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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정하상 바오로

2016.11.09 10:22

기도방지기 조회 수:476

 

  성령님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신분 저를 가르치시어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안에 살게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성 정하상 바오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주님 이글을 읽는 저희에게 선종하는 은총을 내리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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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재상서>를 작성한 정하상은 1780년대 후반에 이미 최초의 교리서를 썼으며, 그 자신 당시 유명했던 남인가문의 출신이요 당시의 대표적 실학자로 알려진 정약용의 형이었던 정약종의 둘째 아들이다. 그리고 기해박해가 일어나던 때 그는 교회의 핵심적 인물로 활약하였다.

 

기해박해 당시 심문과정에서 형관은 정하상에게, "네가 조선 풍속을 따르지 아니하고 외국의 도를 행하여 사람을 가르쳐 혼탁하게 함이 옳으냐?"고 물었다. 이에 대하여 정하상은 "외국의 좋은 물건은 취하여 쓰고 천주 성교는 외국의 도라고 (하여) 옳은 일을 배반하오리까?"고 반문하였던 것이다.

 

당시 교회내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정하상에 대한 심문 기록은 너무나 짧지만, 사실 정하상은 체포될 것을 예감하고 1839년 박해 직전에, 미리 "상재상서(재상-당시 우의정인 이지연-에게 올리는 글)"라는 글을 써서 남겨 두었다. 그러므로 <상재상서>는 박해에 대한 정하상의 답변이며, 그런 의미에서 위의 심문기록에 단편적으로 나타난 순교자들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은 제목 그대로 박해를 추진하는 정부의 고위 관료에게 천주교도들의 입장을 이해시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잡혀가 순교를 앞 둔 교우이거나, 뒤에 살아 남은 교우들에게 어려운 시절에 신앙을 지켜야 할 명백한 이유를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엎드려 아뢰옵건대 맹자가 양자와 묵자를 옳지 않은 학설이라 하여 배척한 것은 그 사상이 유교의 가르침을 함부로 해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고 한유가 석가와 노자를 배척한 것은 그 사상이 서민을 홀려 혼란케 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옛날에 학자들이 법률을 제정하여 금지하는 법칙을 마련할 때에는 반드시 그 대상의 의의와 이치가 어떠한지, 또 해로운 것이 무엇인지를 연구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마땅히 금해야 할 것은 금하였고, 금하지 않아도 될 것은 금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올바른 것이라면 그것이 비록 나무꾼의 말일지라도 성인들은 반드시 받아들였으니 이것은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그가 한 말을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종교를 금지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먼저 그 의의와 이치가 어떤지는 물어보지도 않고 너무나 어이없이 원통스런 말로 무조건 거룩한 교회를 옳지 못한 가르침이라고만 몰아 세우고는 사형법으로 처리하여 신유년(1801년)을 전후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으면서도 천주교의 기원과 전통을 조사해 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아! 이 가르침을 배운다고 해서 유교의 가르침에 해가 됩니까? 또는 서민들을 혼란에 빠뜨리겠습니까? 이 종교는 임금님으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매일같이 그 가르침을 실천해야 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결코 해가 된다거나 혼란을 일으키는 종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제 감히 그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천지의 위에는 어른(야훼 하느님)이 계신데 그 분은 스스로 존재하시고 주재(主宰)하시는 분으로서 이는 다음 세 가지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만물(천주만물)이고 둘째는 양지(良知:양심)이며 셋째는 성경입니다.

 

만물이 증거가 된다 함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천지만물은 집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집에는 기둥과 주춧돌이 있으며, 대들보와 서까래가 있고, 또한 집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고 담과 벽이 있어서 그 사이와 틈이 한치도 어긋남이 없고, 모남과 둥금에 있어 각각 일정한 규칙이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기둥과 주춧돌과 대들보와 서까래와 집으로 들어가는 문과 담과 벽이 우연히 맞추어져서 저절로 우뚝 세워졌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분명히 미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천지는 하나의 커다란 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날아다니는 것, 걸어 다니는 것, 동물, 식물 등 제각기 다양한 형상들이 어떻게 저절로 생겨났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천지가 저절로 생겨났다면 해와 달과 별이 어떻게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으며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어떻게 그 바뀌는 순서가 잘못되지 않습니까?

