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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김업이 막달레나

2016.12.18 13:46

기도방지기 조회 수:405

    

어머니에 대한 김업이 막달레나의 효심이 너무나 지극해

  순명하는 그의 표양은 사람마다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성령님 얼굴도 이름도 아니 가지신분  !

  저희를 가르치시어 올바로 기도하게 하소서 !

 

  주님 저희가 성녀 김 막달레의 믿음을 본받게하소서 !

  성녀 김업이 막달레나시여 믿음약한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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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년에 박해가 시작되자 최초의 처형은 이 해 5월 24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집행되었는데 이때 위주치명(爲主致命)한 교우는 모두 아홉 분으로 남자 3명, 여자 6명이었다. 그 중 한 분이 김업이 막달레나이다. 그는 이미 기해박해 4년 전에 잡혀 그동안 옥에서 고초를 받았다는 점에서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할 분이다.

성녀 김업이 막달레나는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여윈 후 성질이 괴팍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비록 좋은 교육을 받지는 못했어도 어려서부터 열심히 믿었고 덕을 쌓으며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했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교우에게 출가하게 되었다.

중년에 이르러 남편과 자녀들을 모두 여의게 되자 친정으로 돌아와 늙은 어머니와 함께 서대문 밖 애고개(지금의 아현동)로 이사해 살면서 망건을 만드는 일로 간신히 생계를 이어 나갔다. 어머니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고통을 받았으나 항상 양순하고 인내하는 마음으로 어머니를 도왔다. 당신을 섬기는 자들로 하여금 단련받길 원하시는 천주께서는 그 성질이 괴팍한 어머니가 오래 살도록 허락함으로써 김업이 막달레나가 많은 시련과 인내의 덕을 쌓을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어머니에 대한 김업이 막달레나의 효심이 너무나 지극해 순명하는 그의 표양은 사람마다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교리에도 밝아 여러 외인을 가르쳐 입교시켰다. 외인 자녀들을 위해 유아대세를 주는 선행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선행 중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피 흘리기를 항상 갈망했다.

이 거룩한 원의가 실현되고 자기 선행의 상을 받을 때가 오려고 1836년 10월에 체포되어 포청으로 끌려갔다. 그리곤 가혹한 심문을 받았다. 그는 동료 교우 ‘한아기 바르바라’가 곤장을 맞는 동안 판관까지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천주십계 도리를 설명했고 복음의 진리를 설교했다.

여러 번 중한 형벌을 받았지만 용감히 감당해 내며 신앙 앞에서는 한 치의 굽힘도 없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김업이 막달레나는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모두 참아내고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형 집행이 유예되어 3년을 옥살이 한 끝에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들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자신의 소원대로 참수형을 선고받고 순교했다. 그 때 그녀의 나이 66세였다.

※ 종래의 문헌기록에는 김업이와 김아기가 뒤바뀌어 기록되었으나 프랑스어 번역에 관변측(官邊側) 기록을 인용한 데서 오기(誤記)된 것 같다.

기해일기 23쪽에 ‘복이매’씨라고 기록된 것은 남자에겐 복동(福童) ․ 업동(業童), 여자에겐 업이(業伊) ․ 복이(福伊)라 한데서 근거되어 김 막달레나가 김업이(業伊) 임이 틀림없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中> p. 415 참조.


[소공동체 모임 길잡이 작은공동체, 2006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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