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최경환 프린치스코
2017.08.20 12:08
그는 태형 3백 40도와 곤장 1백 10도를 맞았다.
그 후 프란치스코는 포장대리 앞에 끌려 나가 치도곤 50대를 맞으니
그것이 최후의 출두요 형벌이요 신앙고백이었다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지이다”
라고 말한 후 몇 시간 뒤에 숨을 거두었다.
성령님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신분 저희를 가르치시어
지극히 높으신분의 뜻을 따라 살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주님 저희를 불상히 여기소서 !
주님 저희가 성 최경환 프란치스의 믿음을 본받게 하소서 !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그의 집은 매우 부유하엿으며, 특히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되었을 때 제일 먼저 입교한 집안 중의 하나였다. 이에 프란치스꼬도 어려서부터 부모에게서 교리를 배워 천주교의 본분을 지켜 나갔다. 본래 성질이 괄괄하여 일어나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신앙의 힘을 얻어 노력한 끝에 점차 온화한 성품을 갖게 되었다 한다.
장성하여 감에 따라 프란치스꼬는 우상숭배에 빠진 주변의 사람들 속에서는 구령(救靈) 하기에 많은 장애가 있음을 깨닫고 형들에게 다른곳으로 이사하자고 권하였다. 그러나 형들이 이를 듣지 않았으므로 어느 날 그는 하직 편지만을 남겨놓은 채 집을 나가버렸다. 그의 편지를 읽은 형들은 매우 놀라 곧 집안 사람을 보내 돌아오도록 간청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더욱 열심히 형들을 설득하여 마침내 가족들이 그의 말을 이해하고 다래골을 떠날 수 있도록 하였다. 프란치스꼬의 가족은 서울 벙거지골이라는 곳으로 이사하여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는 이사하자 마자 외교인들과의 송사(訟事)에 져서 가산을 잃게 되었다. 친구 몇몇이 상소(上訴) 하자고 권하였음에도 그는 『악으로 악을 갚으면 안된다』고 하며 이를 거절하였다.
그 후 프란치스꼬는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다가 마지막에는 과천(果川) 고을 수리산에 정착하여 생활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열성으로 교리의 본분을 지키며 종교서적을 자주 읽고 자녀들에게 성교의 진리를 가르쳤다. 가난한 중에도 애긍시사(哀矜施搭)를 하여 그곳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였으며 그와 더불어 교리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멀리서 찾아오는 이도 있었다. 훗날 토마스 신부는 이 때의 그르 가리켜『저의 부친께서는 자주 묵상하고 신심독서를 함으로써 열렬한 애덕과 신앙의 신비에 대한 훌륭한 지식을 얻으셨옵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천주와 결합하여 종교에 대한 말씀만을 하시고 그러한 말씀은 모든 이들에게 천주께 대한 사랑과 사제에 대한 감탄의 정을 넣어 주었으며 또한 그 분의 열정은 이웃에 대한 박애심과도 결합되어 있었습니다』라 하여 부친이 참된 신앙인으로서의 열성과 신심을 갖고 있었다고 술회하였다.
기해년의 박해가 시작되고 서울과 인근 지방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을때 회장에 임명된 프란치스꼬는 많은 의연금을 모아 옥에 갇힌 교우들과 불행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순교자들의 시체를 매장하기 위하여도 노력하였다. 가족들에게도 순교준비를 시킬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그는 가지고 있던 성패와 성물을 감추었는데 다만 종교서적은 그냥 간직하였다. 순교의 그 날까지 배우고자 생각한 때문이었다.
마침내 7월 31일 밤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이 수리산에 들이닥쳤다. 프란치스꼬는 조금도 놀라지 아니하며 이들을 친한 친구처럼 맞아 들여 음식을 대접한 다음 이튿날에는 교우 40여 명을 데리고 포졸들을 따라 서울로 향하였다.
도중에 외교인들이 그들 일행을 놀리고 비웃었지만 그는 『형제들, 용기를 재시오. 주의 천사가 금자(金尺)를 가지고 당신들의 걸음을 재고있는 것을 보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장을 서서 갈바리아로 나아가시는 것을 보시오』라고 소리치며 모든 이들을 격려하였다.
옥에 도착한 이튿날 아침 포장을 프란치스꼬를 끌어내어 갖은 고문과 형벌을 가하며 배교를 억지로 강요하였다. 피가 흐르고 살이 떨어져나가 뼈가 드러났으나 그는 고통을 참아 조금도 겁내지 아니하였으며 다만 교리를 설명하여 배교할 수 없음을 명백히 할 뿐 이었다. 포졸들은 그의 아들 토마스가 국외로 나가있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 가혹한 형벌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루걸러 고문을 당하면서 그는 태형 3백40도와 곤장 1백10도를 맞았으나 언제나 기도와 전교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이에 옥 중의 죄수들까지 그의 굳은 신앙심에 탄복하였다고 한다.
