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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이윤일 요한

2019.09.01 16:01

기도방지기 조회 수:165

 

이 마을을 대표하는 집 주인이 누구며

천주교를 믿는 자가 누구냐?

바로 나요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영원히 아멘

 

성령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저희를 가르치시어

하느님께 흠숭과 영광이 되고 또한 영혼의 구원이 되며

성모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게 하소서 !

그리하여 하느님의 쓸모 있는 종으로서 죽게 하소서 ! 아멘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아버지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저희가 성 이윤일 요한을 본받게 하소서 !

성 이윤일 요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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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이윤일 요한(Joannes)은 충청도 홍주에서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친

대(代)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가 언제부터 경상도 문경군 새재 여우목으로 와서

살기 시작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박해가 일어났을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는데, 키가 크고 긴 수염을 기르고

있었으므로 위엄이 있었으며, 신심이 깊고 또 솔직담백하여 주변의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다. 그의 가정은 친가와

외가 모두 선대부터 내려오는 신앙의 가문이어서 선친들 중에 전교회장과 순교자들도 있었다. 이 요한도 이러한

가풍을 이어받아 온갖 방법과 노력으로 자기 본분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1866년 11월 18일(음력 10월 12일), 문경 관아에서는 여우목에 신자들이 많이 산다는 것을 알고 포졸들을 보냈다. 이 요한은 포졸들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올 때가 온 것이며 이미 각오한 바 있어 도망하지 않고

태연히 그들을 맞아 들였다. 포졸들이 “이 마을을 대표하는 집 주인이 누구며 천주교를 믿는 자가 누구냐?”고 묻자, 그는 선뜻 나서며 “바로 나요” 하며 점잖게 말하였다. 그들은 마을을 수색하여 이 요한의 가족 8명과 마을의 신자

30명을 체포하여 험준한 산길을 걸어 문경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문경에서 사흘을 지낸 후 상주로 압송되었다. 여기서 세 달을 지냈는데 그가 기거하던 곳은 집이 아니었고, 마구간도 돼지우리도 아닌 겨울에 무나 배추를 저장하기 위해 파 둔 구덩이가 요한의 침실이었다. 그의 목에는

죄수가 쓰는 칼이 두 개나 채워졌고, 발에는 차꼬를 끼워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굽히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기도와 묵상을 하였으며 신자들을 격려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 후 상주 목사는 마지막 문초를 마치고 70여 명의 신자를 세 편으로 갈랐다. 첫째 편은 집으로 돌려보낼 자들이고, 둘째 편은 처형될 사람들 그리고 셋째 편은 이 요한과 같은 사교의 두목이었다. 상주 목사는 1867년 1월 4일 대원군의 윤허와 함께 군중에게 교훈이 되게 사형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 집행을 위해 대구로 압송하였다. 이 요한은 사형선고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출발하기 전에 자녀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제 순교하러 떠난다. 너희들은 집에 돌아가 성실하게 천주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여라. 그리고 꼭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말하였다.

   1867년 1월 21일(음력 1866년 12월 16일) 이 요한은 포졸들이 주는 마지막 음식을 다 받아먹고 남문 밖

관덕정으로 끌려 나갔다. 천주학장이를 참수한다는 소식이 널리 퍼져 형장은 인파로 들끓었다. 집행관이 나와서

선고문을 낭독하자 요한은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내어 희광이에게 주며 “나를 위해 수고하는 자네에게 줄

터이니 받아서 요긴하게 쓰게나. 그 대신 부디 한 칼에 내 목을 베어 주게나.” 하고 말하였다. 요한은 경건하게

십자성호를 긋고 조용히 꿇어앉았다. 돈을 준 효력이 있었는지 요한의 목은 한 칼에 떨어졌다.

   순교 후 그의 유해는 이 토마스와 그의 아들 이의서 마티아에 의해 대구 날뫼(비산동)에 매장되었다가, 1901년

경부선 철도가 착공되면서 당시 용인의 먹뱅이에 살고 있던 그의 동생 이시영에 의해 1912년 이동면 묵리 산으로 이장하였다. 1976년 6월 24일 다시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가 성인의 유해임을 밝혀져 1987년

1월 21일 대구 성모당에 안치되었고, 그날 대구대교구의 제2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다가 1991년 1월

20일 관덕정 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모시고 봉안식을 가졌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여우목 성지

 

여우목 성지는 한국의 103위 순교성인 중 한 명인 이윤일 요한 성인과 서치보 요셉 가정에 의해 이루어진 교우촌이다. 인근의 교우촌인 건학(동로면 명전리)과 부럭이(덕산면 억수리)와는 산길로 불과 20-30리 내에 있다. 그래서 이들 세 교우촌은 처음부터 빈번한 접촉을 갖고 이웃집 드나들 듯이 서로 긴밀히 연락하고 도와가며 신앙생활을 했다.

