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 타이틀1

슬라이드 타이틀2

슬라이드 타이틀3

성 정국보 포로타시오

2016.11.21 17:00

기도방지기 조회 수:301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마음에 없는 말을 입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뉘우칩니다.

저는 천주교인입니다. 언제까지든지 그러하고자 합니다.”

 

 

 

  성령님 성자의 성심안에 사시는분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을 알게 하시고

  올바르게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

  주님 저희도 배교하였지만  뉘우쳤던  순교자 성인을 본받게 하소서 !

  성 정 국보 포로타시오시여  언제나 믿음이 약한 저희 위해 빌어주소서 !

 

9.4.jpg

정군보(쁘로따시오)는 松都의 양반가문의 후예로 1799년(정조23년) 에 태어났다.

일찍이 그의 조부가 국가에 벼슬을 하다가 죄를 짓게 되어 몰락양반이 되었다.

그 후 정군보의 부친은 세상에서 자신들의 신분과 가문을 감추고 서민으로 행세하면서 서울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다. 서울에 오자 정군보는 繕工監(조선시대 土木이나 營繕을 맡아 보았던 관청) 에서 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그는 본래 영세 받기 전부터 성정(性情)이 순량하고 겸손하였다고 한다. 그가 30여세에 이르러 비로소 천주교의 교리를 듣게 되자 대단히 그 교리가 좋아서 성심으로 守誡한지 수년 만에「뿌로따시오」라는 본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그 후 그의 성실함을 목격한 유방제(파치삐고) 신부는 홍살문거리에 집 한 채를 사서 그로 하여금 집을 관리하게 하는 한편 시골교우들이 성사를 받으려 서울에 오면 이 집에서 그로 하여금 대접하도록 마련하였다.

이와 같은 일을 하면서 그는 모든 교우들에게 한결같이 친절하였고 교우들에 관한 일이라면 어떠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노고를 사양치 아니하고 헌신적으로 여러 교우들을 돌보는데 힘쓰면서 부부함께 열심히 수계하였다. 특히 그는 집이 가난하였고 육신에 신병이 잦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世苦를 신앙으로 극복하면서 어려워하는 빛을 한 번도 나타내지 않았던 것이었다.

더욱이나 자녀 14남매가 전부 차례로 죽어가서 남은 자식이 하나도 없게 되었으나 이런 큰 충격에도 놀라운 인내심으로 잘 견디어 내었다고 한다. 그는 항상 성서를 부지런히 읽으며 강론 듣기를 매우 즐겼고 피로와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남을 도와주었으며 그는 그의 博愛心으로 모든 교우들의 모범이 되었던 것이었다.

1839년(己亥年) 3월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정 쁘로따시오는 그의 아내와 함께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에 갇혔다. 포장이 온갖 혹형을 다 가했음에도 절대로 굴복하지 아니하였으나 刑曹로 옮겨져서 다시 혹심한 고문을 당한 후에 또한 관장의 여러 가지 감언이설과 유혹하는 말에 넘어가서 그만 背敎하였던 것이었다.

 

이에 그는 석방되어 집에 돌아왔으나

즉시 양심의 가책으로 자신의 배교의 죄를 심히 뉘우치고

날마다 침식을 잃고 참회의 기도를 올리며 주야로 통곡과 울음을 그치지 않았던 것이었다.

마침내 정쁘로따시오는 참회의 마음을 참지 못하였고

또한 이웃에 사는 열심한 교우의 격려로 용기를 얻어 다시 관청에 자수할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즉시 그는 刑曹로 가서 재판관을 만나기를 청했으나

이때 포졸들이 그 연고를 묻자

그는『내가 배교한 사실을 스스로 취소하고 천주교신자로서 속죄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이에 포졸들은 도리어 미친놈이라고 쫓아 보내면서 들여보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튿날 또다시 그는 형조로 가서 이제는 형조판서를 만나려 했으나 역시 포졸들은 전날과 같이 거절하였고 그의 강경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불문에 부쳐버렸던 것이다. 그는 그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시 세 번째 자수를 시도했는데 그때는 5월 12일(음력 3월 그믐날) 이었다. 그날에 그는 본래 자신의 신병에다 지난번 받은 혹형의 상처가 덧난 탓으로 인하여 걸음조차도 걸을 수가 없었으므로 들것에 들려 형조에 갔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하인들이 문을 닫고 들여 보내주지 않았으므로 그는 형조근처에서 판서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형조판서가 나오자 그는 길 한가운데서 그의 앞에 엎드려 자기의 내력을 말하고 배교한 죄인이기 때문에 죽여 달라고 청하였다. 이 말을 들은 형조판서는 미친 쓸데없는 말이라 하여 물리치려 하였으나 하도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애원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옥으로 끌고 가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가 옥으로 가던 날 옥중교우들의 축하를 받으며 다시 순교자들의 반열에 들게 되었던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바로 그와 같은 날 金孝任ㆍ孝珠 자매는 형조판서 앞에서 천주교의 교리를 설명하며 自身들의 신앙심을 굽히지 않았던 같은 날이었다.

정쁘로따시오는 비록 병들고 불편한 육신이었지만 옥중교우들의 축하로 거룩한 기쁨을 감출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새로이 포도청으로 끌려가서 杖刑 25대를 맞은 다음 다시 하옥되었으나 그때 그는 이미 장티푸스로 기력이 다한데다가 가혹한 혹형을 받았으므로 그가 옥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그는 거의 다 죽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날 밤중 1839년 5월 20일(음력 4월 9일 혹은 8월 밤 중) 에 41세의 나이로 옥중 순교를 하여 그의 파란 많던 삶을 끝마쳤다.

어쨌든 그는 기해박해령이 선포된 후 첫 번째의 순교자였고, 고문과 유혹으로 한번 불명예스런 배교로 교우들을 슬프게 했던 그만큼 그의 옥중순교는 성베드로의 회개처럼 하느님과 신자들을 기쁘게 해주었고 위로해 주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연약한 인간성을 참회로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박해시대에 빈번하게 있었던 신자들의 배교도 십자가의 신비와 하느님 자비로 구원의 희망은 물론 순교의 영광을 가질 수 있다는 박해시대 교우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그의 회개와 순교는 바로 한국 순교자들의 반열에 올림을 받았던 것이었다.

[가톨릭신문, 1983년 11월 6일,
김옥희 수녀(한국순교복자회ㆍ수원대교수)]

* 현재 성인의 이름은 정국보로 확인됨.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