 

흉하고 망하고 번영하고 시들음을 지배하는 이가 누구이며,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며 음란한 자에게 벌을 주는 이는 누구이겠습니까? 하늘을 우러러보아도 아무런 소리도 안 나고 아무런 냄새도 없다 하여 사람들이 무덤을 향해 죽어 가는 것을 그저 자연의 이치라고만 모두들 생각한다면 이것은 유복자가 자기 아버지를 뵙지 못했다고 하여 자기 아버지가 있음을 믿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한 편의 훌륭한 작품이나 한 폭의 명화를 보게 되면 탐복하는 마음으로 예찬하고 흠모하면서 끝내는 그것이 어떤 사람의 재능으로 이루어낸 것인가를 물어보는 등 결코 단순히 보아 넘기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주 만물의 다양하고 각양 각색한 형상들도 따지고 보면 이것 또한 일종의 훌륭한 작품이며 명화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것들은 누가 만들었는지 한 번도 묻지 않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존재하는 물질은 질(質)과 모양(模樣)과 작(作)과 위(爲)의 네 자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질(質)이란 재료를 말하는 것이고, 모(模)는 형상을 말하는 것이며, 또 작(作)은 만드는 이를 말하는 것이고 위(爲)는 무엇에 쓰이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치를 가까이는 자신의 몸에서 멀리는 사물에서 따져 보더라도 안 그런 것이 하나도 없거늘 어찌 천지를 만든 이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만물을 통해서 하느님이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양심이 증거가 된다 함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밝은 낮이 갑자기 캄캄해지면서 천둥과 번개가 번갈아 쳐대면 어린아이라도 금방 무서워 떨고 눈을 토끼 눈처럼 뜨고는 오금도 제대로 못 펴면서 몸 둘 바를 몰라 합니다. 이것을 보면 선을 상 주시고 악을 벌하시는 큰 임금님께서 계시다는 것이 사람들 마음과 머리 속에 깊이 새겨져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 무식한 남자와 여자들도 당황스러운 막다른 지경이나 몹시 슬프고 절망스러운 때를 만나면 틀림없이 하느님을 찾으며 부르짖듯 기도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마음과 타고난 천성으로서 숨길래야 숨길 수 없기 때문에 가르치지 않아도 알고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떻게 섬길지 몰라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양심을 보면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성경이 증거가 된다 함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옛 성현인 요, 순, 우, 통, 문, 무, 주, 공이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경서와 사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경서와 사서가 없었더라면 요, 순, 우, 탕, 문, 무, 주, 공이 어떤 사상을 펼치고 어떤 제도를 세웠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들의 사상과 제도가 대쪽에 새겨지고 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내용이 옳다고 생각하면 금석(굳게) 같이 믿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천주교가 전해진 것도 역시 그 경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지창조 때부터의 역사를 끊임없이 기록하여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명백하게 실어놓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집집마다 이를 암송하고 거문고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서적들을 소가 땀을 흘릴 만큼 많이 실어다가 온 집안을 가득 채운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을 조금도 잘못되게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러한 글들을 경서와 사서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고 하여 의심하는 마음을 품습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말들이 중국의 경서와 사기 가운데서도 나타나 있지 않습니까?

즉 역경에서는 “하느님께 바칩니다”라는 말을 하고 있고, 시경에서는 “하느님께 제사 드립니다”라는 말을 하고 있고 공자 역시 “하늘에 죄를 지으면 기도 바칠 곳이 없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늘을 공경하고 하늘을 두려워하면 하늘에 순종하고 하늘을 받들라는 등의 학설이 여러 성현들과 철학서들의 저서 곳곳에 나타나 있으니 설사 서양의 사기(성서)가 전래되지 않았다고 해도 무엇이 걱정이 되겠습니까? 설령 서양의 사기(성서)가 전해졌다고 해도 요 임금 때의 홍수와 진시황 때의 큰 불로 소멸되어 전해지지 못했음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손권의 동오시대에 이르어 적오년간(AD 238~248)에서 쇠 십자가 발견되었고, 당나라의 정관 9년에는 경교가 크게 번창해서 위로는 조정에 저명한 사람들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같이 이를 숭배하여 큰 제사를 드리고 경교비를 세웠습니다.

