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 타이틀1

슬라이드 타이틀2

슬라이드 타이틀3

성 앵베르 범 라오렌시오

2017.08.28 10:23

기도방지기 조회 수:349

 

 

천주는 찬미를 받으실지어다. 찬미를 받으실지어다.
내 피로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제 내 자녀들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을 보는 것에서 느끼는 행복은 그들 있는 데로 오기 위하여 당해야 했던 고생을 잊게 합니다.
참말로 천주의 의도는 사람의 의도와 같지 않고 그분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릅니다.
- 앵베르 주교의 서한 중에서(1838. 11. 24일자)
 
 
 
성령님 성자의 성심안에 사시는분 !
저희를 가르치시어  당신을 알게 하시고
올바르게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저희가 성 라루렌시오를 본받게 하소서 !
성 범 라우렌시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9.32.jpg

 
앵베르 주교 이야기
 
나, 로랑 조제프 마리위스 앵베르(Imbert, Laurent-Joseph-Marius, 1796-1839)는 1796년 3월 23일 프랑스 남부 액스(Aix) 교구의 마리냔(Marignane) 본당 관할 브리카르(Bricart)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태어난 지 몇 달 후에 카브리에(Cabrie)의 라보리(Labori)로 이사하였고,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요. 집이 가난하여 학교에 갈 수 없었기에 이웃 할머니의 도움으로 읽고 쓰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다가 1807년경 그리스도교 은수회에서 운영하는 성 요아킴 기숙 학교에 들어갔고, 1812년에는 액스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어려 신학 공부를 마치고 나서 차부제품을 받지 못하였지요. 2년 동안 가정 교사로 시간을 보내다가, 1818년 10월 8일 에그벨(Aiguebelle) 트라피스트 수도원 원장의 배려로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연령 제한에 대한 특별 관면을 받은 뒤, 그해 12월 18일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사제 서품 후 중국의 사천(四川) 선교사로 임명된 나는 12년 동안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습니다. 나는 사천에서 조선 대목구의 설정 소식을 듣고, 1831년 파리 본부에 조선 선교를 자원하였습니다. 나의 지원은 즉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종하자 포교성성에서는 1836년 4월 26일에 나를 브뤼기에르 주교의 부주교로 임명하였고, 브뤼기에르 주교의 사망이 확인되자 나는 제2대 조선 대목구장이 되었지요.
 
1837년 12월 16일, 혹독한 추위와 긴장감에 떨던 나는 봉황성 변문에서 정하상, 조신철 등 조선 교회의 신자들을 만났습니다. 이들과 함께 길을 재촉하여 12월 31일 조선의 서울에 도착했지요. 조선 천주교회가 설립된 지 53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나는 서울 후동(后洞)의 정하상 집에 머무르며 한국어를 배웠는데 나름 열심한 덕분인지 3개월 후에는 한국말로 고해성사를 줄 수 있게 되었고, 5월부터는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우선적으로 신자들의 신심을 함양하고 방인 사제를 양성하는 등 조선 교회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내 노력의 전부를 다하였습니다. 먼저 한국어로 된 기도서가 없는 것을 알고 한국어 기도서의 편찬을 계획하였고, 마침내 “텬주 셩교 공과”와 “텬주 성교 십이단”을 완성하였지요. 또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와 함께 매괴회, 그리고 성의회 등 신심 단체를 설립하여 운영하였습니다. 또한 주을 위험에 처해 있는 외교인 아들에게 세례(洗禮)를 주는 일 등 일종의 성영회 활동에 신자들이 열심히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지요.
 
박해의 조짐이 보이던 1838년 말부터 나는 <1839년 조선 서울에서 일어난 박해에 관한 보고>라는 박해 일기를 작성하여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 일기는 내가 체포된 뒤, 정하상, 현경련, 이문우를 거쳐, 최영수, 현석문, 이재의 등에 의해 “기해일기”로 완성되었지요. 사실 박해의 그림자는 1838년 말부터 서서히 나타나더니 다음 해인 1839년 초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6월 3일 손경서와 정화경이 마련한 수원 근교의 상귀로 피신하였습니다.
 
박해가 진행되는 동안 신자들은 무수히 잡혀들어갔고 나를 포함한 3명의 서양인 신부가 나라 안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지요. 나는 곧 샤스탕 신부에게 “모든 것이 끝장났고 잔치를 끝내는 데에 빠진 사람이라고는 우리뿐입니다. 적어도 우리들 중의 한 사람은 자수해서 몸으로 값을 치르고 나머지 두 사람은 나라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니 빨리 내게로 오시오” 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나는 샤스탕과 모방, 두 신부를 어떻게 해서든지 나라 밖으로 내보내고 나 혼자 박해의 칼날을 받을 생각이었지요. 그러나 천주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체포된 우리 셋은 서울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839년 9월 21일 나는 두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하여 천상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 가톨릭 성가 284번 악보(1932년 판)
 
뮈텔 주교가 감준한 “조선어성가”에 실려 있다. 구노가 한때 꿈꾸었던 선교와 순교의 꿈을 이룬 이들을 기리는 송가. 구노는 로마대상을 수상하고 로마로 공부하러 갔을 때인 1939년에 앵베르 주교, 모방 · 샤스탕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고 이 곡을 작곡하여 천상의 월계관을 얻었음을 축하했다고 한다.
 
