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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최양업신부의 여덟 번째 편지 (3)

1847년에 페레올 주교님께서 1839년 박해 때에 순교한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을 기록한 작은 책 한 권을 저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이 책은 신자들이, 특히 앵베르 주교님의 명을 받은 현석문(玄錫文) 카를로가 수집한 것을 벨린 명의의 (페레올) 조교님이 (프랑스어로) 저술한 것입니다. 앵베르 주교님은 현석문에게 순교자들의 행적을 정확히 수집하도록 특별히 분부하신 다음 당신도 순교하셨습니다.

이 책은 여러 신자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수집한 것입니다.

그 이야기들은 대체로 목격 증인들이 별로 없는 것이지만 그 중에 진실로 여겨지는 것만 추려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대체로 목격자들이나 증인들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이 작은 책의 끝쯤에 가서는 많은 순교자들의 행적이 간략하게 기록되거나 어떤 것은 아예 몽땅 빠졌습니다. 그 이야기들 중에는 완전한 역사를 위해서나 신자들의 교화를 위하여 재미있고 중요한 것이 적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 밖의 것에 대하여는 아직 충분히 흡족할 만큼 조사하거나 더 정확히 심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느님의 자비로 오랫동안 서원으로 맹세했던 대로 저의 동료들에 대하여 더욱 주의 깊게 고찰하고, 조상들의 순교 사실을 더욱 세심하게 조사하지 아니하고서는 도저히 스스로를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위에 언급한 순교록에 보면 저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매우 정신차려 기록되어 있는 반면 저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페레올 주교님께서 보내주신 순교록을 중국에서 처음 읽었을 때 조국에 돌아가면 신부님들께 그 보고서에 관하여 더 정확히 써드려야겠다고 진작부터 별렀습니다.

조국으로 돌아온 저는 우선 명확한 개념을 정립하려고 힘썼습니다. 그러나 성무를 집행하느라고 항상 바빠서 전혀 조용한 짬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들께 이 문제에 대해서 아무것도 써보내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금년에는 하느님의 허락하심으로 다행히 연례 공소 순회를 일찍 마쳐서 잠시 동안 휴가를 얻었습니다. 제게 주어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렵니다. 순교자들의 행적을 여러 증인들의 말을 토대로 하여 정확한 진실을 기록하려 합니다.

저의 형제들과 친척들과 이웃 사람들이 제공한 증언들도 포함하여, 순교자들과 함께 살았던 증인들, 또한 순교자들과 함께 감옥에서나 형벌을 당할 때 함께했던 동료들로부터 들은 증언들, 그리고 순교자들이 순교하기 전에 살았던 생활에 관한 증언들을 가능한 대로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고 충실하게 서술하도록 제 능력껏 힘쓸 작정입니다.

이 삼처리 강토를 아름답게 꾸민 수많은 순교의 꽃들 중에서 어느 꽃다발을 먼저 신부님께 드릴까요? 자식된 도리로 보나 신부님의 관심사로 보나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하여 우선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당연할 줄로 압니다.

저의 아버지는 최경환 프란치스코이고 저의 어머니는 이성례 마리아 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고결하고 부유한 신자 부모한테서 출생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아버지 (최인주)는 첫번째 박해(1791년) 때 많은 고초를 받은 후 석방되었습니다. 그는 순박했고 신심이 뛰어났습니다. 가난한 친척들과 이웃들에게 미리 알아서 구제의 손길을 펼치는 자세도 유별났습니다. 자기 집 종들에게 자기들을 영감님이나 마나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아버지와 어머니라 부르라고 명하였습니다.

그가 죽으면서 세 아들에게 3가지 유언을 남겼습니다. 서로 무엇을 줄 때 거저 주어라.

보증을 서거나 혼인 중매를 절대로 서지 말아라. 이웃들과는 항상 화목하게 지내라는 3가지였습니다.