 

위징과 방현령 같이 어질기로 이름난 사람들도 의심을 품지 않고 굳게 믿었습니다, 또 명나라 때 만력년간(1573~1619)에는 서양의 선교사가 들어와 지내면서 지은 책이 많이 있어 중국에는 지금까지 그런 책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묵묵히 동양을 도와 주셨는데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에도 하느님의 손길이 미치게 되어 우리도 행복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되니, 이는 참으로 신비스러운 일로 그러한 행복을 맛볼 수 있게 된지 벌써 50년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성경을 보면 하느님이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증거를 들어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이제 명확히 알았으니, 하느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장차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시고, 당신의 덕을 나타내시려고 하신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늘을 만드시어 우리를 감싸주시고 땅을 만드시어 우리의 터전을 마련해 주시고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어 우리를 비추시고, 식물과 동물과 금, 은, 동, 철 등을 내시어 우리가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태어나서 성장할 때까지 여러 가지 큰 은혜를 한없이 내려주시니 사람이 해야 할 본분은 마땅히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만약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살면서 입고 먹기만 한다면 인류를 내신 큰 은혜를 이보다 더 크게 저버리는 것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컨대 아버지가 집을 짓고 살림을 마련하여 아들에게 주어 사용하게 하였더니 그 아들이 그 집에 살고 그 살림을 쓰면서 함부로 제가 잘난 체하고 부모를 섬기는 도리와 근본에 보답하는 뜻은 모른다면 이것이 효도하는 것이겠습니까? 불효하는 것이겠습니까?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털끝만한 것도 모두가 하느님의 힘입니다. 낳으시고 기르시고 도와주시고 보호하시어 인도해 주십니다. 죽은 후에 받을 상을 그만두더라도 현재 받고 있는 은혜가 이미 무한하여 비할 데 없으니 우리가 마땅히 일생을 다하여 어떻게 받들어 섬겨드려야만 그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받들어 섬기는 길은 고상하고 원대한 일도 아니요, 멀리 있어서 행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요 은밀한 일을 찾아서 기이하고 괴상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요, 다만 잘못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져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일 뿐입니다.

 

계명이란 하느님께서 계시로써 가르치신 계율을 말합니다. 첫째는 하나이신 천주를 만유 위에 흠숭하는 것이고 둘째는 천주의 거룩한 이름을 불러 거짓맹세를 하지 않는 것이고, 셋째는 주일을 지키는 것이고, 넷째는 부모님을 효도로써 공경하는 것이고, 일곱째는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것이고, 여덟째는 거짓 증언을 하지 말하는 것이고, 아홉 번째는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하는 것이고, 열 번째는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는 것인데 이 열 가지 계명을 종합하면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집니다. 즉,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앞의 세 가지 계명은 하느님을 흠숭하여 섬기는 길이며, 뒤의 일곱 가지 계명은 자기를 닦아 성찰하는 방법입니다,

 

공자는 제자인 안연에게 인의 실천 조목을 설명하면서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대기:예기>에서는 볼 때는 밝기를 생각하고, 들을 때는 총명하기를 생각하고, 얼굴빛은 온화하고자 생각하고, 태도는 공손하고자 생각하고, 말은 겸손하고자 생각하고, 일을 할 때는 성실하고자 생각하고, 의심이 날 때는 질문하여 밝히고자 생각하고, 화가 날 때는 잘못하여 환난이 부모에게 끼치지 않을까 생각하고, 이득을 보면 그것이 의로운가를 생각하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모두 십계명에 비교하면 너무나 부족합니다.

