를 하여 그곳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였으며 그와 더불어 교리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멀리서 찾아오는 이도 있었다. 훗날 토마스 신부는 이 때의 그르 가리켜『저의 부친께서는 자주 묵상하고 신심독서를 함으로써 열렬한 애덕과 신앙의 신비에 대한 훌륭한 지식을 얻으셨옵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천주와 결합하여 종교에 대한 말씀만을 하시고 그러한 말씀은 모든 이들에게 천주께 대한 사랑과 사제에 대한 감탄의 정을 넣어 주었으며 또한 그 분의 열정은 이웃에 대한 박애심과도 결합되어 있었습니다』라 하여 부친이 참된 신앙인으로서의 열성과 신심을 갖고 있었다고 술회하였다.

기해년의 박해가 시작되고 서울과 인근 지방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을때 회장에 임명된 프란치스꼬는 많은 의연금을 모아 옥에 갇힌 교우들과 불행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순교자들의 시체를 매장하기 위하여도 노력하였다. 가족들에게도 순교준비를 시킬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그는 가지고 있던 성패와 성물을 감추었는데 다만 종교서적은 그냥 간직하였다. 순교의 그 날까지 배우고자 생각한 때문이었다.

마침내 7월 31일 밤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이 수리산에 들이닥쳤다. 프란치스꼬는 조금도 놀라지 아니하며 이들을 친한 친구처럼 맞아 들여 음식을 대접한 다음 이튿날에는 교우 40여 명을 데리고 포졸들을 따라 서울로 향하였다.

도중에 외교인들이 그들 일행을 놀리고 비웃었지만 그는 『형제들, 용기를 재시오. 주의 천사가 금자(金尺)를 가지고 당신들의 걸음을 재고있는 것을 보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장을 서서 갈바리아로 나아가시는 것을 보시오』라고 소리치며 모든 이들을 격려하였다.

옥에 도착한 이튿날 아침 포장을 프란치스꼬를 끌어내어 갖은 고문과 형벌을 가하며 배교를 억지로 강요하였다. 피가 흐르고 살이 떨어져나가 뼈가 드러났으나 그는 고통을 참아 조금도 겁내지 아니하였으며 다만 교리를 설명하여 배교할 수 없음을 명백히 할 뿐 이었다. 포졸들은 그의 아들 토마스가 국외로 나가있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 가혹한 형벌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루걸러 고문을 당하면서 그는 태형 3백40도와 곤장 1백10도를 맞았으나 언제나 기도와 전교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이에 옥 중의 죄수들까지 그의 굳은 신앙심에 탄복하였다고 한다.

두달 동안을 갖은 형벌로 시달리던중 9월 11일에는 포장대리 앞에 끌려나가 치도곤 (治盜棍) 50도를 맞으니 그것이 프란치스꼬에게 주어진 최후의 출두요, 형벌이요, 또한 최후의 신앙고백이었다. 이때까지 그를 따른 사람은 아내 이성례(聖禮) 마리아와 이 에메렌시아라는 여교우 뿐이었다. 옥에 돌아온 후 그는 마지막까지 천주의 성의(聖意)를 빌면서 숨을 거두니 때는 1839년 9월 12일로 그의 나이 35세였다.

[가톨릭신문, 1984년 4월 8일,
김옥희 수녀(한국 순교복자회ㆍ수원대 교수)]

 

 

 



신자들 이끄는 교우촌 회장이자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 수리산성지 성당에 걸려 있는 최경환 성인의 가족을 담은 그림. 가톨릭신문 자료 사진.


한국교회 두 번째 사제 최양업의 부친인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은, 회장으로서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심어주는 삶을 산 순교자다.

성인은 충청도 홍주의 다락골(현 대전교구 다락골성지)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성인은 본래 괄괄하고 불같은 성격을 지녀 분노를 잘 조절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천주교 집안에서 자라 가정에서부터 신앙을 체득해오던 성인은 끝없는 노력을 통해 성격을 개선하고자 했다. 그 노력으로 후에는 사람들이 성인이 원래부터 온순한 성품을 지닌 줄 알았다고 말할 정도가 됐다.

복자 이성례(마리아)와 혼인한 성인은 신자들이 많이 사는 곳을 찾아 서울에 정착했다. 하지만 신자들에 대한 탄압이 날로 심해져 가산을 버리고 여러 곳을 전전해야 했다. 마침내 성인은 수리산에 정착, 교우촌을 만들고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며 살았다.

특히 가난한 중에도 끊임없이 나누면서 살아가, 교우촌의 모든 이들이 그를 존경하며 따랐다. 또 늘 교리를 공부하고 자녀들과 신자들에게 가르쳤기에, 교리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먼 지역에 사는 신자들도 찾아오곤 했다.

