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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조신철 가롤로

2017.12.23 09:07

기도방지기 조회 수:166

나는 목숨을 버리고 고통을 감수하면서 예수의 십자가를 따르겠다

 

나는 천국으로 먼저 가서 기다릴 터이니

모두 용기를 내서 따라오도록 하라고 나의 가족들에게 전하여 주시오

 

 

 

 

성령님 얼굴도 이름도 아니 가지신분 !

저희를 가르치시어 올바로 기도하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주님 저희를 불상히 여기소서 !

주님 저희가  성 조신철 가롤로를 본받게하소서 !

성 조신철 가롤로 저희를 위하여 빌러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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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상, 유진길 등과 함께 北京을 왕래하면서 목자 없는 조선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노력하였던 사람이 9월 26일에 순교하였으니, 그가 곧 조신철 까롤로였다. 우리는 그에 관한 기록을 살펴봄으로써 당시 그의 동료들이 행한 열성적인 행적과 함께 개인의 신앙심을 다시한번 되새겨 볼 수 있을 것이다.

조 까롤로는 강원도 회양(淮陽)에 살던 외교인 집안에서 1795년 (정조19년)에 태어났다. 다섯살 때에 모친을 여의고 얼마 안 되는 재산마저 부친이 탕진하여 버리자 어린 그는 할 수 없이 절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몇 해를 생활하였다. 그 후 절에서 내려와 이 집 저 집으로 머슴을 살면서 생계를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北京을 왕래하는 사신의 하인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23세였다. 정직하고 용감하여 동료들로부터 호감을 산 그는『사신의 종복(從僕)중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평판도 듣게 되었다.

北京을 왕래하면서 그는 돈을 절약하여 부친과 형제들을 도와주었다. 이때 사신을 따라다니던 유진길과 정하상은 그의 성실함을 보고 장차 조선교회의 큰 일꾼으로 삼고자 하는 마음에서 입교시키기로 하였다. 비록 처음에는 쉽게 풀어주는 교리조차도 알아듣지 못하였으나 거듭하는 과정에서 그는 성교의 도리를 깨닫게 되고 천주를 진심으로 믿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北京으로 가서 성세와 견진과 성체를 받는 즐거움도 맛볼 수 있었다.

귀국 후 까톨로는 뛰어난 열심으로 천주를 봉행하였고, 겸손하고 인내하며 애긍시사(哀矜施捨) 로써 사람들을 천주교에 입교시키는데 힘썼다. 또한 완강히 입교를 거부하던 아내를 회두시켜 훌륭한 교우로서 선종하도록 하였다. 불행하게도 아내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그는 열심한 교우와 재혼을 하였는데 그녀가 바로 1840년 2월 1일에 순교한 최영이(崔瑩伊)바르바라이다.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온 뒤 그는 이들의 뒷바라지를 하는데도 열심이었다. 특히 모방 신부와 함께 지방을 돌면서 그의 선교 사업을 도와주었고, 조선말에 숙달치 못한 그를 위하여 통역노릇도 하였다.

이 당시 까톨로는 항상 『나는 목숨을 버리고 고통을 감수하면서 예수의 십자가를 따르겠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순교의 열망이 얼마나 가득 차 있었던지 1839년 초 북경에서 귀국하던 어느 날 꿈에 나타난 예수께서『금년에는 순교하는 은혜를 너에게 내려주마』고 두번이나 말씀하였다 한다.

서울에 도착하여보니 박해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까롤로는 이제 그 순교의 열망이 현실로 나타날 것이라 예견하고 아내와도 함께 치명할 것을 약속하였다. 포졸들이 그의 집에 들이닥쳤을 때 그는 출타 중이었는데 얼마 안 있어 그가 집에 돌아와 보니 이미 가족들은 체포된 후였다.

그는 그 길로 포청으로 가서 스스로 그들의 가장이라고 말한 다음 곧 체포되어 포장 앞으로 끌려 나갔다.

북경에 왕래하는 동안 그는 서적ㆍ목주ㆍ성패 등 교회의 물건들을 많이 가져 왔었는데 포졸들이 이를 압수하여 포청으로 옮겨 놓았다. 포장이 물건들의 출처를 알기 위하여 가혹한 고문을 하였지만 그는 혹형을 받는 중에도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

오래지 않아 앵베르 주교가 검거되었을 때 그는 대질신문(對質訊問)을 받고 당시 그와 함께 일하던 조선교회의 지도자들과 서양인 신부들의 거처를 말하도록 강요를 받았다. 주리를 틀리고 줄 톱질을 당하고 삼릉장(三稜杖)으로 맞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혹형을 무려 네차례나 당하였으나 그는 오직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관헌들은 이에 어이가 없었던지『저 사람의 몸은 살이 아니고 목석인가 보오』라고 감탄하기도 하였다.

곧 이어 모방신부와 샤스땅 신부가 자수하였고 까롤로는 그들과 함께 의금부로 이송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연사흘동안 문초를 당하고 곤장을 수없이 맞았으며 이에 사형 선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자신이 사형진행일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 까롤로는 한 옥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천국으로 먼저 가서 기다릴 터이니 모두 용기를 내서 따라오도록 하라고 나의 가족들에게 전하여 주시오』이 옥졸은 몹시 서글픈 표정으로 그의 말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형장으로 가는 수레를 타고서도 까롤로는 얼굴에 아주 기쁜 빛을 띠고 큰 소리로 기도를 하였다. 수레위의 십자가로부터 내려질 때도 그는 외교인 친척들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는 미소를 지어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잠잠히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가톨릭신문, 1984년 6월 24일,
김옥희 수녀(한국순교복자회ㆍ오륜대순교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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