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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홍영주 바오로

2018.11.16 13:18

기도방지기 조회 수:99

부모님들이 이 형제에게 유산으로 남겨준 것은 

오로지 천주교 신앙과 결실한 학식뿐이었다. 

그들은 이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여 항상 서로 권면하고 

성실히 봉행하여 훗날 천주교회에 영광을 안겨다 주는 변화를 가져왔다.

 

성령님 흘러넘치는 은총의 보고여 !

저희를 가르치시어 고통의 가치를 깨닫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저희가 성 호영주 바오로를 본받게 하소서 !

성 홍영주 바오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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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위 성인 약전] 성 홍병주와 성 홍영주 형제

 

 

성인 홍병주 베드로와 홍영주 바오로는 형제사이로 그들은 언제나 함께 생활하고 고통을 참아냄으로써 끝까지 순교의 영광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문헌상에서 볼때도 그들은 어디에서나 동일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베드로 형제는 매우 오랫동안 천주교를 신봉해 온 유명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純祖1)의 신유교난(辛西敎難)때 순교한 홍낙민(洪樂敏) 루까는 그들의 조부였으며, 1840년(憲宗5)1월 4일(陰 1839년 11월 30일)전주(全州)에서 참수당한 홍재영(洪梓榮) 쁘로따시오는 그의 삼촌이었다. 부친은 신유교난의 박해를 당한 이후 충청도 내포(內浦)지방에 있는 서산(瑞山)의 여사울이라는 고을로 이사하여 천주를 봉행하고 있었다. 

 

부모님들이 이 형제에게 유산으로 남겨준 것은 오로지 천주교 신앙과 결실한 학식뿐이었다. 그들은 이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여 항상 서로 권면하고 성실히 봉행하여 훗날 천주교회에 영광을 안겨다 주는 변화를 가져왔다. 모범적인 신자로서 그들 형제는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었으며, 이에 모두 회장(會長)에 임명되어 열성적으로 신자들을 보살피게 되었다. 약한 사람들을 격려하며 신입 교우들에게는 교리를 가르쳐 주고 병자들은 진심으로 간호하였으며, 그 남은 시간도 모두 남들을 위한 자선도 모두 남들을 위한 자선사업에 헌신하였다. 당시 조선에 입국하여 있던 모방(Maubant) 신부와 샤스땅(Chastan) 신부는 그들의 재주와 열성(熱誠)에 감격하여 여러 차례 중요한 일들을 맡기기도 하였다. 

 

1839년 기해교난(己亥敎難)의 박해가 시작되어 선교사들이 피신을 할 때 베드로 형제는 선교들을 집에 모시고 보살펴 드렸다. 

 

물론 이렇게 은신처를 제공한 것이 발각되면 목숨을 잃는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면서도 순교를 각오하고 행한 일이었다. 과연 조정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배교자 김 여상은 어떻게 해서든지 체포해야 할 대상자의 명단에 그들 형제의 이름을 적어 놓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들을 체포하여 포청(捕廳)으로 압송하기에 이르렀다. 포장은 그들 형제를 공범이라 하여 보다 가혹한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하고 교우들의 일을 대라고 독촉하였다. 그들은 혹형의 고통을 참아내면서 교우들을 절대로 고발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하느님을 배반하는 말은 한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포장은 이들 형제의 신앙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들을 형조(刑曹)로 이송하였다. 당시 형조판서 홍명주(洪命周)는 그들 형제의 친척이었는데, 그는 마음속으로는 천주교인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자신의 관직에 어떤해가 올까 염려하여 나타내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부하들에게 그들을 신문할 권리를 넘겨주면서 어떻게든지 그들을 배교시키되, 사형은 언도하지 말라고 명하였던 것이다. 어떤 기록에는 그가 친척 중 외교인 한명을 시켜 옥에서 고생하는 베드로 형제를 방문하고 돈을 주어 도와주도록 하였다고도 한다. 판서의 명령이 있자 부하들은 형리들을 시켜 갖가지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그들을 배교시키려고 하였다. 

 

한편으로는 온갖 유혹의 말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려 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가혹한 형벌을 가함으로써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그들 형제는 신앙심을 버리지 않고 오직 순교의 의지만을 나타내었다. 이에 형리들은그들과 같은 옥에 있는 도적과 살인범들로 하여금 포악하게 다르도록 하기도 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형조에서도 베드로 형제의 마음을 굽히게 하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 형제에게 사형을 내리게 되었으니, 이제 그들은 오랫동안 바라왔던 순교의 영광을 누리게 된것이다. 

 

당시 형조에서는 사형선고에 대한 허락을 청함에, 『홍병주는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교리를 배운만큼 가장 깊이 그것에 빠져 있었으며 동생 홍영주는 천주교 교리를 가도(家道)처럼 여기고 십자가상을 가리켜 대군(大君)이라 섬기면 죽을지언정 배교할수 없노라고 했습니다』라는 내용으로 보고를 하였다. 다만 한 가족을 같은날 처형할수 없다는 법률에 따라 베드로는 1840년 1월 31일(陰 1839년 12월 27일)에, 그리고 바오로는 이튿날에 각각 당고개(堂峴)에서 참수당해야만 하였다. 이때 형 베드로의 나이는 42세였고 동생 바오로의 나이는 39세였다.

 

[가톨릭신문, 1984년 11월 25일, 김옥희 수녀(한국순교복자회ㆍ오륜대순교자 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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