두달 동안을 갖은 형벌로 시달리던중 9월 11일에는 포장대리 앞에 끌려나가 치도곤 (治盜棍) 50도를 맞으니 그것이 프란치스꼬에게 주어진 최후의 출두요, 형벌이요, 또한 최후의 신앙고백이었다. 이때까지 그를 따른 사람은 아내 이성례(聖禮) 마리아와 이 에메렌시아라는 여교우 뿐이었다. 옥에 돌아온 후 그는 마지막까지 천주의 성의(聖意)를 빌면서 숨을 거두니 때는 1839년 9월 12일로 그의 나이 35세였다.
[가톨릭신문, 1984년 4월 8일, 김옥희 수녀(한국 순교복자회ㆍ수원대 교수)]
신자들 이끄는 교우촌 회장이자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 수리산성지 성당에 걸려 있는 최경환 성인의 가족을 담은 그림. 가톨릭신문 자료 사진.
한국교회 두 번째 사제 최양업의 부친인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은, 회장으로서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심어주는 삶을 산 순교자다.
성인은 충청도 홍주의 다락골(현 대전교구 다락골성지)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성인은 본래 괄괄하고 불같은 성격을 지녀 분노를 잘 조절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천주교 집안에서 자라 가정에서부터 신앙을 체득해오던 성인은 끝없는 노력을 통해 성격을 개선하고자 했다. 그 노력으로 후에는 사람들이 성인이 원래부터 온순한 성품을 지닌 줄 알았다고 말할 정도가 됐다.
복자 이성례(마리아)와 혼인한 성인은 신자들이 많이 사는 곳을 찾아 서울에 정착했다. 하지만 신자들에 대한 탄압이 날로 심해져 가산을 버리고 여러 곳을 전전해야 했다. 마침내 성인은 수리산에 정착, 교우촌을 만들고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며 살았다.
특히 가난한 중에도 끊임없이 나누면서 살아가, 교우촌의 모든 이들이 그를 존경하며 따랐다. 또 늘 교리를 공부하고 자녀들과 신자들에게 가르쳤기에, 교리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먼 지역에 사는 신자들도 찾아오곤 했다.
최양업 신부는 이때의 성인 모습을 회고하며 “부친은 자주 묵상하고 신심독서를 함으로써 열렬한 애덕과 신앙의 신비에 대한 훌륭한 지식을 얻었다”면서 “그의 말씀은 힘 있고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에게 천주의 사랑을 심어줬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성인이 전한 ‘하느님의 사랑’은 말에서 그치지 않았다. 회장직을 맡은 성인은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돈을 모아 옥에 갇힌 신자들과 가난한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나눠줬다. 위험을 무릅쓰고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둬 안장하기도 했다.
성인의 사랑 실천은 자신을 잡으러 욕설을 퍼부으며 들이닥친 포졸들에게도 똑같은 모습으로 다가갔다. 성인은 포졸들에게 요기를 하고 쉬어갈 것을 권했고, 자신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포졸들에게 아침상을 푸짐하게 대접하고 나서 서울 포청으로 끌려갔다.
성인은 다른 신자들보다도 극심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그의 아들이 신부가 되기 위해 나라 밖으로 나간 사실이 알려지면서 고문이 날로 강해져, 성인의 팔과 다리 뼈가 어그러질 정도였다.
성인은 1839년 9월 12일 옥중에서 “예수께 목숨을 바치고 도끼날에 목이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뤄졌다”고 말한 뒤 숨을 거뒀다. 순교 당시 성인의 나이는 35세였다.
성인 발자취 만날 수 있는 곳 - 수리산성지
수리산성지(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병목안로 408)는 성인이 정착해 교우촌을 이루며 생활하던 자리다. 성지에는 성인의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행정 구역으로 분명히 안양시 안양 9동, 시 중심가에서 불과 몇 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한적한 첩첩 산중이 나선다. 서울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 안양 수리산(修理山)은 산의 이름 그대로 세상의 이치를 하느님의 섭리로 갈고 닦았던 곳이라는 뜻인가.
우리 본향 찾아가세.
인간 영복(永福) 다 얻어도
죽고 나면 허사되고,
세상 고난 다 받아도
죽고 나면 그만이라.
아마도 우리 낙토(樂土)
천당밖에 다시 없네.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 '사향가' 중에서)
그러나 그 대부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홀연히 형성되었다가 배교자나 포졸들의 눈에 띄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 우리 교우촌이었다. 다행인 것은 현재까지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 곳곳에 남아 있고, 신앙 후손들에게 그 신심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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