최양업 신부는 이때의 성인 모습을 회고하며 “부친은 자주 묵상하고 신심독서를 함으로써 열렬한 애덕과 신앙의 신비에 대한 훌륭한 지식을 얻었다”면서 “그의 말씀은 힘 있고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에게 천주의 사랑을 심어줬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성인이 전한 ‘하느님의 사랑’은 말에서 그치지 않았다. 회장직을 맡은 성인은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돈을 모아 옥에 갇힌 신자들과 가난한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나눠줬다. 위험을 무릅쓰고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둬 안장하기도 했다.

성인의 사랑 실천은 자신을 잡으러 욕설을 퍼부으며 들이닥친 포졸들에게도 똑같은 모습으로 다가갔다. 성인은 포졸들에게 요기를 하고 쉬어갈 것을 권했고, 자신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포졸들에게 아침상을 푸짐하게 대접하고 나서 서울 포청으로 끌려갔다.

성인은 다른 신자들보다도 극심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그의 아들이 신부가 되기 위해 나라 밖으로 나간 사실이 알려지면서 고문이 날로 강해져, 성인의 팔과 다리 뼈가 어그러질 정도였다.

성인은 1839년 9월 12일 옥중에서 “예수께 목숨을 바치고 도끼날에 목이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뤄졌다”고 말한 뒤 숨을 거뒀다. 순교 당시 성인의 나이는 35세였다.


성인 발자취 만날 수 있는 곳 - 수리산성지

수리산성지(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병목안로 408)는 성인이 정착해 교우촌을 이루며 생활하던 자리다. 성지에는 성인의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행정 구역으로 분명히 안양시 안양 9동, 시 중심가에서 불과 몇 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한적한 첩첩 산중이 나선다. 서울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 안양 수리산(修理山)은 산의 이름 그대로 세상의 이치를 하느님의 섭리로 갈고 닦았던 곳이라는 뜻인가.

 
예로부터 담배를 재배해 왔다 해서 '담배골', 또는 골짜기의 생김새가 병목처럼 잘록하게 좁다고 해서 '병목골'이라고도 불리었던 수리산은 박해 시대 때 외부 세계와 단절된 천혜의 피난처 구실을 해 왔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로 피땀 어린 사목 활동을 폈던 최양업 신부의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崔京煥, 1805-1839년) 성인의 묘가 수리산 적막한 골짜기에 모셔져 있다. 이곳에는 남부럽지 않은 집안을 일구어 오다가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향을 멀리 떠나 방랑해야 했던 그들 일가의 애환이 서려 있다.
 
최경환 성인은 본래 청양 다락골 사람이었다. 3대째 신앙을 지켜 왔고 지역에서 당당한 풍모를 자랑하던 최씨 집안은 장남 최양업 토마스가 신학생이 되어 마카오로 떠난 후 고발을 빙자한 수많은 협잡배들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과 함께 서울 벙거지골, 강원도 춘천 땅으로 유랑길을 나선다. 하지만 계속되는 배신자들의 등쌀로 다시 경기도 부평을 헤매야 했고 최후에 정착한 곳이 바로 수리산 깊은 골짜기였다.
 
1837년 7월 수리산에 들어와 산을 일구어 담배를 재배하면서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을 모아 교우촌을 가꾸면서 그는 전교 회장직을 맡아 열렬한 선교 활동을 편다.
 
하지만 그를 쫓는 발길은 이 깊은 산 속에까지 미쳐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하지만 기록에 보면 그는 체포라기보다는 스스로 순교의 각오로 포졸들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는 어느 날 새벽 포졸들이 집 앞에 들이닥치자 "어찌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우리는 당신들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직 동이 트질 않았으니 좀 쉬었다가 떠납시다."라며 동네 사람들에게 순교의 용기를 북돋는다.
 
그의 부인 이성례 마리아(李聖禮, 1801-1840년)가 차려 준 아침을 먹고 난 포졸들은 40여 가구에서 골고루 한 명씩을 잡아갔지만 최경환만은 아들을 유학 보냈다는 죄목으로 부인 이성례, 아들 희정, 선정, 우정, 신정 그리고 젖먹이까지 모두 일곱 식구를 잡아가 옥에 가두었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최씨 일가의 비극은 후손들의 눈시울을 붉게 물들인다. 다섯 자식을 모두 끌고 옥에 갇히게 된 어머니 이성례는 세 살짜리 막내가 굶주림으로 숨이 끊어지자 그만 실성할 지경이 되고, 네 아이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배교하겠노라 말하고 네 아이를 이끌고 풀려 나온다. 하지만 옥에 갇힌 남편 생각에 정신을 차린 그녀는 아이들이 동냥을 나간 사이에 다시 갇힌 몸이 된다. 4형제는 옥으로와 어머니를 목메어 부르지만 어머니는 다시 또 배교의 죄를 지을까 두려워 등을 돌린 채 자식들의 목소리를 애써 외면한다. 어린 자식들은 발길을 돌려야 했고 그 후로 동냥한 음식을 옥에 갇힌 부모에게 사식으로 넣어 주었다.
 
