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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3>일곱번째 편지 (1)

2011.12.03 17:24

기도방지기 조회 수:1047

||0||0최양업신부의 일곱번째 편지 (1)

                                                                   도양골에서 1850년 10월 1일


예수 마리아 요셉,
지극히 공경하올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드디어 그렇게도 오랜 동안 소망하던 때가 왔습니다.  저의 가련한 조국에서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저의 형제들에게 대한 사랑하올 신부님들께 편지를  썼을 때 제가 중국에서 마지막 편지를 드리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또 다가오는 겨울에 조선으로 들어갈 원정을 다시 시도할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마지막 원정은 그 이전의 여행들에 비하여 지루하고 길었습니다. 필요한 것들이 더욱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희망은 훨씬 더 적어 보였습니다마는 그럴수록 저로서는 내적으로 더욱 큰 신뢰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우리 안에서 더 미약할수록 우리는 그만큼 하느님 안에서 더욱 강해지게 마련입니다.

저는 5월에 함선을 타고 상해를 떠나 다시 요동으로 왔습니다. 여기서 7개월동안 머물면서 대목구장 직무대행이신 베르뇌 신부님의 명령에 따라 병자들을 방문하고 (병자성사를 집전하고) 신자들에게 주일과 축일에는 짧은 강론을 하며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큰 축일에는 고해성사를 주며 성체를 배령하게 해주는 일에 정성을 다 바쳤습니다.

(베르뇌 신부는 마카오에서 김대건과 최양업을 가르치다가 만주 대목구에 배속된 선교사다. 그는 후에 제4대 조선 대목구장이 되었다.)

존경하올 페레올 주교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저는 12월에 변문으로 해서 조선에 들어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메스트르 신부님도 저와 함께 변문으로 가기를 원하였습니다. 비록 성공할 희망은 별로 보이지 않았습니다마는, 어떻든지 무슨 기회가 오기만 하면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변문에 도착하여보니 (조선 안에 계시는) 존경하올 페레올 주교님께서 보내신 밀사들이 와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과 더불어 메스트르 신부님도 저와 함께 입국시켜드리려고 백방으로 궁리해보았으나, 현명하지 못한 처사로 판단되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쓸쓸히 떨어져 슬퍼하시는 메스트르 신부님을 중국에 남겨둔 채 어쩔 수 없이 저만 혼자(조선에서 마중 나온 사람들과 함께) 조선으로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함악한 길을 계속하여 개척해나가면서 조선의 철통같이 굳게 닫힌 관문을 뚫고 통과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는 관문 경비초소의 경계망을 들키지 않게 피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모든 기대와 희망을 하느님의 자비하신 전능에 의탁할 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지하고 체포될 각오를 단단히 하고서 밤중에 관문 경비 초소에 다가갔습니다. 압록강 강변을 지키는 경비병들의 일상업무는 성벽 위와 읍내로 들어가는 성문에서 경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은 칠흑같이 캄캄한 밤이었고 거기다가 광풍이 참으로 거세게 불었으며
혹독한 추위에 몸이 얼어붙을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그 때문에 경비병들이 집 안에 꼼짝 않고 갇혀 있었던 모양입니다.우리가 관문 한복판을 지나왔는데도 우리가 지나가는 것을 눈치 채거나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위험을 모면하고 나서는 별로 큰 어려움 없이 서울까지 갔습니다.

서울에서 하루를 묵고 나서, 그때 충청도에 머물고 계시던 주교님을 뵈러 길을 계속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중병을 앓고 계시는 다블뤼 신부님께 가서 병자성사를 집전해드려야 했습니다. 그런 다음 주교님께로 가서 보니 주교님도 열병을 앓고 계셨습니다. 저는 하루 동안 주교님과 담화를 나눈 후 잠시도 휴식을 취하지 못한 채 곧바로 전라도에서부터 공소 순회를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의 보호를 받아 저는 6개월 동안에 5개 도를 무사히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두 군데에서만 약간의 위험을 겪었습니다.
한 곳에서는 어떤 작은 마을에 여교우 3명만이 있었는데 외교인인 부모들과 남편들과 함께 역시 외교인들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방문하려고 미사 가방을 챙겨가지고 선교사를 데리고 저녁 무렵에 아주 초라한 집에 가서 머물렀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이 제가 그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서양 사람인 줄로 의심하고 즉시 마을 이장에게 달려가 알렸습니다. 마을 이장이 그날 밤 안에 저를 잡아 죽일 의논을 하자고 그 마을의 모든 연장자들을 소집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우리는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 있었고 도망칠 수도 없었습니다.

