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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이호영 베드로

2016.11.14 11:08

기도방지기 조회 수:467

 

-만 번을 죽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

 

 

성령님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신분 저를 가르치시어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안에 살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한국의 103위 성인이시여 저희위해 빌으소서 !

성 이호영 베드로 저희위해 빌어주소서 !

주님  이글을 읽는 저희에게 선종하는 은총을 내리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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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영 베드로(1803-1838년) 성인은 우리 나라의 두 번째 전국적인 박해인 기해박해(1839년) 때 순교한 성인, 성녀보다 한발 앞서 순교한 분이다. 한국 순교 성인 명단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정하상 바오로 다음으로 그 이름이 올려진 이호영 베드로는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신자가 된 그는 부친이 대세를 받고 선종한 뒤에 누나 아가다와 함께 서울로 이사하여 한강 북쪽에 있는 무쇠막이라는 동네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의 누나 아가다는 17세에 결혼했으나 3년만에 남편을 여의고 친정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동생 이호영과 함께 옥중의 고통을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하여 남매가 순교 성인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이호영 베드로가 무쇠막에서 살 때 그의 성실한 신앙생활이 당시 주문모 신부 다음으로 입국해 사목하던 유방제 신부의 눈에 들었다. 유 신부는 그의 순직함을 보고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부탁했는데, 나이가 어리면서도 모든 일을 잘 감당했다. 그는 서른 살이 되어서야 외교인 처녀를 입교시켜 결혼했다. 유 신부는 그의 성실함을 보고 회장으로 임명하였으며 그는 직무를 잘 처리해 내었다.

그러다가 유호영은 참으로 기이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친구의 권유로 과거장에 갔는데 그곳에는 황홀한 음악이 들려왔다. "자네가 급제를 했네." 친구가 한 말에 깜짝 놀라 "아니 어째서 그렇단 말인가?" 하고 묻자 "임금님의 신임을 받은 신하가 자네를 아는 까닭일세" 하고 친구가 대답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나 곰곰히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내가 아마 치명하려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칼 아래 치명하여 순교하는 것을 그만큼 영광스럽고 기쁜 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꿈을 꾸고 몇 달이 지난 1835년 2월 어느 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니 한 무리의 포졸이 문 앞을 지키고 있다가 그를 체포했다. "어째서 나를 잡는거요?" 이호영이 물었다. "네 죄를 네가 모르겠는가? 천주교를 믿으니 잡아가는 것이다." 포졸들은 그의 누나인 아가다도 함께 포박하여 옥에 가두었고 참혹한 형벌과 심문이 이어지는 옥고가 시작되었다. 이호영은 문초를 당한 것에 대해 옥중에서 이렇게 편지를 썼다.

"동짓날 초엿샛날 재판 시간(오후 2시경)에 나와 누님은 법정으로 끌려갔습니다.

관장이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 양옆으로는 곤장을 든 형리들이 많이 서 있었습니다.

재판관이 내 이름을 묻고 나서 문초를 시작했습니다.

'사교(邪敎)는 부모의 은덕을 배반하는 것이요,

또 조정에서 엄금하고 있거늘 어찌하여 그것을 신봉하느냐?'

'결단코 사교가 아니옵니다.

천주교를 믿고 그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면 국왕을 공경하고

부모를 극진히 사랑하며 남을 자기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누가 이런 교를 가리켜 부모의 은덕을 배반하는 것이라 말하겠습니까?'

'너는 한문을 아느냐?'

'한문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 교를 배울 수 있었단 말이냐?'

'이 교를 배우기 위해서는 제가 읽을 줄 아는 언문으로 번역된 책이 있으니 한문을 몰라도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배우기가 무엇이 그리 어려웠겠습니까?'

'네 나이가 몇이냐? 너는 부모님께서 제사를 지내지 않지?

누가 보든지 조상께 제사를 지내지 아니하는 자는 개나 돼지만도 못한 자이며 죽어 마땅한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교를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죽음 취하고자 한단 말이냐!'

'그 제사라는 것은 헛되고 무익한 것이요,

진리를 따르기 위해서는 헛된 것과 무익한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일입니다.

잠드신 부모님께 음식을 차려드리고 잠드신 채 그것을 잡수시라고 한다면 그 아니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영혼은 신령한 것이기에 물질적인 음식을 먹고살지 않습니다.

또 천주의 계명은 훌륭한 것이요, 그것을 지키면 공이 되는 것입니다.

국왕을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는 사람을 역적이라고 몰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천지만물의 주제이시며 왕 중의 왕이시며 전 인류의 공번된 아버지이신 분,

비와 이슬을 마음대로 내리게 하시고, 가장 미약한 풀 한 포기에서 큰 나무까지도 모두 자라게 하시며

그분의 은혜를 입지 않은 자가 없는 천주를 배반하기보다는

차라리 자기 목숨을 바치겠다는 사람을 어떻게 역적으로 몰겠습니까?'

'음, 네 말이 옳기는 하다.

그러나 조정에서 금하는 것을 거역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고 있다.

그리고 어찌하여 조상께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헛되고 쓸데없단 말이냐?

천주의 그림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도 역시 헛되고 무익한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네 부모의 초상에는 왜 절을 하지 않느냐?'

