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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최양업신부의 열두 번째 편지

                                                              소리웃에서 1856년 9월 13일
예수 마리아 요셉,

지극히 공경하올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오랫동안 소식이 격조하였습니다. 이럴수록 더 많은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해드려야 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펜을 들기만 하면 모든 생각이 달아나고 맙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도저히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의 기쁨을 표현하지 아니하고서는 못 배길 일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마침내 우리의 착하신 목자 갑사(Capsa) 명의의 베르뇌 장 주교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일찍이 큰 서원으로 갈망하였으나 그 갈망이 실망으로 변하여 잊어버린 지 벌써 오래된 주교님을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로 마침내 우리 안에 모시게 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장 주교님께서 새 선교사 두 분을 우리의 새로운 협조자로 동반하고 오셨으니 한층 더 기쁩니다. 원컨대 그렇게 엄청난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 앞에 우리가 부당한 자들로 여겨지지 안히하기를 바랍니다.

1854년 9월에 신부님께 보내드린 저의 편지에서 제가 신부님의 편지와 성물을 받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금년에 존경하올 우리 주교님이 오시는 편에 신부님의 회답이 없어서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혹시 저의 편지가 신부님께 전달되지 못하였는지요? 아니면 다른 무슨 이유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요?

(최 신부님의 9번째 편지는 분실되었다)

그런데 경애하올 바랑 (극동 대표부) 책임자 신부님의 사망 소식을 듣고 참으로 애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 매우 부당한 기도이지만 기도 중에 바랑 신부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이제 근심과 걱정에서 해방되어 저 세상에 계시는 바랑 신부님께서 살아 계셨을 때 못지않게 우리 가련한 포교지를 위하여 보살펴주시는 관리자가 되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금년에는 하느님 자비의 허락하심으로 사목 순회를 별 탈 없이 평온하게 무사히 마쳤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고기잡이 그물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무려 180명이 넘는 어른이 거룩한 샘터에서 몸을 씻고 그리스도의 양우리에 스스로 끼여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길을 가로막으려고 기를 쓰고 계속 소란을 피워대는 사탄의 난동도 있었습니다.

하루는 전라도 진밧들이라는 마을로 갔는데, 그곳은 얼마 전부터 마을 사람 거의 전부가 교리를 배우며 세례 준비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세례받을 준비를 다 마치고 선교사 신부님이 오기만 초조하게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저녁나절에 몇 명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한 다음, 유아 세례에 이어서 대세받은 아기들에게 세례성사 보례를 집전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잠깐 눈을 붙였다가 닭이 울 때 일어나 미사를 드릴 예정을 하고서, 영세 준비를 마친 어른 15명에게 세례성사를 집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백 명이 넘는 포졸들이 마귀떼같이 몽둥이를 들고 쳐들어 왔습니다. 그들은 제가 성사를 거행하고 있는 집을 둘러싸더니 미사 가방과 성작 등을 빼앗아 가기 위해 제가 있는 방까지 들어오려고 덤벼들었습니다.

그러나 거기 함께 있던 신자들이 비록 숫자는 그들보다 적었으나 그들의 침입을 완강히 대항하여 못 들어오게 막았습니다. 문을 빙 둘러싼 그들은 온갖 폭력을 휘둘러 문을 부수고 들어오려 하고 신자들은 죽을 힘을 다해 그들을 물리치느라고 일대 난투극이 벌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쌍방간에 부상자까지 발생하였습니다.

저는 몇몇 신자들과 함께 방 안에 있었는데 신자들의 도움으로 급히 미사짐을 챙겨 들고, 뒤 창문으로 재빨리 빠져나와 캄캄한 밤을 이용하여 산 속으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저와 몇몇 신자들은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바위와 가시덤불 사이로 허둥지둥 이리저리 헤매었습니다.

서로 있는 힘을 다하여 싸우는 북새통에 양편에 부상자가 많이 났고, 결국에는 외교인들이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격렬하게 싸우고 나서도 아무것도 강탈하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겨 그 마을을 관가에 고발하였습니다. 그래서 관장은 그 마을의 유력자 5명을 체포해서 감옥에 가두게 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이 바오로라는 사람이었습니다. 7,8년 전에 신자가 된 그는 다른 신자들보다 더 열심하고 덕망이 높아서 그 마을(진밧들)의 회장으로 선임된 사람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하 아우구스티노라는 사람인데 그 고을 원님인 관장 다음으로 제일 높은 관리였습니다. 그는 겨우 3년 전에 영세했는데 벌써 많은 외교인들을 천주교로 이끌어들였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의 주동자이고 천주교를 전파하는 자라 하여 체포되었습니다.