온 마을이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으므로, 우리가 도망을 친다면 우리뿐 아니라 우리가 들었던 집에 대해서도 마을 사람들의 성을 돋우어 광분하게 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보호 아래로 달려들고 하느님의 뜻에 모든 것을 온전히 맡겼습니다. 외교인들의 고함 소리에 조금도 개의치 않는 체하면서 밤새도록 저들이 쳐들어오기만 대비하고 그곳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버텼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의견이 서로 엇갈려 우리가 아침에 그 마을을 떠나가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그 세 여교우들을 만날 수가 없었고 이 때문에 의기소침한 그들을 외로움 속에 버려두고 떠나왔습니다.

또 한 곳은 거의 2백 명이나 되는 신자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공소사목을 시작한 지 사흘째 되던 날 마을 이장에게 제가 여기 있다는 것이 알려졌습니다. 그 이장은 자기 마을에 서양 사람이 와 있다고 마을 사람들에게 떠벌리면서 마침 바로 그 시각에 제가 고해성사를 집전하고 있는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는 저에게 점심때부터 밤중까지 욕설과 저주와 협박 공갈을 퍼부었습니다. 그는 제가 아주 고약한 서양놈이요, 프랑스놈이라고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너는 큰 도둑놈이다. 너는 우리한테서 도둑질을 하려고 프랑스에서 온 놈이지? 너희 서양놈들은 사기꾼들이요 프랑스놈들은 선동꾼들이다. 우리를 이렇게 소란스럽게 하고 속이는 것이 너희에게 무슨 이득이 되느냐? 네가 어디 견딜수 있나 보자. 너는 내일 붉은 오랏줄에 꽁꽁 묶여 도둑놈들의 감옥으로 끌려갈 것이다." 등등. 이렇게 그들은 계속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마침내는 제풀에 지쳐서 잠을 자러 갔습니다.

저는 전교사와 공소 회장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한밤중에 일어나서 날이 새기 전에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 전날에 고해성사를 받고 영성체 준비를 한 이들이 미사를 간절히 기대하였는데도 저는 미사도 못 드리고 도망쳤습니다.

성사를 받지 못한 다른 신자들은 다음날 저를 뒤쫓아 백 리나 되는 험준한 길을 불구하고 교우촌까지 와서 성사를 받았습니다. 마을에서 나올 수 없었던 그 밖의 신자들은 실망과 한숨 속에 그냥 내버려졌습니다.

저는 교우촌을 두루 순회하는 중에 지독한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들을 도와줄 능력이 도무지 없는 저의 초라한꼴을 보고 한 없이 가슴이 미어집니다.  저들은 포악한 조정의 모진 학정 아래 온갖 종류의 가렴주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얽히고 설켜서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비참한 곤경에 빠져도 손가락 하나 옴짝달싹할 수 있는 자유조차 없습니다.

동포로부터 오는 박해, 부모로부터 오는 박해, 배우자로부터 오는 박해뿐 아니라, 친척들과 이웃들로부터도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험준한 산 속으로 들어가 이루 형언할 수 없이 초라한 움막을 짓고 2년이나 3년 동안만이라도 마음놓고 편안히 살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처럼 관에 찬 예를 한두 가지 들어들리겠습니다.
어떤 양반집 출신의 처녀가 열다섯 살 때에 천주교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처녀는 천주교를 봉행할 마음이 간절하나 자기 아버지 집에서는 종교를 실천할 수가 없기 때문에 집에서 도망쳐 나와 교우들을 찾으러 가던 도중에 길에서 어떤 외교인 남자에게 납치를 당하여 억지로 그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 납치자의 집에서 12년 동안 살았으나 자기 부모한테도 어느 교우한테도 아무런 소식도 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나 다시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었으나 어디로 도망가야 피신처를 찾아낼 지 몰랐고, 또 혹시 도망치다가 다른 납치자의 손에 떨어질 위험도 있었습니다.

