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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권진이 아가다

2018.11.06 09:25

기도방지기 조회 수:229

온갖 혹형과 신문을 당하였으나 끝내 신앙을 지키면서 배교하지 않았다. 

 

 

성령님 모든 은총을 베푸시는분 !

저희를 가르치시어 겸손하고 소박하게 살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

주님 저희가 성녀 권진이 아가다를 본받게 하소서 !

성녀 권진이 아가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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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권진이 아가타는 당대에 문장과 명필로 뛰어났던 학자이며 몰락 양반인 권 진사와 한영이 막달레나(Magdalena)의 딸로 태어났다. 권 진사는 중년에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외교인 아내인 한영이에게도 가르쳐 입교시켰으나, 그 당시 조선에는 성직자가 없었으므로 임종 때 가서야 영세를 받고 가족들도 함께 세례를 받게 했던 것이다. 어머니 한영이 막달레나는 과부가 된 후 가진 것이 없어 무척이나 고생을 하였으나, 남편의 간곡한 유언에 따라 수절함과 동시에 정성을 다하여 권 아가타를 양육하였다.

   그러나 권 아가타는 차차 성숙하면서 미모가 빼어났고 굳은 신앙심을 가진 아름다운 규수로 꼽혔기에 교우들 중에서 많은 칭찬을 받았다. 권 아가타는 13세에 결혼을 하였는데 모든 예절을 갖추어 식은 올렸지만, 시골에 살던 그의 남편이 너무 가난하여 집에 데려갈 수 없었으므로, 남편의 친척인 정하상 바오로(Paulus) 집에 기거하면서 집안 살림을 맡아보게 되었다.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가 조선에 왔을 때 아가타는 그의 처소에 살림꾼으로 들어갔는데, 아가타는 타고난 미모와 민첩한 지혜와 여러 가지 재주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영리하고 온화한 여자였으므로 신부는 그를 매우 귀여워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아가타가 동정을 지킬 의향이 있음을 말하자, 혼인식만 하고 동거하기 이전임으로 혼인을 무효화시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주선해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위험에로 들어가는 첫 걸음이 되어 한 동안은 좋지 않은 소문으로 사람들의 걸림돌이 되었다. 이때 모방 나 신부가 입국하여 모든 소문을 없앴음으로 아가타는 모방 신부의 어버이다운 권고와 충고를 듣고 용기를 내어 새 출발을 하였다. 아가타는 친정어머니에게로 돌아가 신자의 본분을 지키는데 전심하고, 보속과 열렬한 기도로 과거의 자기 행동으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졌던 이들을 오히려 덕의 길로 권유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기워 갚고 하느님께 그 죄의 용서를 얻기 위하여 아가타는 순교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어머니와 함께 이러한 속죄와 신심생활을 하던 중 어떤 배교자의 밀고로 포졸들이 아가타를 잡으려고 몰려들었다.

   1839년 7월 17일 밤 어머니와 이 아가타 그리고 권 아가타가 붙잡혔는데, 관원은 어머니만 옥에 가두고 두 아가타는 사관청에 두고 옥졸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이때 배교자 김여상이 아가타를 꾀면서 그와 함께 도망치자고 하였으나 아가타는 멸시하는 말로 대답할 뿐이었다. 그러나 다시 포교들이 아가타의 젊음과 아름다움에 마음이 움직여 그녀의 탈출을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아가타는 며칠 후 이 아가타와 함께 도망하였다. 결국 이 사건이 탄로되자 포장이 파직되고 군졸 하나는 사형을 당했으며 둘은 귀양을 갔다. 이윽고 권 아가타는 재차 체포되어 온갖 형벌을 받을 수 없이 받았지만 그녀의 신앙은 끝내 흔들리지 않았다.


   그 후 형조로 옮겨져 3차에 걸쳐 심문과 고문을 당하였지만, 최초의 마음을 꾸준히 지켜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도를 봉행하는 것이 뼈 속에까지 배었고 귀신을 공경하는 것이 본성이 되어 여자 중에 놀랄만한 요술쟁이라는 죄목으로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녀는 1840년 1월 31일 먼저 순교한 어머니의 뒤를 따라 당고개에서 피를 흘리게 되었으니 그녀의 나이는 21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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