나머지 세 사람은 1년 전쯤부터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예비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외교인들이 우리를 습격하러 왔을 때 저한테서 세례를 받으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중 첫째 사람은 이 나라의 가장 높은 양반 가문에 속하느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천주교의 진리를 깨달은 후 집안에서 천주교를 실천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장애가 있기 때문에 자기 고향을 떠나 이곳 산 속 교우들한테로 이사와서 살고 있던 사람입니다.

나머지 두 사람은 우리 공소에 포졸들을 데리고 왔던 배교자의 친척들이었습니다. 그 배교자는 첫 배반자인 유다 이스가리옷을 본받아 저를 체포하려고 공소를 습격한 것이었습니다. 그자는 배교한 후 내통자와 박해자로 변신하였습니다. 그 배교자는 이번 습격을 하기 전에도 자기 친척들인 두 사람의 예비 신자에게 온갖 방법으로 모욕과 핍박을 가하면서 자기를 본받아 배교자가 되도록 강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내심이 강한 그 두 예비 신자는 끝끝내 요지부동으로 항구하였습니다.

관가에 잡혀간 우리 신자들은 용감하게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증거하였습니다. 관원으로부터 하느님을 저주하라고 재촉을 받았을 때, 그들은 "이 세상의 임금님을 비방하여도 죄악이 되거늘 하물며 우주 만물을 영원히 지배하시는 하늘의 임금님이신 창조주께 욕을 한다는 것은 천상천하에 용납받지 못할 극악 대죄입니다. 우리는 죽어도 그런 큰 죄악을 범할 수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은 한 차례 문초를 받은 후 다시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각자가 자기 부담으로 먹을 것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집안이 몹시 가난하므로 그들에게 옥바라지를 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실정이었습니다. 저에게 여유가 있다면 그리스도를 위해 갇힌 저 사람들의 궁핍한 사정을 도와주고 싶지만 그러하지 못하니 한숨밖에 보낼 것이 없습니다.

신부님께서 저에게 편지를 보내주셨을 때 유럽 신자들에게 감동이 되거나 표양이 될 만한 조선순교자들의 행적이 있으면 적어 보내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사건들을 수집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필요한 증인이 없어서 확증된 것을 많이 수집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한 사람에 대해서만 신부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1839년에 조선 교회 전체를 휩쓴 기해 대박해 때 순교한 사람입니다. 그는 시골 지방에 살았던 관계로 왕도(서울) 사람들에게는 별로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해의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던 때에 그 순교록(기해일기)에서 빠졌습니다. 다행히 그의 행적에 대한 구술 내용을 적어 놓은 종이를 발견하였습니다. 또 그의 아버지와 아내와 아들 그리고 친구들이 생존해 있으므로 충분한 증명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 순교자의 이름은 최해성(崔海成) 요한입니다. 그는 충청남도에서 신자 부모로부터 출생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이웃을 사랑하므로 모든 이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첫번 박해 때 그의 조부가 귀향을 가게 되어 온 집안이 그 조부를 따라서 귀양소까지 갔습니다. 그곳 고을에서 요한이 장성하였는데, 주위 정세로 보아 외교인들 한가운데 살면서는 천주교를 합당하게 실천할 수가 없어서 산 속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거기서 그는 작은 교우촌을 형성한 다음 모든 이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착한 표양으로 모든 이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그는 극도로 비참한 가난과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항구한 인내심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런 가난 중에서도 자기 형편이 허락하는 대로 애긍 시사와 자선 사업 등을 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천주교의 모든 본분을 이행하는 데 뛰어난 열성을 다하고, 신자들을 격려하며 비신자들을 권면하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자기 마을에 선교사 신부님이 오셔서 성사의 은총을 받을 때에는 말할 수 없는 열심에 불탔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이 모든 덕행에 감동한 선교사 신부님께서 그를 그 마을 회장으로 선임하셨습니다. 그는 견진성사를 받은 후 성신 칠은의 특은을 충만히 받은 증표가 나타났습니다. 주님을 위한 순교로써 자기 자신을 살아 있는 희생제물로 하느님께 바칠 의욕이 나날이 커졌습니다.