우연히 교우 하나가 외교인 친구가 이 여인에 관하여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의 친척으로 가장하여 그 여자를 찾아가서 여러 가지로 위로해주고 천주교 교리와 기도문을 배우라고 책 몇 권을 구해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에게 성사를 받게 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저는 또 양반집 출신인 안나라는 여교우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여자는 19년 동안 철저한 외교인 집안에만 갇혀 지내면서 신자들과 연락을 하지 못했고, 따라서 성사를 받지 못한 채로 지냈습니다.

바로 올해에 그 여인은 친척되는 어떤 신자에게 소식을 전할 수가 있어서, 이 신자가 안나를 찾아가서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안나가 사는 집에서50리 떨어진 공소집에 있었습니다.
그 신자가 저를 찾아와서 안나가 얼마나 열심하고 또 얼마나 간절하게 저를 기다리며 또 철저한 외교인 집안에서 얼마나 처량한 처지에 있는지를 얘기해주었습니다. 마을 전체가 온갖 미신을 숭상하는 곳에서 혼자서도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신자의 본분을 조금도 궐한 적이 없었답니다. 끊임없이 성사 받기를 간절히 원하며 자기에게 사제 한 사람을 보내주시기를 하느님께 줄기차게 애원하여 기도하였답니다.

안나는 외로움을 스스로 달래느라고 가끔 유럽에서 생산한 자그마한 천 조각을 집어들고 들여다보면서 유럽과 선교사 신부님들을 생각하곤 하였답니다. 그 물건이 유럽에서 운반되어온 것이니만큼 머지않아 선교사 신부님들도 다시 올 것인즉, 언젠가는 신부님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위로했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그냥 참고 지낼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이 충실한 여교우에게 가까이 가서 성사를 집전해줄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으나 저는 온전히 하느님의 자비를 의지하고 안나의 진심을 신뢰하였습니다. 지극히 착하신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서 마침내 그토록 간절한 안나의 애원을 불쌍히 여기시어 그처럼 충실한 당신의 여종에게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집전해줄 수 있는 방법을 제게 알려주시리라고 희망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유일한 위로인 성체를 모시고 저에게 안나의 얘기를 들려준 그 신자를 데리고 허둥지둥 서둘러 황급히 안나가 사는 마을로 달려갔습니다. 그 마을 전체가 외교인들이었고 그 집안 식구들도 모두 외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런즉 고해소를 꾸밀 곳도 마땅치 않았고 성체를 안치할 만한 마땅한 장소가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저는 마치 길 가다가 피곤하여 노독을 풀고 뜨거운 햇볕을 피하기 위해 잠깐 쉬는 것처럼 강가의 나무 그늘에 앉아서 기다렸습니다. 그러는 한편 제가 그 여인을 상면할 만한 장소를 찾을 수 있는지 알아보도록 저의 동행하여 온 그 신자를 정탐으로 보냈습니다. 그 신자가 안나의 집에 들어가 보니 그 집 남자들은 모두 밭에 나가서 집 안에는 어른이 아무도 없고 안나 혼자 자기 딸과 어리아이 몇 명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 신자는 그 열심한 여교우가 성찰한 것을 적은 쪽지를 저에게 가져왔습니다. 저는 앉은 자리에서 그것을 읽고 즉시 안나의 집으로 들어가 안나를 바깥 사랑방으로 불러내어 재빨리 사죄경을 염해주고 성체를 영해준 다음 곧바로 도망치다시피 나왔습니다. 그때 저는 아주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최상의 감사를 드리면서 빠져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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