1839년 9월 12일 최경환 성인은 치도곤을 맞은 후유증으로 옥에서 치명한다. 그리고 이듬해 1월 31일에는 그 부인 이성례가 당고개에서 참수된다. 어머니의 참수를 앞두고 소식을 들은 어린 4형제는 온종일 동냥한 쌀자루를 메고 희광이를 찾아가 단칼에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 달라며 쌀자루를 건네는 눈물겨운 장면을 연출한다. 그리고 당일 한칼에 목이 떨어지는 어머니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어린 자식들은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어머니의 용감한 순교를 기뻐했다고 전한다. 이성례 마리아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현재 담배골 부근은 도시화의 영향으로 옛 마을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 성지 입구에는 순례자 성당과 피정을 위한 성례 마리아의 집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50여 미터만 올라가면 최경환 성인의 고택이 2008년 복원되어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고, 고택 왼편 계곡을 건너 산을 오르면 최경환 성인의 묘역이 나온다. 성인 묘역까지 오르는 길에는 1987년 안양 시내 교우들이 세운 14처가 있고 묘역에는 동굴 성모상과 야외미사터가 마련되어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5년 10월 23일)]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 묘역 전경. 묘역 오른쪽에 성모상과 성모동굴이 조성되어 있다.
 
 
수리산, 골배마실, 은이 - 박해 시대의 교우촌
 
박해의 칼날을 피해 비밀리에 형성된 전국의 교우촌들은 영원한 본향(本鄕)인 천당길을 얻으려는 숨은 꽃(隱花)들의 보금자리였다. 그들은 이곳에서 신앙을 지켰으며, 순교를 향한 오랜 고통과 세월을 참고 기다려야만 했다.
 
      어화 벗님네야
      우리 본향 찾아가세.
      인간 영복(永福) 다 얻어도
      죽고 나면 허사되고,
      세상 고난 다 받아도
      죽고 나면 그만이라.
      아마도 우리 낙토(樂土)
      천당밖에 다시 없네.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 '사향가' 중에서)
 
그러나 그 대부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홀연히 형성되었다가 배교자나 포졸들의 눈에 띄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 우리 교우촌이었다. 다행인 것은 현재까지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 곳곳에 남아 있고, 신앙 후손들에게 그 신심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1830년대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부친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성인에 의해 교우촌으로 가꾸어진 수리산(修理山, 안양시 안양 3동의 뒤뜸이 마을).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성장한 골배마실(용인군 내사면 남곡리)과 이웃 '숨은 이들의 마을' 은이(隱里) 교우촌. 이 두 지역은 경기도에서도 가장 유명한 교우촌이자 카타콤바와 같은 박해 시대의 비밀 교회로서 신앙을 이어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1836년 초 수리산에서는 최양업이 교우들의 추천으로 신학생으로 선정되었고, 얼마 뒤에는 골배마실에 살던 김대건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수리산이나 골배마실 골짜기는 땅이 척박하였으므로 신자들 대부분이 화전이나 담배 농사를 지어 생활을 꾸려가야만 했다. 그러니 생활에 여유가 있을리 없었지만 그들은 언제나 새 신자들을 환영하였고,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들이 생활 터전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 신부의 방문이 있을 때면 여럿이 모은 공소전(公所錢)을 바쳐 교회 사업을 도왔으며, 아침 저녁으로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을 일상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였다. 이것이 바로 초대 교회로부터 내려오는 나눔과 섬김의 전통이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이곳은 모두 포졸들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당시 수리산의 회장 최경환은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던 터였으므로 태연히 그들을 맞이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내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에게 음식을 준비하여 대접하도록 한 뒤 교우촌 신자들과 함께 오랏줄에 묶인 채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그리고는 무지한 형벌을 여러 차례 받은 뒤 그 상처 때문에 옥중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반면에 최양업 신부의 모친 마리아는 두 살짜리 막내 자식에 대한 육정(肉情, 모정)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하였으나, 이내 잘못을 뉘우친 뒤 끊어지는 육정을 억누른 채 순교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훗날의 시복 과정에서 마리아는 첫 번째의 배교로 제외되고 말았다. 그러나 어린 자식 때문에 일시 배교했으나 이를 뉘우치고 순교한 사실은 오히려 조선의 전통에서 본다면 모정과 신앙을 모두 지킨 모범적인 순교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앞으로의 시복 과정에서는 마땅히 마리아를 다시 '하느님의 종'에 포함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골배마실에 살던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은 사위 곽(郭) 씨의 밀고로 체포되어 순교하였으며, 아내 고 우르술라는 동냥으로 목숨을 부지해야만 하였다. 그러니 첫 번째 방인 사제가 되어 귀국한 뒤 모친을 뵙게 된 아들 김대건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김대건이 골배마실로 돌아와 모친과 함께 생활하면서 은이 공소를 중심으로 활동한 것은 1845년 말부터 다음해 부활절까지였다. 그러다가 그는 황해도 지방의 해로를 개척하러 나갔다가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최경환과 김제준이 순교한 뒤 그들의 시신은 가족들에게 거두어져 수리산 자락과 골배마실 인근에 각각 안장되었다. 그러나 최경환의 무덤이 후손들에 의해 가꾸어져 온 반면에 김제준의 무덤은 잊혀지고 말았다. 이후 최경환의 유해는 1930년에 발굴되어 명동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치되었으며, 본래 무덤 자리와 교우촌은 1965년부터 사적지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또 골배마실에는 1962년 양지 본당 신자들에 의해 김대건 신부상이 건립되었고, 은이 공소 터는 최근에 일부가 매입되어 사적지로 조성되고 있는 중이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5월호]
 
