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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샤스땅 정 야고보

2017.09.22 08:30

기도방지기 조회 수:179

 

나는 기회가 오면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통을 감수할 힘을 주께 기대합니다

 

 

성령님  불혀의 표징이여 !

저희 마음속에  당신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

주님 저희가 성 샤스땅 정 야고보를 본 받게 하소서 !

성 샤스땅 정 야고보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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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스땅 신부의 한국姓은 정(鄭)씨이고 이름은 본명인 야고보를 한문으로 표기하여 아각백(牙各伯)이라 하였다. 1803년 10월 7일 프랑스의 마르꾸(Marcoux)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일찍부터 공부를 하고자하여 학교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모든 종교행사에 열심으로 참여하고、위험한 교우관계를 피하며 언행을 조심하여 항상 올바른 생활태도를 견지하였다. 특히 그는 위대한 신앙의 정신과 판단력을 가지고 사도적(使徒的) 욕망을 키워나갔다.

1823년 신학교에 들어가 신앙의 열정을 기른 다음 3년 만에 신품을 받고 이듬해에는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수련을 치르고 나서 곧 프랑스를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는 얼마동안 중국에 입국하지 못하고 근처의 포교지에서 선교를 하고 있었다. 당시 브뤼기애르(Bruguiere) 주교는 샤스땅 신부의 열성을 관심있게 보고 있었으며、이에 1833년 주교 자신이 조선에 파견되자 그에게 동행을 허락하였다.

「마카오」를 거쳐 중국본토를 여행하는 사이에 샤스땅 신부는 갖은 고생을 다하였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많은 중국인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는 보람을 맛볼수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조선에 입국하여 있던 모방 신부로부터 입국의 안내를 적은 편지가 도착하였다. 1836년 말 조선교우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이광렬(李光烈)등의 안내를 받아 변문을 통과한후 그는 기쁨에 넘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천주의 영광을 위하고 사람들의 구원과 특히 나의 구원을 위하여 일을 할것이므로 어떤 일이라도 각오하고 있읍니다. 나는 기회가 오면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통을 감수할 힘을 주께 기대합니다』

상복차림을 하고 15일 동안을 걸어서 서울에 도착한 샤스땅 신부는 그를 기다리던 모방 신부를 만날수 있었다. 그들은 감사의 정이 충만하여 천주를 숭배하고、자신들의 봉헌과 희생의 각오를 새롭게 하였다. 샤스땅 신부가 조선에 들어오던 그날、가엾은 과부 김선사 아가타가 심한 고문으로 말미암아 천국으로 올라갔다. 이소식을 들은 그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이제 순교지 바로 그곳에서 당하는 순교의 사실은 옛날 생각했던 그것과 아주 다륻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샤스땅 신부는 서울에 머무르면서 조선어의 초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2개월 가량 자세한 성찰규식(省察規式)을 외운 다음、조선말로 백명 가량의 신자들에게 첫고백을 받을수 있었다. 그후 신부는 여러지방을 다니면서 성무집행을 계속하였다. 신자들은 집단으로 몰려 들었으며、수십년 동안이나 묵은 고해를 받기 위하여 일일이 그방법을 가르쳐 주어야만 하였다. 한편 외교일들에게 들켜 밀고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진 예비신자들에게 신앙의 진리를 심어준다는 일도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던중 지나친 활동으로 쇠약해진 모방 신부가 중병에 걸렸으며 샤스땅 신부는 빈사상태에 빠진 그를 위하여 종부성사까지 행하였다 그러나 그순간부터 모방 신부는 점점 차도를 보여 마침내 회복하게되었다. 다시 그들은 교회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가는곳마다 회장들을 임명하고 신자들의 일상생활에 관한 규칙을 정해주는등 신자집단의 조직을 새로 만들거나 보충하였다. 여러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열심히 노력한결과 1837년 한해에 영세자 1천2백37명、고해자 2천78명、영성체한 사람이 1천9백50명이란 숫자를 기록하였다.

시일이 지나면서 선교사들의 열성은 점점 더 높아져 갔다. 그러나 이미 외교인들은 그들의 입국을 알고 있었으며、그 자신들도 이로 인하여 불안을 느끼고있었다. 한편 그들은 사제직의 영속을 보장받을 수 있을 만한 주교 한분이 도착하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1837년말 드디어 앵베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게 되었고 이후 1839년 이전까지 세 선교사가 노력한 결과 보다 많은 선교사업을 이룩할 수 있었다.

기해년에 이르러 천주교인들에대한 박해는 다시 시작되었다. 샤스땅 신부는 되도록이면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면서 맡은바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던중 주교가 체포되고、샤스땅 신부는 은신처에서 주교의 권고로 그는 모방 신부와 함께 관청에 자수하였다. 옥 중에서 만난 세 선교사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9월 21일 새남터에서 참수당하니、이때 샤스땅 신부의 나이는 35세였다.

[가톨릭신문, 1984년 5월 6일,
김옥희 수녀(한국순교복자희ㆍ오륜대순교자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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