1839년에 일어난 기해(己亥)박해가 날로 더욱 악랄하게 되자 요한은 부모와 가족들을 좀더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습니다. 그런 다음 교회 서적들을 가져오기 위해 다시 집으로 가던 중 포졸들과 마주쳤습니다. 포졸들이 요한을 신자인 줄 알아보고 체포하여 그에게 이웃 신자들을 고발하라고 윽박질렀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득이 없자 그를 관가로 끌고 갔습니다. 그는 포졸들한테서 얼마나 매를 많이 맞았던지 온몸이 상처투성이였고 몸을 가누기조차 힘겨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혼의 눈으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갈바리아 산상으로 올라가시는 모습을 주목하였습니다. 그러자 잡혀가는 길목인데도 느닷없이 힘과 활기가 용솟음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관가에 끌려가서 관장 앞에 섰을 때 관장이 "네가 사악한 종교를 신봉한다니 참말이냐?" 하고 물었습니다. 요한은 "나는 사악한 종교를 믿지 아니합니다. 하늘의 주님을 섬기는 천주교를 믿을 따름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형리들이 그를 고문하는 동안에 관장이 "너와 함께 천주교를 믿는 자가 몇 명이냐? 그들이 누구 누구인지 이름을 대라. 그들이 어디 사는지 말하라." 하고 다그쳤습니다. 요한은 "저는 제 형제들을 고발할 수 없습니다. 우리 천주교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이웃을 해치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금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1차 문초가 끝난 후 감옥으로 다시 끌려가서 포졸들과 군중들한테 무수한 행패와 매를 맞아 기진맥진해졌습니다

그는 며칠 후 다시 끌려나와 문초를 받았습니다. 관장이 "네가 천주를 배반하면 나라의 착한 백성이 되겠고, 너의 모든 재산을 되돌려줄 것이며 상금까지도 보태줄 것이다." 라고 구슬렀습니다. 요한은 "저는 관장께서 온 고을을 다 주신다고 말씀하셔도 하느님을 결단코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편태를 자그마치 백 대 이상이나 맞고 감옥에 다시 갇혔습니다.

그후 다시 재판관이 호출하여 "네가 정말 죽기를 바라느냐?" 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요한은 "저도 다른 이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정의를 위하여 죽기를 사양하지 않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재판관이 크게 분노하여 곤장과 편태의 가공할 만한 형벌을 명하면서 말했습니다. "너의 종교를 위해 죽겠다는 말이 참말이라면 네가 죽을 때까지 치도록 하마." 요한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고 살아 갈기갈기 찢어지고 뼈가 드러났으나 하느님의 사랑으로 불붙은 그의 영혼은 기쁨으로 용약하였습니다. 그는 지겹게도 21차례나 문초를 당하였습니다. 얼마나 모질게 고문을 당하였는지 살과 가죽이 해어져 창자가 몸 밖으로 쏟아져 나왔으며 뼈가 으스러졌습니다. 문초중에 당한 형벌 외에도 포졸들과 악당들에게 온갖 폭행을 다 당하였습니다.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고, 1839년 9월 29일에 목이 잘려 스물 아홉의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 그가 천국으로 개선하는 마당으로 내려갈 날이 밝아 왔을 때 그는 기쁨의 표시로 자기와 옥사쟁이들에게 작은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가 영광스럽게 최후의 형장으로 끌려나갈 때에 그동안 욕설을 퍼붓고 매질하고 형벌하던 포졸들과 백성들이 그를 뒤쫓아가면서 눈물을 흘리며 그와 작별하였습니다.

다른 순교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무척 많으나 아직 충분한 증거를 얻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더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게 되는 때에 신부님께 더 자세히 보고하겠습니다.

저는 며칠 후 여기서 7백 리 떨어진 새 교우촌으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이 교우촌은 귀양간 어떤 신자가 그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의 씨를 뿌려 최근에 교우촌을 형성한 곳입니다. 그 신자가 사람을 보내어 선교사 사제를 모셔 오도록 청한 것입니다. 제가 이 교우촌을 방문하고 나서 혹시 주목할 만한 이야기가 있으면 다음 기회에 신부님께 보고드리겠습니다.

신부님의 또 다른 분부가 있습니다. 신부님께서 저에게 아쉬운 것이 있으면 청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전에 아쉬워서 청했던 것과 같은 것들을 다시 청합니다. 무엇이든지 보내만 주시면 저에게는 다 필요하고 소용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들보다 하느님의 자비가 저와 우리에게 필요하니다. 이를 위하여 저와 저의 가련한 조선 신자들을 신부님의 사랑이 넘치는 기도에 다시 의탁합니다.

공경하올 사부님께 지극히 미약한 종 최 토마스가 올립니다.

신부님 오늘은 생명주일입니다
생명주일 담화문에서  
응급피임약은  낙태약이라는 말씀과
응급피임약의 남용과  일반 피임약으로의 전환에
대한 언급에서 우려하였습니다

신부님 오늘 저희가  살아가는 세상형편이
이렇습니다
국가가 나서서 나태를 부추겼던 시대가 있었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불편한 진실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신부님  불상한 저희위해 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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