 
교우촌 수리산
 
모방 신부는 조선 입국 이래 끊임없이 지방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가는 곳마다 회장을 임명하거나 신자 집단을 새로 조직하는데 열중하였다. 이때 성 이문우(李文祐, 요한)가 그의 복사로 활동하였는데, 그는 이천의 '동산밑'(경기도 이천시 동산리) 출신으로 춧날 천주가사 "옥중제성"(獄中提醒)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모방 신부가 방문한 교우촌 중에서 유명한 수리산(修理山, 경기도 안양시 안양 4동의 담배촌)과 골배마실(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이 들어있었다.
 
수리산은 최양업 신부가 신학생으로 간택된 성소의 터전으로,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성인을 탄생시킨 곳이었고, 성인의 시신이 묻혀있던 성지이다. 1970년대까지도 그 앞으로는 수리산 자락의 뒤뜸이 마을과 좁은 입구로 가려진 병목 안 마을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개발되어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수리산 교우촌의 중심지인 뒤뜸이는 본래 아무도 살지 않던 곳이었는데, 신자들이 새 마을을 이루면서 신촌(새말)이라 불리게 되었고, 담배 농사를 지으며 생활한 탓에 담배촌으로도 불리었다.
 
이 교우촌이 형성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일설에는 1837년경이라고 하지만 근거는 없다. 여러 가지 사실들로 미루어볼 때, 이보다 훨씬 전인 1832년경에 성 최경환이 처음으로 가족들을 이끌고 이곳에 정착했다고 생각된다. 최경환은 1804년 충청도 다락골의 새터(지금의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태어나 세 살 위인 이성례(마리아)와 혼인하였다. 그리고 18세 때인 1821년에 아들 최양업을 얻은 뒤 형제 가족들과 함께 서울 낙동(서울 중구 회현동)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거처가 발각될 위험이 있게 되자, 이곳 저곳으로 옮겨 살다가 마침내 이곳 수리산에 정착하여 교우촌을 일구게 되었다.
 
순례자 성당 내부의 최경환 성인 가족 모습을 담은 성화.1836년 초에 15세의 장남 최양업을 천주의 종으로 바친 최경환은 회장으로 임명되어 교우들을 돌보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갖은 형벌을 받으면서 40일 이상을 항구함으로 버텨냈다. 이에 형리조차 그를 바위와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그러나 형벌로 헤어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마침내 옥사로 순교하였으니, 때는 1839년 9월 12일이요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최경환 회장이 순교한 뒤, 옥졸들은 그 시신을 가마니에 넣어 노고산(老姑山, 마포 노고산동의 서강대학교 뒷산) 밑에 갖다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둘째 형 최영겸(崔英謙) 부자가 그 시신을 찾아 이름을 적은 사발과 함께 그 산 중턱에 가매장하였다가, 몇 해가 지난 뒤 시신을 발굴하여 뒤뜸이 앞 수리산으로 이장하였다. 그 후 최경환 회장이 1925년에 복자품에 오르게 되자 교회 당국에서는 1930년 5월에 그의 무덤을 찾아 시신을 발굴하여 명동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치하였고, 1967년에는 다시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 모셨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8년 6월호]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