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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3>최창주 마르첼리노

2011.07.16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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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최창주 마르첼리노

▣ 여주 지방의 선각자 !  崔昌周  
현대사회는 문화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지난번 사제연수 중 쉬는 시간에 신부님들과 대화를 갖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송병선 신부님은, 21C의 가톨릭은 복음 안에서 교육, 문화, 복지에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 수원교구의 가톨릭문화는 무엇인가?”하며 여운을 남기셨다. 교회의 비젼을 가지고 사시는 분이라고 느꼈다.  

그렇다 지방자치제가 되면서 각 지방은 특히 자기 지역의 문화홍보에 대단한 열의를 가지고 있다. 요즘 주보에 여주순교자들에 대해 연재를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여주군은 무엇으로 자기 지방을 알리고 있는가? 찾아보니 여주지방은 “역사와 문화, 관광의 고장인 여주”, “옛부터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던 아름다운 여주”, “옛 성현들의 향취를 느낄 수 있는 여주”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었다.  

그러나 이뿐 아니라 여주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여주지방의 천주교 위상일 것이다. 여주는 많은 천주교 순교자들을 배출하였고, 피로써 진리를 증거 한 터가 있으며 부엉골의 신학교를 낳은 곳이기도 하다. 이것이 여주지방의 또 다른 자랑거리이며 힘이다. 이처럼 여주가 천주교의 문화적 가치의 위상이 클 수 있도록 기반이 되게 한 이는 최창주(마르첼리노)이다. 여주 땅에서 가장 먼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여주지방의 복음의 선구자가 된 최창주(마르첼리노) 순교자는 어떤 사람인가? 경기도 여주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여종’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그는 40대 초반에 우연히 천주교 교리를 듣고 이를 신앙으로 받아들인 다음 온 가족을 차례로 입교시켰으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로 인해 그의 생활은 점차 이웃과 친지들 사이에서 회자되기 시작하였고, 1791년의 신해박해 때는 천주교 신자로 밀고 되어 광주 옥 에 갇히게도 되었다. 그러나 이 때 그의 신앙은 아직 순교에 이를 정도로 굳지는 못하였다.  

광주 감옥에서 석방된 최창주(마르첼리노)는 하느님의 증거자가 되지 못했던 자신의 나약한 신앙심과 지은 죄를 깊이 뉘우치고,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로 순교의 은총을 입어 피로써 죄를 씻어 낼 방도를 구하는 데만 노력하였다. 또 가족과 이웃들에게 더욱 열심히 신앙을 권면하였으며, 두 딸도 모두 교우에게 출가시켰다. 그 딸들 중 하나는 1801년 여주에서 순교한 원경도(요한)와 혼인하였고 다른 딸 최조이(바르바라)는 경기도 용인 태생이며 1839년 전주에서 순교한 신태보(베드로)의 아들과 혼인했다. 기록에 의하면 최창주(마르첼리노)의 딸이며 신태보(베드로)의 며느리인 최조이(바르바라)의 신심은 가히 상상을 뛰어넘는 곳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앞서 여러 차례 설명한 것과 같이 여주 지방에서는 1800년 부활 대축일에 다시 박해가 일어났었는데, 이때 최창주(마르첼리노)의 사위 원경도(요한)도 체포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최창주의 아내는 남편에게 피신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그는 웃으면서 “안심하오. 내가 없더라도 당신은 살아갈 수 있을거요”하며 순교의 원의를 비추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까지 피신을 종용하므로 이미 순교하기로 결심한 최창주(마르첼리노)였지만 어머니의 간곡한 원의를 저버릴 수가 없어 한양으로 피신하기로 작정하고 길을 나섰다. 그는 ‘순교의 은총을 받아야만 죄를 씻을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잠시 잊어버린 것일까?

하지만 인자하신 주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목소리로 최창주(마르첼리노)를 일깨워 주고 계셨다. 그가 집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순교를 다짐했던 자신과의 약속을 문득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왜 한양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왜 은총의 순간을 피해 가는 것일까.’ 전율이 온몸을 엄습해 오면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가던 길을 되돌아오고 있었다.  