'천주님은 전능하시고 무한히 착하시며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제가 천주를 흠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를 드립니다.

죽은 이들을 위해 드리는 특별한 기도문이 있습니다.'

'너 혼자 지껄이고 있으니 누가 네 말을 옳다고 하겠느냐? …

어찌하여 마음을 아니 돌리느냐?'

'거룩한 결심을 어찌 나쁜 결심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 때 그들이 내 책에 들어있는 작음 봇짐을 묶어서 재판관 앞에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나 다음에 누님도 문초를 당했는데, 나와 같은 진리를 증언했습니다. …

(여기서 그는 누님인 이 아가다 성인의 문초와 형벌 받는 대목을 적고 이렇게 끝맺음하고 있다.)

내가 지금 쓴 것은 많은 사람들이 보고들은 것입니다. 이야기를 더 길게 쓸 수가 없습니다.

내 영혼에 가득한 생각을 자세히 기록할 수는 없습니다.

내 다리는 온통 터져서 하나의 큰 상처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천주의 은혜로 아직도 괴로움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교우 여러분에 평화를 축원하며 소식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호영은 이 편지에서 자신이 받은 형벌에 대해서 자세히 적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문초 당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더 상세히 전해주었다.

형리들은 그의 주리를 틀어 정강이뼈가 활처럼 휘게 하는 등

사람으로서는 차마 견디지 못할 고통을 주었다. 그리고

 

"만일 네가 말로써 천주를 배반하기 싫거든 글자 하나를 써줄 터인데

거기에다가 점 하나만 찍든지 침을 뱉든지 하라.

그러면 그것으로 배교를 인정하고 너를 놓아주겠다"고 유혹했다.

 

"만 번을 죽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거절당하자 형리 네 명이 굵은 곤장으로 한꺼번에 이호영의 온몸을 마구 내리쳤다.

그러면서 재판관은 이렇게 말했다.

 

"조금이라도 신음소리를 낸다면 배교하는 것으로 인정하겠다."

이호영은 살점이 헤어져 뼈가 드러나고 팔이 부러지도록 매질을 당했다.

그러나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재판관은 판결문을 내주며 "여기에 내 도장을 찍어라"고 했다. 이호영은 판결문을 보고 천주교를 사교로 단정한 구절에 반발하여 말했다. "우리 교는 거룩하고 그 가르치는 도리는 참된 그것이 그르다고 증언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거절했다. 재판관은 억지로 그의 손을 끌어다 도장을 찍게 하였다. 이호영은 사형이 집행되기 전 옥중에서 상처가 심하고 병이 깊어 기력이 쇠약해졌다. 1838년 11월 25일 그는

 

"나는 칼 아래 치명하는 것이 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주의 명이 아니면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고 하느님 성의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숨을 거두었다.

[경향잡지, 1999년 9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이소사 성인의 초상화.

 
   한국교회 103위 성인 중에는 가족 순교자가 여럿 있다.
   경기도 이천 출신 이소사(아가타, 1784~1839)·이호영(베드로, 1803~1838)
   남매는 4년간의 혹독한 옥고를 서로 격려하고 이겨내며
   마침내는 하느님 품에 안긴 성인이다.
 
이소사 성인은 17살 때 결혼했으나 남편을 여의고 친정으로 돌아와 어머니, 동생과 함께 입교했다. 아버지가 대세를 받고 사망하자 동생과 과 함께 서울로 이사왔다. 서울로 온 남매는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그로 인해 이호영 성인은 유방제(劉方濟) 신부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하지만 박해의 칼날은 남매의 지고지순한 하느님 사랑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남매는 1835년 2월 한강변 ‘무쇠막’에서 체포됐고 이후 포청과 형조에서 차마 견디기 어려운 형벌과 고문을 받아야 했다.

                                 

 

  

- 이호영 성인의 초상화.
 
사형집행이 연기된 후에도 형벌은 계속됐지만 성인 남매는 비명 한 마디 지르지 않고 형벌을 참아내며 함께 한 날 한 시에 순교하자고 위로하고 격려했다

 

 

 

 

 

경기도 이천 단내성가정성지


단내성지는 한국에 존재하는 가장 역사가 오래된 교우촌이며 김대건 신부의 사목활동이기도 하다.
아울러 한국 103위 순교성인 가운데 이천에서 태어났거나 체포돼 순교한 5명의 성인을 기념하는 성지이다.

성지가 가정성화를 위해 순례하는 성가정성지로 명명된 것은 성지에서 기념하는 5명 성인 중 이문우 성인을 제외하면 모두 가족 순교자이기 때문이다. 정은(바오로)와 정베드로 순교자는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 김대건 신부는 부자가 함께 순교 성인이며, 이호영과 이소사는 남매, 조증이와 남이관 성인은 부부다.

가족 간 대화가 끊기고 가정이 해체되는 위기에 처한 오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본받으려 노력했던 성인들의 자취를 좇아 가족과 함께 손잡고 단내성지를 찾는 것도 좋을 듯. 성지에는 순교자 정은(바오로) 묘소와 이천 출신 5위 성인순교비, 성당과 영성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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