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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이소사 아가다

2016.12.11 12:01

기도방지기 조회 수:334

 

 

   그의 입에서는 오직『배주(背主)하지 못하겠습니다』라는 한마디의 대답 뿐이었다. 

   

   성령님 충만한 신비의의 비둘기여 !

   저희를 가르치시어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

   주님 저희도 성녀의 믿음을 본받게 하소서 !

   이소서 아가다 성녀시여 불쌍한 저희위해 빌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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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이 아가타는 성인 이호영 베드로의 누님이다. 남매는 원래 경기도 이천 땅 ‘구월’에서 태어나 부모 밑에서 자라다가 부친이 돌아가신 다음 서울로 이사했다. 어머니의 종교적 무관심 때문에 결국 아가타는 17세에 외인에게 출가했다.

그러나 아이를 낳지 못한 채 3년 만에 남편을 여의고 말았다. 남편 잃은 아가타는 친정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살았다. 부친이 남긴 조그마한 가산마저 탕진하게 되니, 늙은 어머니와 어린 동생을 데리고 살아가자니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현석문이 쓴 <기해일기>에도 ‘그 때 겪은바 당시의 고통을 어찌 말하리오.’ 이렇게 실로 당시의 고생이 이루 형언키 어려웠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아가타는 이처럼 평생을 가난과 함께 했을지라도 언제나 안색이 화평하고 조금도 걱정하는 빛이 없었다. 뿐더러 이 아가타의 사람됨이 겸손하고 정중했으므로 모두가 그의 아름다운 행실을 기리고 사랑했고 사모했다.

이 아가타는 삯바느질로 집안 살림을 겨우 연명해 나갔다. 그러나 남매는 이같이 가혹한 가난을 참아 받으며 열심히 수계(受戒)했다. 그래서 그 때 교우들이 이 남매의 덕행과 착한 표양을 늘 이야기하고 칭찬했다 한다.

이 아가타의 집이 포졸들에게 기슴을 당한 것은 을미년(1835년) 음력 정월, 그때 그의 집은 한강변 ‘무쇠막’이라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때 남매는 포졸의 기습이 있으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고, 따라서 잡히는 순간에도 피신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이때 그의 동생 이호영 베드로는 외출에서 돌아오다가 문간에서 대기중인 포졸에게 잡히고 이어서 아가타도 잡혔다.

이 광경을 본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까무러쳤다. 이 베드로는 자기 아내도 잡아가려는 포졸들을 향해 간청했다. “이 사람은 죄가 없으니 내버려 두시오. 죄가 있는 것은 우리 뿐이니 내 아내만은 놓아주어 노모와 어린 것들을 돌보게 해주시오.”

그때 마침 이웃에 사는 포졸이 감겨하여 그의 아내는 놓아주고 그들 남매만 붙잡아 갔다.

첫 문초 때부터 이 아가타는 매를 몹시 맞고 주리를 틀렸다. 이 아가타가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결심을 꺾지 않았다. 여인으로는 차마 견디기 어려운 형벌과 고문을 참아냈고 형조로 이송되어 동생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사형 집행이 연기되어 옥살이를 더 해야 했다. 고통스런 옥중 생활에서도 동생과 함께 한날한시에 순교하자며 위로하고 격려, 인내와 극기로써 생활하였다.

옥에 있은 지 4년 동안 아가타의 착한 표양에 감동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옥졸까지도 과연 천주교 도리가 아름답다고 칭송했다. 4년이란 긴 세월의 옥중 생활 동안 겪은 고통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 형장을 향해 수레에 올랐을 때도 이 아가타의 안색은 여전히 평온했고 형장에 이르러 수레에서 내리자 성호를 긋고 나서 침착한 자세로 칼을 받고 위주치명(爲主致命)하니 성녀의 나이 56세였다.


[소공동체 모임 길잡이 작은공동체, 2006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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