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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김유리대 율리에따

2017.11.25 13:34

기도방지기 조회 수:438

 

17세에 이르러 부모들이 그녀를 출가시키고자 하였으나

율리에따는 동정지키기를 원하고 있던 터라 이를 사양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결심이 견고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머리카락을 전부 뽑아버리고 말았다.

 

 

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읍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을 밀고하면 그 사람에게 사형을 내리실 것이요,

어떤 책이든지 갖다 바치면 태워버리실 테지요.

그러므로 입을 열고 싶지 않읍니다.

그저 천주를 위해 죽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성령님 타오르는 사랑의 불가마여 !

저희를 가르치시어 지혜와 인내로서 살게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주님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

주님 저희가 성녀 김 율리에따를 본받게 하소서 !

성녀 김 율리에따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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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년 9월 26일에 순교한 교우들 중에는 궁녀였던 사람이 두명 있었는데, 그 중 한사람이 김유리대였다. 「유리대」는 그녀의 본명「율리에따」를 한자식으로 붙인 이름이며, 아명(兒名)은 나타나 있지 않다.

율리에따는 페레올(Ferreol)주교로부터「굵직한 교우」라는 별명을 들은 부모에게서 1784년(정조8년)에 태어났다. 본래 그녀의 집은 시골이었는데 율리에따가 성장하자 서울로 이사하여 생활하였다. 17세에 이르러 부모들이 그녀를 출가시키고자 하였으나 율리에따는 동정지키기를 원하고 있던 터라 이를 사양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결심이 견고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머리카락을 전부 뽑아버리고 말았다. 머리카락이 없어 맨머리가 드러나 보이게 되었으므로 부모들은 할 수 없이 혼인을 연기한 다음『지금 당장은 혼인할 수 없으니 머리가 다시 자라나면 그때 다시 의논하여 보자』고 말하였다.

이제까지 우리는 동정을 지켜 순교한 여러 교우들을 이야기한바 있으며 또한 동정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희생과 노력을 주님께 바친 사실들을 알고 있다. 특히 이영희 막달레나가 동정을 지키기 위하여 식구들을 속이고 범에 물려간 것처럼 꾸몄었다는 사실과 원귀임 마리아가 머리를 얹어서 시집간 여자행세를 하였다는 기록은 그들이 행한 진실한 신앙실천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비록 율리에따가 끝까지 동정을 지켰다는 기록은 없으나 결혼을 거절하려고 머리를 뽑은 사실 또한 당시 여성들의 신앙을 나타내주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이러던 중 1801년에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이를 피하여 김씨집안은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때 율리에따는 집을 몰래 빠져나와 왕궁의 나인으로 뽑혀 들어갔다. 그러나 당시 궁중의 분위기는 신자로서의 생활에 여러 가지 제약이 많았다. 평상시의 생활에서도 그러하였지만 여러 행사의 예절 등은 천주교에서 금하는 행동을 율리에따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궁중에 있는 10년 동안 그녀는 천주교 계명을 지킬 수가 없었고 마침내는 병을 핑계로 삼아 궁에서 빠져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신자의 집에서 더불어 살면서 부지런히 길쌈을 하여 약간의 돈을 모은 다음 조그마한 집 한채를 사서 혼자 생활하였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원하던 신자의 생활을 추구함에 어긋나지 않는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격이 강직하고 의지가 굳었던 그녀의 언행은 엄격하여 다른 교우들로 하여금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리고 다른 교우들과의 접촉이 거의 없이 기도와 묵상에 전심할 뿐이었지만 그녀가 여러 가지 신심행위를 충실히 행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율리에따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나쁜 짓을 하지 않을 여인이다』라고 칭찬하였다.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율리에따는 자신의 집에서 하느님의 섭리(攝理)를 기다리고 있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포청에 이송된 후 그녀는 여느 용감한 순교자들과 마찬가지로 행동하였으며 철저한 신앙심을 나타내었다. 포장은 엄포와 함께,『배교하고 동교인(同敎人)을 대라. 그리고 너의 천주교 서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모진 형벌을 당하리라』고 위협을 하였다. 이에 그녀는『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읍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을 밀고하면 그 사람에게 사형을 내리실 것이요, 어떤 책이든지 갖다 바치면 태워버리실 테지요. 그러므로 입을 열고 싶지 않읍니다. 그저 천주를 위해 죽기만 하면 그만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리하여 그녀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매를 맞았으나 신앙에 힘입은 순교의 열망으로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용기를 나타낼 뿐이었다.

포청에서는 그녀의 마음이 남달리 굳음을 알고 형조로 이송하였다. 형조에서도 그녀는 여러 가지로 심한 고초와 시련을 받았다. 형조의 관원은 처음에 감언이설로 그녀를 설득하려고 하였으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아니하자 이번에는 형벌을 가함으로써 얼마간이라도 마음을 움직여 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관헌들이 세 차례나 몹시 매질을 하였는데도 율리에따는 조금도 신음하지 않고 참아내었다.

이렇게 2개월 동안을 포청과 형조의 옥에서 고통을 참고 지내던 그녀는 형조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그 죄목은 사학(邪學)서적을 읽고 전파하였으며 사도(邪道)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율리에따는 마침내 서소문밖에서 순교의 영광을 받았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56세였다.

[가톨릭신문, 1984년 6월 10일, 김
옥희 수녀(한국순교복자회ㆍ오륜대순교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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