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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3. 홍필주 필립보 (1774~1801년)

  홍필주(洪弼周) 필립보는 충청도 덕산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1790년경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아명은 ‘문갑’(文甲)이다.

  필립보의 아버지는 처음부터 천주교 신앙을 아주 싫어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교리를 배워 입교한 계모 강완숙(골롬바)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신앙을 실천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아들 필립보가 입교한 뒤로는 자신이 이해한 교리를 아들에게 가르쳐 주었으며, 필립보 또한 어머니의 열심한 덕행을 모범으로 삼았다.

  다음해 신해박해를 겪고 나서 필립보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따라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여전히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따라서 고향집에서는 신앙 생활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양으로 올라온 필립보는 가족과 함께 아주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795년 5월에 어머니 골롬바가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피신시키자, 이때부터 신부의 복사가 되어 여러 가지 일을 돕기 시작하였다. 또 홍익만(안토니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함께 교회 일을 도왔다.

  이후 필립보는 자신의 집이 조선 교회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자, 주 신부와 신자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이곳 저곳으로 집을 옮겨다녔다. 또 한편으로는 정약종(아우구스티노) 회장을 비롯하여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교류하면서 신심을 쌓아갔다. 이로 인해 그의 이름은 어머니 골롬바와 함께 점차 교회 안에서 드러나게 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필립보의 이름은 일찍부터 박해자들의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되어 포졸들이 그의 집으로 들이닥쳤고, 즉시 어머니와 필립보를 비롯하여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체포하였다.

  포도청으로 끌려간 홍필주 필립보는 형벌을 받으면서도 주문모 신부의 행방과 그 동안의 행위를 조금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나 혹독한 형벌이 계속되면서 그의 마음은 차츰 약해지게 되었다. 이때 조사를 받으러 가던 어머니 골롬바가 그를 보고는 “필립보야, 너는 어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머리 위에 임하시어 비추고 계심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그릇된 길로 가려고 하느냐?”고 권면하였다.1) 이에 그는 즉시 마음을 돌이켜 박해자들을 향해 ‘절대로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

  이후 어머니는 먼저 순교하였지만, 필립보는 오랫동안 옥에 갇혀 고통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마음이 약해지지 않앗으며, 마침내는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런 다음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10월 4일(음력 8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필립보가 사형 선고를 받기 전에 형조에서 말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계모와 한마음으로 천주교에 깊이 빠졌으며, 외국 사람(주문모 신부)을 기이한 재물과 같이 생각하여 아버지처럼 모셨으니 그 죄가 대단히 큽니다. 뿐만 아니라 남녀가 함께 모여 비밀 공동체를 형성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유혹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서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이라면 비록 사형을 받을지라도 달게 여기겠습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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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t. A.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1860년
 필사 정리), M.E.P. 소장, p. 142 ; <1811년 북경 주교에게 보낸 조선 신자들의 편
  지>. 이 편지는 교황청 인류 복음화성 고문서고에 포르투갈어 역본(SC Cina Vol.
  4, pp. 320-335)과 이탈리아어 역본(Ibid., pp. 336-354)이 소장되어 있다.
2) "사학징의" 권1, p. 117, 홍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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