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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2018.08.20 10:29

기도방지기 조회 수:122

형조판서는 부부를 함께 심문하며 여섯 차례나 계속하여

잔인하게 고문하여 그들의 팔 다리를 못 쓰게 만들었다.

10일 후에 형조로 끌려간 그는 다리에 매를 맞아

살점이 떨어져 나갔으나 그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성령님 불혀의 표징이여 !

저희 마음속에 당신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서 !

주님  저희가 성 박종원 아우구스티노를 본받게 하소서 !

성박종원 아우구스티노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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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박종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또는 아우구스티노)는 서울에 살던 중인 계급의 신자 집에서 태어났으며 ‘이선’이라고도 불렀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친절하였으며, 학문에도 뛰어나고 박학하였으므로 주변의 칭찬을 들으며 자랐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극빈한 가운데서 살았으나 자신의 처지를 불평 없이 참아 받았고, 어머니께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며, 교회의 계명도 충실히 지켜나갔다고 한다. 나이가 들자 그는 순교자의 딸인 고순이 바르바라(Barbara)를 아내로 맞이하여 열심한 신앙생활로 모범 가정을 이루는 한편, 그의 박애심과 교리 지식을 활용하여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데 전심하였다.

   그는 가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 주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셨으니 불쌍한 죄인인 나도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괴로움을 당하고 죽으셨으니, 나도 그분을 위하여 괴로움을 받고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면서 순교하려는 뜻을 마음에 새겼다. 또 그는 신자들 중에서 무슨 악습이나 부당한 일이나 중대한 과실을 발견하면 상냥한 말로 그 사람을 회개시키려고 노력하였는데. 감동할 만큼 사랑으로 권고했기 때문에 그의 충고에 거역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리고 그의 온화함이 널리 알려져 신자들은 웃으며 “대관절 아우구스티누스가 성을 내는 것을 언제 보게 될까?” 하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덕과 재능을 즉시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에게 알려졌다. 따라서 주교는 그를 서울의 회장직에 임명하였고, 그는 이 위험한 직책을 열성적으로 수행하여 그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시작되자 포청에서는 그를 첫 번째 체포 대상자로 지목했음으로 그는 자기 집을 떠나 친구의 집에 피신하였으나, 회장의 직분을 다하려는 마음에서 밤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신자들을 찾아보고 그들을 위로하며 용기를 북돋아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8개월을 지내던 중 마침내 10월 26일에 아내와 함께 체포되었다.

   형조판서는 부부를 함께 심문하며 여섯 차례나 계속하여 잔인하게 고문하여 그들의 팔 다리를 못 쓰게 만들었다. 10일 후에 형조로 끌려간 그는 다리에 매를 맞아 살점이 떨어져 나갔으나 그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리하여 그는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그의 죄목은 “천당과 지옥을 마치 확실한 사실같이 말하고, 제사는 헛된 예식이라 하여 저버렸으며, 천주를 충심으로 믿고 공경하여 차라리 죽을지언정 마음을 돌리지 않은 죄”였다. 그는 1840년 1월 31일, 서울에 있는 당고개에서 참수를 당하여 순교하였고, 이때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당고개성지의 모바일용 요약 설명

 

]당고개 순교지는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성지입니다.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장사를 하던 이들이 음력설 대목에 처형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서소문 밖 형장을 피해 조금 한강가로 나간 곳이 당고개입니다. 이곳에서 1840년 1월 31일과 2월 1일 양일에 걸쳐 10명의 남녀 교우들이 순교함으로써 기해박해를 장엄하게 끝맺은 거룩한 곳입니다. 특히 이들 가운데 어린 자식을 거느린 세 어머니는 천주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서 모성애까지도 초월하고 순교의 월계관을 차지했습니다.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 중에서 박종원, 홍병주 · 홍영주 형제, 손소벽, 이경이, 이인덕, 권진이, 이문우, 최영이 등 9명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당고개의 순교자이면서 최경환 성인의 부인이요,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인 이성례만은 성인품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이는 어린 자식들을 모두 죽이고 말 것 같아 배교하겠노라고 옥을 나온 모정의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성례 마리아는 다시 남편 곁으로 돌아와 순교의 칼날을 받았고, 2014년 8월 16일 시복되었습니다.

서울시의 성지 인근에 대한 재개발로 인해 2008년 4월부터 대대적인 성지 재개발 공사를 시행한 당고개 성지는 3년여의 공사를 통해 관내 근린공원과 연계해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공원 명칭 또한 ‘순교 성인의 역사’가 깃든 신계 역사공원으로 변경되어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순교자들의 삶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났습니다. 특히 성지 전체를 ‘어머니의 따뜻한 품’으로 형상화해 순교자들의 고통보다 그들이 하늘나라에서 신앙의 후손인 우리를 감싸주는 모성적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한옥과 황토토담을 이용해 고층 빌딩 한가운데 고향 마을처럼 포근함을 갖도록 재개발된 당고개 성지는 2011년 9월 4일 정진석 추기경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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