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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이인덕 마리아

2018.10.24 19:52

기도방지기 조회 수:210

포청에 잡혀온 이 마리아는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무척 고생하였음은 물론이요,

잔악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뜻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나는 교우요, 죽는 날까지 교우로 있겠습니다.

 

 

 

성령님 타오르는 사랑의 불가마여 !

저희를 가르치시어 지혜와 인내로써 살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

주님  저희가  성녀 이인덕 마리아를 본받게 하소서 !

성녀 이인덕 마리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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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이인덕 마리아(Maria)는 1839년 12월 29일에 순교한 이영덕 막달레나(Magdalena)의 동생으로 할머니

조 바르바라(Barbara)에게서 천주교의 진리를 배워 어머니와 언니와 함께 입교하였다. 이들 세 사람은 그녀의

부친이 너무나 완고하고 또 천주교를 적대시했기 때문에, 부친이 지방으로 여행을 떠난 틈을 이용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이 사실을 안 부친은 더욱 엄해졌고, 더욱이 언니 이 막달레나의 혼인 문제로 심각한 상태에

이르자, 어머니와 언니와 함께 집을 뛰쳐나와 어느 신자 집에 숨어 살게 되었다.

   처음에 이 소식을 들은 주교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였으나, 양반집 주인과 처녀들이 도망을 쳤다가 집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 죽음의 길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고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그들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고 회장들에게 부탁하여 그들을 보살펴 주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조금마한

집 한 칸을 얻어 거기서 살게 되었으나 굶주림과 추위로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 놓고 천주교를 신봉하게 되었으므로 곤궁과 고통은 별로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수계생활에만 전념하였다. 또 그들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자 하는 한결같은 마음과 원의로 주교가 체포되면 함께 자수키로 하였으나, 자수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말았다. 기해년 7월 어느 날 포졸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붙잡혔기 때문이다.

   포청에 잡혀온 이 마리아는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무척 고생하였음은 물론이요, 잔악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뜻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형조로 이송된 후 또다시 그녀의 항구심을 꺾어보려고 새로운 고문을 가했으나 모두가 쓸데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교우요, 죽는 날까지 교우로 있겠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형조판서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녀는 언니인 이 막달레나가 사형선고를 받고 순교한 1개월 후인 1월 31일, 서울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아 치명하여 언니와 함께 동정과 순교의 두 가지 영광을 얻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22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당고개 순교지

 

성지 정문.당고개 순교지는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성지이다. 한국 교회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에서 41명의 순교자들이 목숨을 잃은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이곳 저자거리를 중심으로 하던 장사치들은 음력설 대목장에는 처형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서소문 밖 형장을 피해 조금 한강가로 나간 곳이 당고개이다. 원효로 부근 만초천(蔓草川) 변에 위치한 이곳은 1840년 1월 31일과 2월 1일 양일에 걸쳐 10명의 남녀 교우들이 순교함으로써 기해박해를 장엄하게 끝맺은 거룩한 곳이다. 특히 이들 가운데 어린 자식을 거느린 세 어머니는 천주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서 모성애까지도 초월하고 순교의 월계관을 차지했다.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 중에서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홍병주 베드로와 홍영주 바오로 형제, 손소벽 막달레나, 이경이 아가타, 이인덕 마리아, 권진이 아가타, 이문우 요한, 최영이 바르바라 등 9명이 성인품에 올랐다. 하지만 당고개의 순교자이면서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의 부인이요,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어머니인 이성례 마리아만은 시복 조서에서 제외돼 성인품에 오르지 못했다.
 
