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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이경이 아가다

2018.10.11 14:56

기도방지기 조회 수:144

 

다시 잡힌 이 아가타는 무서운 형벌을 받았지만 

그녀의 신앙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불굴의 인내로 형벌을 참아냈다.  

 

 

성령님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는분

저희를 가르치시어  마음을 비우고 평화속에 살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저희가 성녀 이경이 아가다를 본받게 하소서 !

성녀 이경이 아가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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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이경이(아가타)는 천주교를 신봉하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므로 이미 성교의 진리를 알고 있었을 것이나,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어 어렸을 때 행적은 알 수가 없다. 성장하여 내시(內侍)에게 속아서 출가한 그녀는 앵베르 범 주교에게 그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자신의 결혼이 교회법에 어긋하기 때문에 무효라는 허락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남편과 갈리기는 하였으나 친정어머니가 너무 가난해 아가타를 먹여 살릴 수가 없으므로 그녀는 은신처와 먹을 것을 찾아 권진이(아가타)의 집에 몸 붙여 살았다. 이 아가타는 그들과 함께 신심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항상 속죄하는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격려하였다.

 

어떤 배교자가 밀고 하여 1839년 6월 7일 밤에 잡혔는데 포도대장은 그들의 성명을 물은 다음, 같이 잡힌 한 막달레나만 옥에 가두고 권 아가타와 이 아가타는 이웃집에 남겨두고 지키게 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들을 가두지 않고 있는 이유가 밝혀졌는데, 배교자 김여상이 찾아가서 감언이설로 꾀어 함께 도망치려 한 것이었다.

 

포졸들은 김여상의 이러한 태도를 막기 위해 권 아가타와 이 아가타를 풀어주었다. 정부에서는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고 난 다음, 관원을 파면시키고 여러 포졸들을 귀양 보내고 탈옥자들을 잡아오라고 포졸들을 내보냈다. 이 아가타와 권 아가타는 서울 어느 초라한 신자 집에 숨어 있었는데 함께 탈출했던 여종이 먼저 잡혀서 그들이 숨어 있는 곳을 알려주어 다시 붙잡히게 되어 포도청에 압송되었다.

 

다시 잡힌 이 아가타는 무서운 형벌을 받았지만 그녀의 신앙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불굴의 인내로 형벌을 참아냈다. 이 아가타는 형조로 옮겨져서도 새로운 심문과 고통을 당하게 되었지만 첫 번 결심을 꾸준히 지켜 마침내 집안을 사도에 물들게 한 죄와 예의를 안 따르고 사교의 이름을 받은 죄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리하여 1840년 1월 31일(음력 1839년 12월 27일), 서울 당고개에서 27세의 일기로 순교하였다. 이경이 아가타에 대한 기록이 더 이상 없으므로 기해년 박해를 일으켰던 박해자의 말로가 어떠하였는지 알아보자.

 

그다지도 혹독한 천주교를 박해하던 풍양 조씨 일파와 이에 아첨한 간사한 무리들은 그 후 비참한 생애를 마쳤다. 박해 때 우의정이던 이지연은 함경도 명천으로 귀양 갔다 1년 후인 1841년 8월 17일에 그 곳에서 죽고, 신자를 팔아먹고 앵베르 범 주교까지 고발해 조선교회의 유다스와 같은 역할을 했던 김여상은 신유년 박해 때의 주동인물이던 홍낙안의 아들 홍원모와 손잡고 더욱 큰 박해를 일으키려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어 1840년 5월 13일에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로 귀양 갔으며, 한편 홍원모는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 갔다 얼마 안 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이 간악한 김여상은 그 후 아버지의 탄원으로 1853년에는 귀양지에서 풀려난 다음 고향인 청주로 돌아와서 살았다. 1862년 7월 26일에는 왕족이던 이하전을 임금으로 받들려는 음모를 꾀하였다는 죄로 목과 손발이 잘려서 8도의 감옥에 매달리게 되었다.

 

[소공동체 모임 길잡이 작은공동체, 201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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