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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조증이 바르바라

2018.04.15 15:01

기도방지기 조회 수:127

만 번 죽어도 나는 천주를 배반할 수 없고

 

성령님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여 !

저희로 하여금 저희의 잘못을 알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주님 저희를 불상히 여기소서 !

주님  저희가 성녀 조증이 바라나바를 본받게 하소서 !

성녀 조증이 바르나바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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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교난(己亥敎難)이 일어난 1839년의 마지막 순교 성인들은 12월 29일에 참수(斬首)되었다. 이성인들은 모두 일곱명으로 이미 여러 달 전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어왔으며 특히 그 이전에, 혹은 그 이후에 그들과 마찬가지로 성인에 오른 가족들과 天上에서 자리를 함께 한 사람들이었다. 

 

성녀 조증이 바르바라는 1839년 9월 22일에 순교하여 성인이 되었던 남이관(南履灌)세바스띠아노의 아내로 1781년(正祖5)에 태어났다. 1830년(純祖30년)에 선종(善終)한 조동섬(趙東섬)유스띠노도 그녀의 집안사람으로 일찍이 옥중에서 고초를 겪은 바가 있었다.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려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고 천주교의 교리를 성실히 지켜나갔다. 

 

열여섯살이 되던 해에 세바스띠아노와 결혼한 바르바라는 아들을 하나 낳았으나 얼마 되지 아니하여 잃고 말았다. 몇 해 후 1801년의 신유교난(辛酉敎難)을 당하여서는 박해자들의 손에 시부모님들을 잃고 남편을 유배지로 보내야만 하는 고통을 맛보았다. 그때 남편을 따라갈 수도 없고 또 아무데도 의지할 곳이 없었던 그녀는 친정으로 내려가 남동생의 집에서 살았다. 

 

당시 조선에는 신부가 한분도 없었기 때문에 신부도 만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교우들과도 내왕이 없어 항상 냉담(冷淡)한 생활을 하였다. 

 

설흔살이 되던 해에 서울로 올라간 바르바라는 열심인 친척 교우의 집에 머물면서 이전의 허송세월을 보충한다는 생각으로 보다 열심히 신앙을 지켜 나가고 착한 일에도 종사하였다. 또한 성인 정하상(丁夏祥)의 가까운 친척이었던 그녀는 바오로가 선교사들을 모셔 오기 위하여「北京」으로 가는 계획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였다. 유방제(劉方濟)신부가 조선에 입국하고 또한 1832년에 남편이 유배형에서 풀려나자, 그녀는 남편과 함께 열심으로 신부를 보살펴 드렸다. 유 신부가 중국으로 돌아간 후 스스로 자그마한 집 한 채를 구하여 이사하였고 앵베르(Imbert)주교와 모방((Maubant), 샤스땅(Chastan)신부를 자신의 집에 영접하였다. 

 

그리하여 그녀의 집은 교우들이 와서 기도하고 미사에 참여하는 강당이 된 적이 여러 번이나 있었다. 당시 그녀는 항상 교우들에게『박해가 일어나면 우리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죽음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하며 이것이 천주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의 영혼을 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라고 말하며 순교만이 영광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이야기하였다 한다. 과연 이러한 그녀 자신의 말은 곧 실천으로 옮겨지게 되었으니 이는 그녀의 신앙심이 바로 순교의 길과 통하였던 것이라 하겠다. 

 

기해교난이 한창이던 7월에 바르바라는 체포되어 포청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남편 세바스띠아노는 시골에 내려가 숨어 있었다. 

 

포장은 바르바라에게 남편의 피난처를 고발하고 신앙을 배반하라고 하였으나, 그녀는『만번 죽어도 나의 천주를 배반 수 없고 또 나의 남편이 어디 숨어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하여 포장의 요구를 단연히 거절하였다. 이후 몇 주일 동안 바르바라는 이 문제에 대하여 다섯번이나 문초를 당하였다. 하루는 포장이 혹독한 형벌을 가하며『죽든지 그렇지 않으면 너의 교를 배반하고 교우들을 대든지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택해야 할 것이니 잘 생각하여 보아라』하고 말하였다. 이에 그녀는『잘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차라리 만 번 죽을지언정 죄를 하나라고 범할 수는 없읍니다』라고 대답하여 절대로 배교할 수 없다는 결심을 나타내었다. 천주님께 대하여 충성하고 비밀을 지켰다는 이유로 그녀는 주뢰(周牢)를 틀리고 곤장을 1백80대나 맞았으며, 포청에서 형조로 이송된 후에도 다시 세 차례나 곤장을 맞았다. 

 

바르바라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 중에 그녀의 남편 세바스띠아노도 체포되어 아내보다 못지않은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는 순교하여 천주의 영광을 따른다는 일념으로 어떠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9월 22일에는 참수되어 성인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형조의 옥에 있던 바르바라는 결국 사형의 판결을 받기에 이르렀다. 사형집행일이 되자 옥에 갇혀 있던 모든 여교우들은 그녀와 헤어지는 것을 몹시 섭섭해 하였다. 바르바라는 그들을 위로하며 신앙을 증거 하는데 끝까지 굳건하라고 격려한 후 즐거이 서소문밖의 형장으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성인의 자리에 오르는 참수를 당하니, 때는 1839년 12월 29일이었으며, 그녀의 나이는 58세였다.

 

[가톨릭신문, 1984년 9월 2일, 김옥희 수녀(오륜대순교자 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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