기해박해 순교자의 시복 조서를 꾸밀 때 왜 이성례 마리아를 제외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가 옥에 갇혀 있을 때 젖먹이 자식이 아사(餓死)를 당함으로써, 나머지 네 아들의 목숨만이라도 살리겠다는 일념에 잠시나마 배교를 범함 때문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본래 부모와 함께 어린 아이를 투옥시키는 일은 국법에도 없었으나 큰아들 최양업을 사제로 봉헌하기 위해 외국에 유학 보낸 이 집에 대해서는 예외였다. 어머니와 함께 옥에 갇힌 아이들은 국법에도 없는 일이라 밥도 나오지 않고 어쩌다 한 덩어리 밥이 나오면 어린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굶기 일쑤였다. 세 살짜리 막내는 그나마도 얻어먹지 못해 빈 젖을 빨다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어린 자식의 죽음을 눈앞에서 당한 어머니는 자칫 네 자녀를 모두 죽이고 말 것만 같아 짐짓 배교하겠노라고 하고 옥을 나왔다. 지극한 모성애와 극도의 슬픔 속에서 그는 어쩔 수 없는 인간적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성례 마리아는 아이들과 문전걸식으로 목숨을 부지하다가 남편 최경환이 홀로 감옥에서 겪을 고통을 생각하고 아이들이 동냥 간 사이 다시 남편 곁으로 돌아와 다시금 갇힌 몸이 되었다.
 
한옥 성물방 앞에 설치된 성모자상.6세부터 15세까지 네 형제가 부모를 가둔 옥에 찾아와 울부짖자 철이 든 맏이 희정은 어머니가 다시 배교할 것을 우려해 어린 동생들을 달래 발걸음을 돌렸다. 그 후 동냥한 음식을 틈틈이 부모에게 넣어 주면서 이성례가 참수되기 하루 전 어린 형제들은 동냥한 쌀과 돈 몇 푼을 들고 희광이를 찾았다. “우리 어머니가 아프지 않게 한칼에 하늘나라에 가도록 해주십시오.” 이에 감동한 희광이는 밤새 칼을 갈아 당고개에서 그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먼발치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본 어린 4형제는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용감한 어머니의 순교를 기뻐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모성을 초월해 순교한 이성례 마리아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던 예전 당고개 성지에 올라서면 한가운데 순교 현양탑이 있고 한쪽으로는 기념제대가 있었다. 이 제대는 여성 순교자가 많이 시성된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6년 서울대교구 가톨릭 여성연합회에서 봉헌하였다. 제대 뒤로 당고개 순교자들을 표현한 청동 부조상에는 열 명의 순교자와 한복 차림의 예수님이 있고, 성지 둘레에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야외제대와 당고개 순교자 기념 청동 부조.그런데 성지를 담당하고 있는 삼각지 본당은 2008년 4월 당고개 순교성지 현지에서 성지 개발을 위한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고 당분간 삼각지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기로 했다. 이는 성지가 포함된 지역 일대가 서울시의 용산 뉴타운 개발, 국제 업무단지 개발 등과 맞물려 대대적인 재개발이 예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삼각지 성당 신자들은 언덕을 깎아내리고 새로 조성될 성지에 뿌리고자 유리항아리에 성지의 흙을 담아 본당에 보관하기도 했다.
 
3년여의 재개발 공사를 통해 당고개 성지는 관내 근린공원과 연계해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이루었다. 공원 명칭 또한 ‘순교 성인의 역사’가 깃든 신계 역사공원으로 변경되어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순교자들의 삶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특히 삼각지 성당 권철호 신부와 한국화가 심순화 씨는 성지 전체를 ‘어머니의 따뜻한 품’으로 형상화해 순교자들의 고통보다 그들이 하늘나라에서 신앙의 후손인 우리를 감싸주는 모성적 사랑을 표현하였다.
 
한옥과 황토토담을 이용해 고층 빌딩 한가운데 고향 마을처럼 포근함을 갖도록 재개발된 당고개 성지는 2011년 9월 4일 정진석 추기경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신계 역사공원(1만 5000㎡) 내에 있는 성지는 대지 1752.2㎡, 총건평 1252㎡로 지하 1층에 성당과 전시관, 사무실이 자리하고 있다. 잔디 광장인 지상 1층에는 당고개 순교자들을 표현한 청동 부조상과 야외 제대, 십자가의 길, 한옥 성물방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성당은 제대 뒤 하얀 벽을 중심으로 옅은 황토색 벽과 한지를 이용한 색유리의 은은한 조명, 나무 바닥으로 인해 들어서는 이들에게 어머니의 따뜻한 품에 안기는 느낌을 주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4년 8월 19일)]
 
잔디광장 모습. 가장자리 황토담에 당고개에서 순교한 10위의 순교자 부조가 모자이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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