1801년 박해와 주 야고보 신부님의 순교 후 최 프란치스코의 집안은 재물과 비신자 친척들과 상종함으로 점차 천주교 계율 준수의 열심이 식어 갔고 쾌락과 악습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천성적으로 진정한 신앙의 실천자였고 정직과 순박을 애호하면서도 강력한 성품을 타고났습니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세속의 오락을 경멸하고 오로지 천주교교리를 듣거나 읽는 것만을 즐거워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나이가 많아지면서 자기 가족의 신앙심이 냉담해진 것 때문에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부모와 형제들을 권고하여 고향과 재물을 버리고 고향 마을을 떠나서영혼을 구원하기 편한 곳으로 이사하자고 졸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아무 소용이 없자 한층 더 용감한 행동을 시도하여 혼자 집을 떠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집에는 모친과 세 형제와 누이들과 아내와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긴 편지를 써서 집안의 한 아이에게 주면서 자기가 떠난 후 엿새 되는 날에 펴보라고 하더라고 일러두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신앙을 열심히 실천하고 교리에 더 밝은 신자들을 찾아 집을 몰래 빠져나왔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집에서 안 보이자 가족들이 수선을 떨며 찾는 바람에 아이가 프란치스코의 편지를 내보였습니다. 프란치스코의 형제들이 그 편지를 읽자 온 집안 식구가 대성통곡하였고 대책을 세울 수가 없어서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모든 형제들이 프란치스코를 찾아 나서서 그를 데리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가족 전체가 만장일치로 합의하여 고향과 친척과 재산 등을 모두 버리고, 25명이나 되는 가족 전부가 왕도(서울)로 이사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집에 신자들이 너무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3년이 지나자 이웃 사람들한테 신자집이라는 것이 탄로되어 관가에 붙잡혀갈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친지 중에 세력있는 고관들이 프란치스코 집안을 외교인들의 술책으로부터 구출하려고 세도와 압력으로 그들의 주동자를 중하게 처벌하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제안을 들은 프란치스코는 악을 악으로 갚거나 박해자들을 폭력으로 격퇴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합치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여 친지의 도움을 사양하고 산 속으로 피신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의 가족은 이 산골에서 저 산골로 이사다니면서 그들의 손으로 가시덤불과 돌자갈밭을 개간하여 연명해나갔습니다. 그들은 과거에는 부자였으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진하여 이러한 궁핍과 재난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모범을 더욱 철저하게 따르는 거이라는 사실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만족해하며 살았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 서원으로 나날이 더욱 열심하여 졌습니다. 비록 한문 교육을 별로 받은 바가 없었으나, 자주 깊이 묵상하고 신심 독서를 함으로써 열렬한 애덕과 하느님 신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얻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열변과 달변으로 천주교 진리를 강론하거나 강의를 하였기 때문에 박학한 신자들이나 유식한 사람들까지도 그의 강론을 들으러 왔고, 매우 까다롭게 꼬치꼬치 따지는 비신자들까지도 그의 변론에 설복되어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밭에서 일할 때나 집에서 일할 때나, 길에서 누구와 담화를 할 때나 항상 천주교 교리와 심신 사정에 대한 이야기만 하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꾸밈없이 순박하게 그리고 몸짓을 해가면서 힘차게 말하는지 듣는 사람은 누구나 탄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육신을 가꾸는 일이나, 세속적인 평판이나 세속적 관심이나 현세적인 사정에 대해서는 전혀 도외시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의 열정은 이웃에 대한 애틋한 동정심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장을 보러 갈 때에는 물건 중에서 제일 나쁜 것이나 흠있는 것을 골라 사옵니다.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나무라는 사람들에게는 "제일 나쁜 물건을 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런 사람이 없으면 이 불쌍한 장사꾼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소? "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같은 그의 애덕은 자라나서 재난이 닥쳤을 때는 영웅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어느해 추수할 무렵 굉장한 폭우가 쏟아져서 곡식을 다 잃게 되었습니다. 모든 이가 그러한 재난을 당하여 눈물로 탄식하며 실망하고 있을 때에 프란치스코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평온한 얼굴을 보여주었고 오히려 평소보다 더 명랑하여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기는 교우들에게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절망에 빠져 있고 이처럼 비탄에 잠겨 있습니까? 모든 일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까? 세상 일이 다 하느님의 안배대로 되는 것임을 왜 믿지 아니합니까? 우리의 탓과 게으름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면 모르거니와 하느님의 섭리로 추수를 망친 것인데 슬퍼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흉년이 되면  프란치스코는 주변에 사는 가난한 이들을 백방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과일을 추수할 때가 되면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남들이 탄복할 만큼 형제들과 화목하게 살았고, 어머니에 대해서는 가장 다정한 효도로 섬겼으며, 아랫사람들에 대해서도 자상하게 보살펴주었습니다.

매일 규칙 생활을 하면서 아무리 바쁜 날이라도 신심 독서를 중단하지 아니하였고 아침 저녁 기도를 가족 모두와 함께 공동으로 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안양의 수리산) 교우촌의 회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839년에 박해가 일어났을 때 서울에서는 많은 순교자들의 시체가 유기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울과 인근 지방에 살던 신자들은 박해를 피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피신하였습니다. 신자들은 박해와 기근으로 굶주림에 시달리고 지쳐서 순교자들의 시체를 수습하고 매장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때 프란치스코는 서울에서 50리 떨어진 자기 마을에서 신자들을 권고하여 의연금을 거두고 그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많은 순교자들의 시체를 찾아 매장하고, 또한 불쌍한 교우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자기 마을 신자들에게도 순교를 준비시킬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신자들을 모아놓고 열성적인 말로 격려하면서 용감히 순교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이 거룩한 의무에 전심하고 있던 어느날 아직 날이 밝기 훨씬 전에 포졸들이 문밖에 와서 주인을 찾으므로  프란치스코가 그들 앞으로 마중 나가며 "어디서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포졸들이 "서울서 왔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프란치스코는 "어째서 이리 늦게 오셨습니까? 우리는 오래전부터 초조하게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준비가 다 되었으니 아무 염려 마십시오. 아직 동이 트질 않았으니 잠시 좀 쉬시고 새벽에 식사를 해서 기운도 돋우도록 하십시오. 그러고 나서 질서 정연하게 떠나도록 합시다."