 

 

103위 성인 약전 앵베르 주교

 

앵베르 주교의 본명은 라우렌시오이며 한국성명은 범세형(范世亨)이다. 1796년 프랑스 까브리에(Cabries)지방의 조그마한 촌락에서 태어난 그는 비록 가난하였지만 총명할뿐 더러 기도나 공부에도 열심이었다. 어려서부터 스스로 묵주 만드는 법을 배워 공부를 하는 한편 나이 많은 부친의 생활에도 보탬을 주었다.

그가 마음속에 동방의 포교지방에 대한 생각을 갖고 신앙을 전파하러 갈 결심을 굳게 다지기 시작한 것은 이미 액스(Aix) 대신학교를 다니면서부터였다. 그리하여 그는 빠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한 후 1819년 12월 18일 신품을 받고 곧 중국의 사천성(四川省) 포교지에 임명되어 프랑스를 출발하였다.

앵베르 신부는 12년이상을 사천에 머물렀다. 거기에서 그는 포교를 행하고 중국의 언어와 풍습을 익혔으며 모든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고 또한 조선이라는 포교지에 파견될 것을 열렬히 희망하고 있었다.

열정적인 노력으로 그는 1836년에 조선의 제1대 교구장 브뤼기애르(Bruguire 蘇) 주교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주교가 사망하자 곧 주교품을 받고 조선의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해에 조선입국이라는 열망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12월 17일 중국대륙을 건너 몽고의 서만자(西灣子)에 머물고 있던 그는 마침 조선사신의 수행원 중에 동행한 교우 조신철(趙信喆) 정하상(丁夏祥) 등의 협력을 얻어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이렇게 하여 조선의 교우들은 처음으로 주교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실로 조선교회가 창설된지 53년 만의 일이었다.

3개월 동안 조선말을 배운 후 앵베르 주교는 듣고서 성사를 줄 수가 있었다. 이미 조선에 와 있던 모방(Maubant) 신부와 샤스땅(Chastan) 신부와 함께 그는 지방을 순회하기도 하고,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외교인 어린이에게 영세를 주는 운동도 전개하였다.

이제 조선교회는 오랜 재난을 겪은후 새로 재생하는 셈이었다. 천주의 은혜는 점점 더 풍성하여지고 신자의 수는 급격히 불어났다. 착한 신자들은 위로를 받고 약한자들은 신앙이 굳어지며 죄인들이 회개하고 변질자들은 다시 주의 품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희망하는 결과를 얻기 위하여는 그만큼 노력이 뒤따라야하였다. 앵베르 주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스러운 의무를 다하였다. 그가 프랑스에 보낸 서간에서처럼 그는 항상 허약하고 병든 몸으로 매우 바쁜 생활을 하였지만 한편으로 그것을 최대의 행복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에게 있어 고생과 곤궁보다도 무한히 괴로운 것은 박해로 말미암아 신입교우들의 신앙이 끊임없이 위험을 당한다는 사실이었다.

외교지방에 전교의 뿌리를 더욱 깊이 내리기 위하여 보다 많은 피를 흘려야 된다는 주교의 생각대로 박해는 기해년에 이르러 다시 시작되었다.

곳곳에서 교우들은 체포되었으며 그들이 흘리는 거룩한 순교의 피는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앵베르 주교는 박해가 퍼지기전에 보다 많은 교우에게 성사를 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여 교우들이 모여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러는 동안 사태는 점점 위태롭게 되어갔고, 배교자들의 자백으로 3명의 선교사들이 조선에 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배반자 김여상은 관헌들과 짜고 간계로써 주교를 유인하려고 하였으며 주교는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스스로 자수의 길을 택하였다. 다른 두 신부들도 주교의 권교를 받아들여 즉시 관청에 자수하였다.

포청의 옥중에서 세 선교사는 서로 만날수 있었다. 이미 주교는 여러 번의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며 두 신부들과 함께 옥중의 고초를 이겨냈다.

조선정부는 그들이 절대로 배교치 않을 것이라 믿고 마침내는 대역죄인(大逆罪人)이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軍門梟首)에 처하도록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 그들의 사형지는 서소문 밖이 아닌 한강변의 새남터로 결정되었다.

사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자 그들은 군인들에 의해 손을 결박당한 채 가마를 타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장에 이르자 군사들은 그들의 겨드랑이에 긴 몽둥이를 꿰고 화살로 귀를 뚫고 얼굴에 회를 뿌린 다음 군중의 조롱과 욕설을 듣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도 태연하게 천상의 기도만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군사들이 칼날이 그들에게 순교의 영광을 가져다 주니, 때는 1839년 9월 21일로 주교의 나이는 43세였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성직자들을 불과 3년만에 잃게 되었던 것이다.

[가톨릭신문, 1984년 4월 15일,
김옥희 수녀(한국순교복자희ㆍ오륜대순교자기념관장)]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