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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박아기 안나

2016.12.04 14:20

기도방지기 조회 수:304

 

   며칠 더 살아보려고 영원한 죽음을 당할 위험을 무릅쓰란 말이오

 

 

   성령님 불혀의 표징이여 !

   제 마음속에 당신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성녀 박아기 안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이세상의 며칠더 삶보다 천국의 영원한 삶을 선택한 성녀시여 !

   믿음이 약한불쌍한 저희위해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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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촌(江村) 출신의 박 안나는 그의 외손녀 서 수산나의 증언에 의하면 서울의 한강변에 살면서

어머니와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그는 기억력이 둔해 요리문답과 경문을 배우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러나 교리를 명확하게 알지는 못했으나

 

“나는 천주를 내가 원하는 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마음껏 사랑하기로 힘쓰겠다.”

며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매일 기도했다.

18세 때 비교적 부유한 교우 태문행(太文行)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고 또 정성껏 그들을 교육시켰다.

박아기는 집이 가난한 편은 아니었지만 세상 사물을 탐내는 마음이 적었고, 오 주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있어 구세주의 오상(五傷)을 생각하고는 눈물 흘리곤 했다.

박해가 일어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눈은 빛나고 순교하기를 열렬히 원하는 빛이 얼굴에 나타났다.

기해박해 초인 1839년 3월 중순에 남편과 큰아들 응천(應天)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포청에서의 고문으로 남편과 큰아들은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나

 

박 안나만은 배교를 거부하고 혹형과 고문을 이겨냈다.

연일 계속되는 혹형으로 살이 터지고 뼈가 튀어 나왔으나

언제나 평온하였고 때때로 위문 오는 가족들에게도 권면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형조로 이송되어서도 배교하고 석방되어 가족들에게 돌아가라고 유혹하며 혹은 위협하고 고문하였으나

박 아기는 끝까지 신앙을 지켜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옥고 생활 3개월 만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치명 하니 그때 그녀의 나이 57세였다.

이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형벌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배교한 그의 남편과 아들들이 매일 찾아와 한 마디만 하면 풀려날테니

그리하라 조르며 집안의 참혹한 형편과 죽어가는 늙은 어머니의 고통,

그리고 어미를 찾는 어린 것들의 가련한 정경을 눈앞에 그려 보였다.

“아니 며칠 더 살아보려고 영원한 죽음을 당할 위험을 무릅쓰란 말이오?

나보고 배교하라 권하기보다는 끝까지 함구하라고 격려해야 하지 않겠어요?

당신들이야말로 어서 천주께 회두하시오. 그리고 내 행복을 부러워하시오.”

포장은 그녀에게 말했다.

“네 남편과 아들은 옥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갔다. 너도 한 마디만 하면 이런 은전을 입을 수 있어.

그런데 집안 식구들이 그렇게 조르는 데도 너는 도무지 마음을 굽히지 않으니 네 마음은 쇳덩이같이

인정도 도무지 없구나. 그래 삶이란 것이 그다지도 나쁜 것이란 말이냐?”

“제 남편과 아들이 배교한 것이 제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신앙을 보존하고 신앙을 위해 죽기로 작정했습니다.”

이처럼 그녀는 온갖 혹형에도 무릎을 꿇고 신공 바치기를 그치지 않았다.


[소공동체 모임 길잡이 작은공동체, 2006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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