프란치스코가 이렇게 반갑게 맞이하는 말을 들은 포졸들은 감탄하여 "이 사람과 이 가족들이야말로 진짜 천주학쟁이다. 이런 사람들이 달아날 염려는 조금도 없다. 우리는 안심하고 잠을 좀 잘 수 있겠다." 고 말하고는 교우들을 묶지 않고 풀어놓은 채 모두가 한적한 곳에 가서 깊이 잠들었습니다.

그 동안에 신자들은 감옥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고, 프란치스코는 모든 신자들을 권면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한편 마리아는 포졸들에게 줄 밥상을 차렸습니다. 포졸들이 잠에서 깨어나서 식사를 마치자 프란치스코는 장롱에서 옷을 모두 꺼내어 포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 입혀주었습니다.

어른부터 어린이까지 40명이 넘는 남녀 신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다음 오랏줄에 묶이지 아니한 채 길을 떠났습니다. 앞에는 남자들이 큰 아이들을 데리고 걷고 그 뒤에는 여자들이 젖먹이들을 등에 업고 걸었습니다.

때는 마침 7월이라 찜통같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작열하는 뙤약볕 아래 걸어가자니 이내 모두가 지쳐버려 일행은 노인이거나 젊은이거나 터벅터벅 느릿느릿 걸을 수밖에 없었고, 지쳐빠진 어린이들은 울음보를 터뜨렸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앞정섰고 그 다음에 일행이 뒤따랐으며 포졸들은 맨 뒤에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신기한 구경거리가 되고도 남았습니다. 길을 가는 동안 내내 구경꾼들이 이 기이한 한 무리의 행진을 보고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사람도 있었고 혹은 불쌍하다고 혀를 차며 한숨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열 맨 앞에 서서 가던 프란치스코의 목소리는 이런 요란스러운 모든 소음을 덮어버리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 용솟음치는 용맹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는 큰 목소리로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이여, 용기를 냅시다. 이 정도의 여행을 힘겨운 고난으로 여기지 맙시다. 주님의 천사가 황금으로 만든 자를 가지고 우리의 모든 발걸음을 재고 계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장을 서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고 갈바리오 산으로 올라가시는 것을 생각합시다." 하고 격려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줄곧 일행을 돌아보면서 더욱 열렬한 목소리로 격려하기를 계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열렬한 애덕에서 나온 격려의 소리를 들으며 교우들은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서울 가깡이에 이르자 포졸들이 신자들을 5명씩 오랏줄로 묶었습니다. 5명씩 한 무리가 되어 서울 한복판 큰 길을 지나 감옥으로 향해 갔습니다.

이렇게 오랏줄에 묶인 여인들은 어린애들을 업거나 팔에 안고 갓난아기들에게는 젖꼭지를 입에 물린 채 끌려 갔습니다. 이처럼 처절한 광경을 보는 구경꾼들은 증거자들에게 악담을 퍼부으면서 몽둥이를 휘두르고 돌을 던졌습니다. 외교인들 중에는 너무나 끔찍하게 여겨 "이 몹쓸 모진년들아, 이 인정사정 없는 독한 년들아, 그 연약하고 애처롭고 귀여운 어린 것들을 데리고 어떻게 죽음을 자청하러 간단 말이냐?" 하고마구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아내 마리아와 다섯 아들과 함께 갔는데, 큰아들인 야고보가 열 네 살이요 막내가 겨우 두 살이었습니다.

마침내 옥 문이 열려 저의 가족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런 악담을 벗어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옥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들은 도둑들과 무서운 쇠사슬이었습니다. 감옥으로 인도된 그들은 도둑들의 감방으로 투옥되었습니다.

이튿날부터 프란치스코는 맨 먼저 법정으로 끌려나가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판관들이 그에게 배교하라고 다그치자 그는 심문하는 자에게 "이 세상에서 자기 주인에게 불충실한 것도 흉악한 범죄이거늘 하물며 천지 만물의 주인이신 대주재(大主宰) 하느님을 어떻게 배반하라고 하십니까? 저는 결단코 배교는 못하겠습니다." 고 대답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이렇게 대답하자 팔주리와 다리주리의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팔과 다리뼈가 어그러졌고 곤장을 110대나 맞아 온몸의 살이 한치도 성한 데가 없이 뭉그러지고 피범벅이 되어 의식을 잃은 채 감방으로 운반되어 왔습니다.

이 삼처리 강토를 아름답게 꾸민
수많은 순교의 꽃들 중에서
어느 꽃다발을 먼저 신부님께 드릴까요?  

아아 신부님!!  안녕하세요
하늘에서 주님과 함께
저희를 비추시는  빛이시여  
오늘 사순절을 시작하며
저희를 돌아봅니다

신부님!! 이땅에 오늘을 살아가는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물질주의 개인주의 상대주의 속에서  
갈팡 질팡하며  유혹과의 힘겨운 싸움에서
저희 불쌍한 영혼들은 신부님의 편지로  큰위로를 받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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