 

십계명 안에는 충성과 관용과 용서, 그리고 효도와 우애, 인애와 의리, 예의와 지혜가 들어 있으니 털끝만큼도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때문에 이 도리를 한 집안에서 실행하면 집안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며, 한 나라에서 실행하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이고, 전 세계에서 실행하면 온 세계가 평화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열 가지 계명 가운데 한 가지라도 범해서는 안 되며. 더욱이 몸으로 범해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범하는 것도 금하고 있습니다. 헤아려 생각하건대 사람의 과실은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서 행동을 그르치는 것입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법은 행동은 다스릴 수 있지만, 마음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계명은 행동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다스립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위태롭지만 하고 진리를 구하는 마음이 미약해서 자칫하면 죄를 범하게 됩니다. 개인적인 욕심과 집착이 사람을 온갖 방법으로 유인하니 교만에 빠지게 하고 분노에 빠지게 하고, 탐욕에 빠지게 하고, 음란한 생각에 빠지게 하고, 질투에 빠지게 하고, 인색하게 하고,. 게으름에 빠지게 하여 마침내는 사람을 죽는 지경에 빠뜨리고 맙니다.

 

진실로 그때그때 경계하여 물리치지 않으면 함정에 빠짐을 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죽는 날까지 싸워야 하는데 아무리 힘들더라도 싸워서 이기면 공로가 되나 이기지 못하면 죄에 떨어지게 됩니다. 공로와 죄에 대한 판결은 육신이 죽는 날 있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극히 공번되시어 선은 꼭 갚아주시고, 또한 지극히 의로우시어 악은 반드시 벌하십니다. 만약 사람이 죽은 뒤에 영혼까지 없어진다면 하느님이 상이나 벌을 어디에 베푸시겠습니까? 따라서 분명히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혼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생혼이고, 둘째는 각혼이고, 셋째는 영혼입니다.

 

생혼은 식물의 혼으로 나서 자랄 수는 있으나, 인식이나 감각은 없습니다. 각혼은 동물의 혼으로 인식하고 감각할 수는 있으나, 뜻과 이치를 알지 못하고 옳고 그름을 모릅니다. 영혼은 사람의 혼으로 살 수도 있고, 자랄 수도 있으며 인식할 수도 있고 감각할 수도 있으니, 또한 옳고 틀린 것을 판단할 수 있고 진리를 추리하여 논할 수도 있으며, 만물 가운데 사람이 가장 고귀합니다. 사람이 고귀하다는 것은 그 혼이 영특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늘이 주신 성이라 하는데 이것은 하늘이 우리가 태 중에 있을 때 불어 넣어주신 것입니다. 어찌 그러한 영혼이 동물과 식물 같이 썩어서 없어지겠습니까? 선대의 유학자들은 혼은 세 가지가 있으되, 영혼만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삼혼(생혼, 각혼, 영혼)이 여러 번 흩어진다.” 또는 “혼은 올라가고 백은 내려간다.”

 

그리고 "그 혼은 세 가지가 있다.” 등의 말을 하였으니 영혼이 죽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영혼이 정말 죽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면 도대체 어디로 가겠습니까? 선한 사람의 영혼은 천당으로 올라가서 하느님께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의 영혼은 지옥에 내려가 벌을 받게 됩니다.

 

상은 천당의 영원한 행복이며, 벌은 지옥의 영원한 고통입니다. 만약 천당과 지옥을 보지 못했다고 해서 천당과 지옥이 있음을 믿지 않는다면 눈먼 사람이 하늘을 보지 않았다고 해서 하늘에 해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일이 이치에 맞으면 비록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지만 비록 보인다고 해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럼으로 믿고 믿지 못하는 것은 실로 이치에 합당하면 천년 후에 올 일도 앉아서 알아낼 수 있는데 꼭 직접 눈으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한 나라에도 반드시 상과 벌이 있습니다. 공로가 있는 사람은 조정으로 불러 벼슬과 녹을 주어서 머물게 하여 황금과 비단을 주고, 죄가 있는 사람은 쫓아내어 옥에 가두거나 사형에 처합니다. 한 나라의 임금에게도 상을 주고 벌을 주는 권한이 있거늘 하물며 하늘과 땅의 큰 임금이신 분이야 어떠하겠습니까? 그 상은 이 세상의 벼슬과 녹에 비교할 수 없는 영원무궁한 행복입니다. 그 벌도 이 세상의 징역과 사형에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고통입니다. 또한 천당에 오르고 지옥에 내려가는 것은 한 번 결정되면 다시 변경할 수가 없습니다.

