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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이 아가다

2018.07.03 09:11

기도방지기 조회 수:171

 

굶주림과 목마름, 거듭되는 고문, 

3백대 이상이나 되는 태장(笞杖)과 곤장(棍杖) 90대를 맞아야만 하였다. 

 

그동안 형리들이 그녀에게 부모님들은 배교하고 석방되었다고 하자 

녀는『저의 부모님이 배교하고 안하고는 그분들의 일입니다. 

저는 제가 항상 섬겨온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읍니다』

 

 

성령님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신분 !

저희를 가르치시어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안에 살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

주님  저희가 성녀 이 아가다를 본받게 하소서 !

성녀 이 아가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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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앞에서 기록한 성인들의 전기내에서도 때때로 언급한 바와 같이, 성녀 이아가타는 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숭고한 용기와 참된 신앙심을 보여줌으로써 당시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다. 

 

그녀의 부친인 이광헌(李光獻) 아우구스띠노는 회장의 직책을 맡으면서 선교사들과 교우들을 보살피다가 기해년 5월 24일에 참수(斬首)되었으며, 모친인 권희(權喜) 바르바라도 남편을 도와 교회 일을 돌보며 신앙생활을 하다가 남편과 함께 체포된 후 9월 3일에 참수된 사람이었다. 이렇듯 순교성인(殉敎聖人)을 부모님으로 둔 덕택으로 아가타는 언제나 성교의 진리를 믿으며 어디에서나 신앙심을 지켜나가는데 보다 큰 힘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본래 아가타의 집안은 1801년의 신유교난(辛酉敎難) 때에 여러 순교자를 낸 광주(廣州) 이씨(李氏) 가문으로 상당히 유명한 양반이었다. 언제부터 그녀의 부모님들이 서울에서 생활하였는지는 정확히 나타나지 않으나, 여러 기록에서 보아 그녀는 1823년(純祖23) 경에 서울에서 출생하였던 것 같다. 한편 그녀의 세속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천주교신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본명인 아가타로만 불렸던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가족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면서 17세에 이르렀을때 기해교난(己亥敎難)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그녀의 집은 남명혁(南明赫) 다미아노 회장의 집과 이웃하여 있었는데 4월 초 어느 날 배교자의 밀고로 포졸들이 들이닥쳐 양쪽 집안 식구들을 모두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포청으로 압송된 아가타는 다미아노 회장의 12세된 아들과 같은 나이어린 자기 남동생과 함께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포장(捕長)은 그들의 부모님들이 너무나 완강하여 신앙심을 꺾지 못하게 되자, 우선 이 어린이들의 마음을 유혹하여 배교시킴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포장은 쉽게 어린이들을 꺾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달콤한 말로 그들을 배교시키려고 하였다. 처음 이러한 시도가 실패하자 그는 포졸들로 하여금 어느 정도 고문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은총의 힘으로 하느님의 양이 된 아가타는 보다 나이어린 동생들을 권면하면서 위협도 약속도 듣지 않고 고문도 무서워하지 않으며 마음을 조금도 흐트리지 아니했다. 

 

포장은 자기네 부모님의 행동과 같은 이 어린이들의 태도를 이상스럽게 생각하였으나, 한편으로 그들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부모들과 함께 형조 (刑曹)로 이송하였다. 이 때 아가타의 할머니와 8세 된 동생도 함께 옥중에 있었는데, 포장이 그들을 아무런 신문도 하지 않고 석방하려 하였으나 그녀의 할머니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가족들과 함께 남아 있겠다고 고집하였다한다. 

 

아가타와 어린이들이 보여준 옥중에서의 행동은 관리들과 밖에 있는 교우들 사이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이매임(李梅任) 데레사의 집에 모여 생활하던 여섯명의 여교우들은 그 어린이들이 고문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던 용기와 숭고한 신앙의 정신을 전하여 들은 후 거룩한 열정이 끓어올라 순교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던 것이다. 특히 아가타는 여러 차례 고문과 형벌을 당하면서도 언제나 명백한 종교의 힘을 나타내었다. 

 

이에 관리들은 아직도 어린아이라고 할 만한 어린처녀가 포장의 명령을 거역하며 혹형에 저항하는 것을 보고는 아가타를 특별한사람으로 생각하였다고 한다. 

 

아가타가 형조의 옥에 갇혀있는 동안 대왕대비(大王大妃) 김씨(金氏)는 왕명을 빌어 벌을 엄격히 적용하여 천주교인들을 판결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이에 형조판서(刑曹判書)는 어린아이들을 형조에서 신문하는 것이 법에 어긋난다는 구실로 아가타와 어린이들을 모두 포청의 옥으로 되돌려 보냈다. 

 

아가타는 눈물을 흘리며 부모님들과 헤어져 있지 않도록 하여 달라고 청하였으나 명령을 어길수는 없었다. 다시 포청으로 이송된 그녀는 그곳에서 굶주림과 목마름, 거듭되는 고문, 그리고 3백대 이상이나 되는 태장(笞杖)과 곤장(棍杖) 90대를 맞아야만 하였다. 그동안 형리들이 그녀에게 부모님들은 배교하고 석방되었다고 하자 그녀는『저의 부모님이 배교하고 안하고는 그분들의 일입니다. 저는 제가 항상 섬겨온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읍니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오로지 자신의 신앙심이 변하지 않음을 나타낼 뿐이었다. 

 

이렇듯 고통 속에서 9개월 동안을 갇혀 있으면서도 아가타는 인내심과 강건함으로 이를 견디어 냈으며 비록 파렴치한 옥졸들 가운데 있었지만 천주의 도우심으로 순결을 지킬 수가 있었다. 그러던 중 마침내 김(金) 데레사와 함께 교수형(絞首刑)을 당하여 순교함에 이르니 이때가 1840년 1월 9일(陰 1839년 12월 5일)로 그녀의 나이는 17세였다.

 

[가톨릭신문, 1984년 10월 21일, 김옥희 수녀(한국 순교복자회ㆍ오륜대 순교자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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