‘사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형벌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형벌제도 가운데서도 가장 극한 형벌이다. 이러한 사형의 종류는 크게 참수형(참형= 신수이처-身首異處-라 하여 목을 베어 죽이는 형벌)과 교수형(교형=목을 졸라서 죽이는 형벌)이 있는데 시대와 국가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그럼 <참수치명>은 무엇인가? 참수형(참형)을 받아 순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참수치명(斬首致命)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흔히 “어느 순교자가 참수 당했다”라고 한다. 참수형은 조선시대 사형방법의 하나로 대개 손발을 결박한 후 나무토막 위에 머리를 받치고 목을 베는 형벌이다. 많은 순교자들이 이 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 대군(大君),대부(大父)이신 주님! 영원히...
박해를 피하려고 한양으로 가던 최장주(마르첼리노)는 마음을 다시 잡고 가던 길을 되돌아 집으로 향했다. 자기 집 마당으로 들어서는 최창주(마르첼리노)를 본 그의 아내는 적지 않게 놀랐으나, 더 이상 남편에게 피신할 것을 종용하지는 못하였다.

그때까지 여주에 머물면서 최창주(마르첼리노)의 행방을 찾던 포졸들은 그가 다시 집으로 돌아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즉시 들이닥쳤다. 그리고 최창주를 체포하여 ‘사학쟁이의 우두머리를 잡았다’고 외치면서 의기양양하게 여주 감옥으로 향하였다. 여주 감옥에서는 이미 앞서 잡혀온 그의 사위 원경도(요한)와 이중배(마르티노) 등이 그를 맞이하였다.

이튿날부터 문초가 시작되었는데, 여주 관장은 최창주(마르첼리노)에게 형벌을 가하면서 누구에게서 천주교를 배웠는지, 또 알고 있는 천주교 신자를 밀고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에서는 누구에게라도 해를 끼치는 것을 금하고 있으니, 한 사람도 고발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밀고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형벌을 받을 때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아주 자랑스럽고 거룩하게 부르면서 꿋꿋하게 견디어냈다.

최창주(마르첼리노)의 옥중 생활은 이후 6개월이나 계속되었다. 그는 동료들과 서로 의지하면서 순교를 향해 나가자고 격려하였으며, 때론 마음이 약해진 교우에게는 교리를 강론하여 용기를 불어넣어 주곤하였다. 그러다가 1800년 10월에 경기감영으로 압송되어 다시 형벌을 받아야 했는데 오롯이 천주께 향한 그의 신앙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는 형벌로 인해 온몸이 헤어진 사위 원경도(요한)의 몸이 기적처럼 낫는 광경을 보면서, 또 이중배(마르티노)의 굳은 신앙과 예비 신자 조용삼(베드로)이 보여준 용기를 통해서 더욱 신앙적으로 굳세어져 갔다.  

1801년에 들어서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경기 감사는 배교의 말 한마디만 하면 자유의 몸이 되게 해주겠다며 처음엔 부드러운 말로 그들을 설득시키려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이에 응하지 않자, 신자들을 다시 끌어내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이때 최창주(마르첼리노)는 함께 있는 교우들을 대표하여 감사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의 큰 임금이시며 큰 아버지이십니다. 이러한 참 천주를 알고 그분을 섬기는 행복을 받았으니, 어찌 저희들이 그분을 배반할 수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죽기를 원합니다.”

형벌이 점점 더 가혹해졌다. 피가 튀고 살이 너덜거렸으며, 배교하고 목숨을 건지라는 유혹도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창주(마르첼리노)는 동료들과 함께 이를 굳세게 뿌리치고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경기 감사는 사학쟁이들에게 자신이 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래, 이놈들은 어찌할 수 없는 인간들이란 말인가?’마침내 감사는 최창주와 동료들로부터 최후 진술을 받아서 조정에 보고하였다. 최후 진술 후 최창주(마르첼리노)는 자신의 제헌(祭獻)이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꿋꿋하게 견디어 나갈 은총을 얻기 위하여 기도와 모든 본분을 실천하는 데에 열심을 배가하였다.

경기 감사가 조정에 보고한 최창주(마르첼리노)에 대한 진술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최창주는 천주라는 큰 부모가 있다 하여 제 아버지를 진정한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아버지의 이름을 잊어버렸다고 말할 정도로 아주 흉악합니다. 또 모진 형벌을 당하면서도 교회 서적이 있는 곳을 대지 않았고, 끝내 ‘천주교 신앙을 믿는 마음을 고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인륜과 도덕을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최후 진술 가운데서도 ‘아주 달가운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겠다’고 단언하였습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사학쟁이들을 모두 고향 여주로 돌려보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최창주는 동료들과 함께 여주로 압송되어 참수형을 받게 되었으니, 그 장소는 여주 관아의 문에서 남쪽으로 1리쯤 떨어진 큰길가였다. 순교 날짜는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로, 당시 최창주(마르첼리노)의 나이는 5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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