 

아! 세상 사람들이 영혼이 죽지 않는다는 것은 명확히 알면서도 어디에 있는 줄은 알지 못하니 이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이미 말씀 드린 대로 영원한 상과 영원한 벌이 있어 세상의 일은 모두 헛된 현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길어야 백 년을 넘지 못하는데 사람은 현세에 집착하여 사리사욕만을 추구하며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으려고 걱정하고, 이미 얻은 것은 잃을까봐 걱정하면서 죽을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한 번 죽으면 재산과 지위와 공로와 명예는 결국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더욱이 재산과 지위와 공로와 명예는 한평생 구하여도 다 얻지 못하는 것인데 그 헛된 꿈에서 깨어나기가 어찌 그리도 어렵습니까?

 

아! 이 세상의 행복은 어그러져 완전하지 않지만 천당의 행복은 완전하여 어그러짐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행복은 잠시 뿐으로 영원하지 못하나, 천당의 행복은 영원하여 결코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미흡하고 잠시 뿐인 이 세상의 행복을 구하는 것이 어찌 완전하고 영원한 천당의 행복을 구하는 것과 같습니까? 

 

비록 천당의 영원한 행복을 얻지 못할지라도 지옥의 뒷걱정만 없다면 세상의 행복을 추구해도 좋겠지만, 이 지옥의 영원한 벌을 어찌 하겠습니까? 이 세상에 있을 때는 정신이 흐려서 깨닫지 못하다가 죽은 뒤에 후회하고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목을 끊어버릴 도끼가 앞에 있고 몸을 삶을 큰 솥이 뒤에 있더라고 굳건히 신앙을 굽히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성교는 지극히 거룩하고 지극히 공번되며 지극히 바르고 참되며 완전하고 하나인 종교입니다.

 

 

왜 성교를 지극히 거룩한 교회라고 하냐 하면 성교는 하느님께서 친히 세우신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로부터 여러 성인들이 대대로 성교의 진리를 증거하고 그 규칙을 정하여 생명을 바쳐서 증명하기까지 하였으므로 지극히 거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성교를 지극히 공번되다고 하냐 하면 성교는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 학식이 있거나 없거나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늙었거나 젊었거나를 막론하고 전 세계 사람들이 다같이 마땅히 실천해야 할 종교이기 때문에 지극히 공번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성교를 지극히 바르다고 하냐 하면 성교는 보편적이고 명백하고 넓고 평평하여 터럭만큼도 한 곳에 치우친 행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올바른 것을 굽히는 일 또한 없기 때문에 지극히 바르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성교를 보고 지극히 참되다고 하냐 하면 이 세상에 종교가 없었던 나라도 하나도 없는데도 그 종교가 참되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노자와 장자는 허무사상으로 참됨을 잃었고, 도교와 불교는 환상과 망상으로 참됨을 잃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사상가들과 미신 점술들이 있으나 하나같이 말할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교의 교리는 진실하여 거짓이 없고, 영원히 잘못되지 않기 때문에 지극히 참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성교가 지극히 완전하다고 하냐 하면 그것은 나무에 비유하여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이단 종교들 중 어떤 것은 줄기는 있으되 가지가 없고, 어떤 것은 잎은 있으되 꽃이 없고, 또 어떤 것은 꽃은 있으되 열매가 없어 시작과 끝이 서로 연결되지 않고 이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성교는 줄기가 있고, 가지가 있으며 잎이 있고 꽃이 있으며 열매가 있어서 천지와 귀신과 인간의 시작과 끝,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순서를 다 갖추고 있기 때문에 지극히 완전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슬프도다! 금과 구슬을 가리켜 억지로 기와와 자갈이라고 억지 부리고 먹어서 좋은 것을 갖고 못 먹는 것이라고 우겨대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또한 부모님을 업신여기고 임금도 업신여긴다고 말하니 이는 성교의 가르침을 하나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십계명의 네 번째가 부모님을 효도로 공경하는 계명입니다. 무릇 ‘충’과 ‘효’라고 하는 두 글자는 만대가 흘러도 변할 수 없는 도리입니다.

 

부모의 뜻을 받들고 그 육신을 봉양하는 것은 자식으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신자들은 더 더욱 열심히 삼가고 조심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를 다하여 부모님을 섬기고 온 힘을 다하여 부모님을 봉양해야 합니다. 또한 임금에게 충성을 바칠 때에도 자신의 몸을 허락하여 생명을 바치고, 끓는 물속에 들어가고 타는 불을 밟더라도 결코 피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성교에서 가르치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이런데도 성교를 보고 부모를 업신여기고 임금을 업신여기는 학설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저 임금이 금지하는데도 백성 중에 실행하는 사람이 있고 집안이 아버지가 금하는 데도 자식 중에 실행하는 사람이 있다고 이것을 가지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까? 이것 역시 말은 됩니다. 그러나 지위에는 높고 낮음이 있고, 일에는 가볍고 무거운 것이 있으니 집안에서는 아버지가 제일 높으나 한 집안이 아버지보다 높은 것은 나라의 임금이며, 한 나라 안에서는 임금이 가장 높으나, 임금보다 높은 것은 천지의 큰 임금이 계십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듣고, 임금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그 죄가 무겁습니다. 하지만 임금의 명령을 듣고 천지의 큰 임금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그 죄는 더욱 커서 비할 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주를 받들어 섬기는 것은 임금의 명령을 일부러 어기려는 마음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같은 어쩔 수 없는 이치 때문에 하는 것인데 이 한 가지 때문에 아버지를 업신여기고 임금을 업신여긴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또 말하기를 재물과 여자를 서로 교환한다고 합니다만 재물을 교환하는 것은 예로부터 국가를 다스리고 가정을 다스리는 사람에게는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나누어야만 백성들이 서로 의지하고 생활합니다. 만일 재물을 교환하는 법이 없다면 제대로 생활할 사람이 이 나라 전체에서 몇이나 되겠습니까? 바로 이것을 좋지 못한 법이라고 하여 오히려 금지해야 하겠습니까?   

 

여자를 서로 교환한다고 말하는데 동물도 그렇지 않은 것들이 있는데 하물며 어찌해서 그런 행동을 천주교에서 한다고 하는 것입니까? 십계명 중 여섯 번째 계명에서는 음행을 하지 말라고 하였고, 아홉 번째 계명에서는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여섯 번째 계명은 몸으로 범하지 말라는 것이고, 아홉 번째 계명은 마음으로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주교가 간음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것을 이와 같이 강조하고 있는데 어째서 도리어 여자를 교환한다는 거짓말을 보태기까지 합니까? 그처럼 윤리를 거스르고 떳떳한 질서를 어지럽히는 종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교리의 참되고 거짓됨과 사리의 바르고 그름은 한쪽으로 제쳐놓고 얼토당토 않은 일로 공격하고 배척하기만 하니, 이는 성교가 외국의 종교라 하여 그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금은 산지에 관계없이 순금이냐 아니냐에 따라 보배가 되느냐 안 되느냐가 가려지고, 종교는 그 지역에 관계없이 거룩하냐 거룩하지 않느냐에 따라 참된 종교인지 아닌지가 가려집니다. 그런데 어찌 이러한 종교를 전파하는데 있어 이 나라 저 나라에 경계가 있겠습니까?

 

중국에서는 각 나라 사람들이 오고 가며 서로 교제합니다. 거기에서는 불교의 학문도 하는 대로 그냥 놔둡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중국에 와서 많이 살고 잇지만, 한 번도 금할 줄을 몰랐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교가 해를 끼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전국에 있는 사찰의 건축은 사치가 극에 다다르고 있으며, 금과 구리로 된 불상은 재산을 낭비하여 만든 것입니다.

 

저 불교라는 것은 서역의 이단입니다. 성교의 글을 표절했고 성교의 규칙을 본뜨긴 했지만, 옳은 도리를 그르쳤고 윤리와 기강을 무너뜨렸습니다. 이것은 이른바 붉은 빛깔을 망치는 자줏물이요, 못자리를 망치는 가라지 풀입니다.

 

헛된 길흉화복의 학설을 떠벌려서 무식하고 어리석은 백성을 협박하는 것이 지금의 불교가 가지고 있는 괴이하고 못된 풍습입니다. 심지어 무당, 풍수, 점쟁이, 관상쟁이와 같은 사람들까지 부녀자와 아이들을 속이고 홀려 돈과 재물을 조금씩 낚아채 가는 것은 예사로 보면서 유독 천주교만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어찌 된 것입니까?

 

성교가 가정에 해를 끼쳤습니까? 국가에 해를 끼쳤습니까? 그 하는 일을 보고 그 행실을 살펴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고, 그 가르침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저희들이 일찍이 나라와 임금님께 반역을 하였습니까? 도둑질을 하였습니까? 간음을 하였습니까? 뿐만 아니라 법에 없는 형벌을 주어서 하느님을 배반케 하고 더러운 욕설로 모독하는 일이 너무도 많은데 무릇 하느님은 만물을 만드신 큰 부모이시고 만물을 다스리시는 큰 주재자이십니다. 옛날의 성현들은 일이 있으면 하느님께 자주 기도하였는데 요즘 사람들은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흉년을 당하고 있습니까?

 

가정과 국가가 어렵고 빈곤한 이때, 바라건대 우리 임금님께서는 밤에도 옷을 벗지 마시고 해돋이에 진지를 잡수실 만큼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시며 어지심을 베푸시어 생명을 살리는 덕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시옵소서. 아! 우리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만이 홀로 우리 임금님의 자식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슬프다! 어찌하여 사람들이 이렇듯 극도에 이르도록 조금도 서로 감싸주지 않는단 말입니까? 감옥 안에서는 지쳐서 죽고, 문 밖에서는 끊임없이 목을 베어 죽여 피눈물이 도랑을 이루고 통곡하는 소리가 하늘까지 뻗어 오르며 아버지는 자식을 부르고 형은 아우를 부르니, 막다른 데로 쫓긴 사람이 몸을 들이킬 데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맑고 밝은 세상에 이게 무슨 꼴입니까? 대저 목숨을 걸고 생명을 바쳐서 천주의 참된 가르침을 증거하고 천주의 영광을 나타냄은 저희들이 해야 할 본분입니다. 이 몸 또한 머지않아 죽어야 할 몸입니다. 이렇게 감히 말해야 할 때를 만나서 한 번 머리를 쳐들고 길게 외치지 않고 슬프게 입을 다물고 죽는다면 산더미와 같이 쌓인 감회를 장차 백 대가 지난다 하더라도 다 풀지 못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바로 이때에 임금님께서는 밝게 비추시고 굽어보시어 성교의 도리가 참된 것인지 그릇된 것인지 올바른 것인지 자세히 판단하신 다음, 위로는 조정으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새롭게 변화되어 성교로 돌아와서 금령을 늦추고 체포하는 법을 철회하고, 옥에 갇힌 사람들을 석방하여 모든 백성들이 제 고향에 정착하여 제 생업을 즐기면서 다같이 평화를 누리며 살도록 하시기를 바라고 또 바라옵니다.

 

또 한 말씀드립니다. 죽은 사람 앞에 술과 음식을 차려놓는 것은 천주교에서 금하는 바입니다

살아 있을 동안에도 영혼은 술과 밥을 받아 먹을 수 없거늘 하물며 죽은 뒤에 영혼이 어찌 하겠습니까

먹고 마시는 것은 육신의 입에 공급하는 것이요 영혼의 양식은 진리와 덕행입니다

아무리 지극한 효자라 해도 맛좋은 것이라 해서 잠들어 있는 부모앞에 차려드릴 수 없는 것은

잠들었을 동안은 먹고 마시는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 잠들었을 때도 그렇거든 하물며 영원히 잠들어 버렸을 때는 어떻하겠습니까

쌀과 수수와 기장과 피와 향기로운 과일로 된 젯상을 차려 놓음이 헛된 일이 아니면 거짓된 일입니다

사람의 자식이 되어 헛되고 거짓된 예로 어찌 이미 죽은 어버이를 섬길 수 있겠습니까

 

양반 집의 신주라고 하는 것도 천주교에서는 금하는 것입니다

이미 정신의 기백과 육체의 골격이 서로 연결된 것이 없고

또 낳아서 길러준 노고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아비라 어미라 함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목수가 만든 것이요

분을 칠하고 먹을 찍은 것을 가지고 참 아비와 참 어미라 부릅니까

 바른 이치에 근거가 없고 양심이 허락지 아니합니다

차라리 양반에게 죄를 지을지언정 천주교에 죄를 얻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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