 
여우목 교우촌은 소백산맥의 높고 험준한 대미산(1,115m)을 경계로 하여 충청북도 단양과 경계를 이루는 경상북도 문경 지방의 최동북단에 위치해 있다. 여우목은 대미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서 옛날부터 경상도 동쪽 지방의 사람들이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이 여우목 고개를 넘어 문경읍내와 새재로 넘어갔던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곳에 처음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600년경으로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장원의 10대 조부인 장기풍이 단양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움막을 짓고 다래덤불을 걷으며 산지를 개간해 살았다고 한다.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 살기 시작한 것은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서이다. 충청도 홍주가 고향인 성 이윤일 요한(李尹一, 1816-1867년) 가정이 상주 갈골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고, 그 무렵에 경상도 지방의 첫 신자인 서광수(徐光修, 1715-1786년)의 손자인 서치보 요셉(徐致輔, 1791-1840년) 가정도 충청도 청풍에서 살다가 박해를 피해 여러 곳을 전전하던 중 여우목 교우촌으로 피난 옴으로써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다.
 
또한 1827년 정해박해 때 멍에목에서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서 순교한 박경화 바오로(朴~, 1757-1827년)와 부친과 함께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서 12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 1839년 기해박해 때 관덕정에서 순교한 박사의 안드레아(朴士儀, 1792-1839년) 가정도 고향을 떠나 단양 가마기에서 살다가 여우목과 건학 교우촌과 인접한 멍에목으로 피신 와서 살았다. 박경화 바오로와 박사의 안드레아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서치보는 가족들과 함께 여우목 교우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1840년 9월 19일(음력)에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그 후 선산(현 여우목 마을 뒷산)에 묻혀있던 서치보의 유해는 1999년 9월 18일 새로 조성된 현재의 여우목 성지에 묘소를 마련하여 병인박해 때 대구 감영에서 순교한 장남 서인순과 함께 이장하여 모셨다.
 
한편 여우목에서 살다가 상주와 경산 등지로 피난 갔던 서치보의 아들인 서인순 시몬(徐隣淳, 1808-1868년)과 서익순 요한(徐翼淳, ?-1868년), 서태순 베드로(徐泰淳, 1823-1867년)는 병인박해 때 모두 순교하였다.
 
서치보가 선종한 후 장남인 서인순은 어머니와 4명의 동생들을 데리고 풍기로 이사를 가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1860년 경신박해 때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다시 온 가족을 데리고 경산 모개골 교우촌으로 이사를 갔다. 1866년 병인박해 때 모개골 교우촌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대구의 경상 감영에서 문초를 받고 옥고를 치르다 1868년 4월 29일(음력) 옥사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그 후 그의 유해는 처음에는 경산 모개골에 안장하였다가 후에 부친 서치보의 묘소가 있는 여우목으로 이장해 왔고, 1999년 9월 18일 새로 조성된 현재의 여우목 성지에 부친과 함께 이장하여 모셨다.
 
4남인 서익순은 1867년 박해가 잠잠해지자 한티에서 대구의 집으로 돌아가던 중 서울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절두산에서 백지사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5남인 서태순은 박해를 만나 대구에서 문경 한실 교우촌으로 피난 갔다가 문경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문초를 받고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어 다시 혹독한 심문을 받은 후 상주 감옥에서 옥사했다. 한편 베로니카라는 노파는 이곳에서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가는 도중에 마을 앞 노상에서 순교하였다.
 
당시 여우목 교우촌의 공소회장이었던 이윤일은 부친 대(代)부터 신앙을 받아들여 신자의 본분인 수계 생활에 충실하였다. 상주 갈골에서 살다가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처갓집 식구들(순교 복자 박사의 안드레아의 후손)이 많이 살고 있는 문경 여우목으로 이주하여 농사를 짓고 살면서 외교인들을 권면하여 30여 명을 입교시켜 큰 교우촌을 만들었다. 이윤일의 아들인 이 시몬은 부친보다 앞서 1866년 1월 27일(음력 1865년 12월 11일) 건학 교우촌에 사는 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체포되어 공주에서 순교하였다.
 
성지 전경. 야외제대 맞은편에 묘역과 대형 십자가, 성모상이 있고, 그 둘레에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6년 11월 18일(음력 10월 12일) 여우목에 신자들이 많이 산다는 것을 알고 문경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이윤일은 마을의 대표자를 묻는 포졸들에게 선뜻 나서 신분을 밝히고 가족 8명을 포함해 모두 30여 명의 신자들과 함께 문경 관아로 끌려갔다. 문경에서 3일 후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어 수차례 문초를 받았다. 여기서 이윤일의 아들 이의서 마티아와 큰 며느리 박 아녜스, 모친과 누이는 풀려났지만 그는 ‘사학의 두목’이라 하여 경상 감영이 있는 대구로 이송되었다.
 
이윤일은 대구로 이송되기 전 자손들을 불러 놓고, “나는 이제 치명하러 가니 너희는 가서 열심히 수계하다가 나를 따르라.”고 훈계한 후 치명하는 장소까지 따라오지도 말고 보지도 말라고 하였다. 결국 대구로 끌려온 지 3일째 되는 1867년 1월 21일(음력 1866년 12월 16일) 함께 잡혀온 한실 교우촌의 김예기(金禮己), 김인기(金仁己) 회장 형제와 함께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순교 후 그의 유해는 이 토마스에 의해 관덕정 형장 근처에 가매장되었다가 2년 후 아들 이의서와 가족들에 의해 대구 비산동(날뫼) 뒷산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1912년 경기도 용인군 묵리(먹뱅이)에 살고 있던 동생 이시영에 의해 이동면 묵리 산으로 옮겨 모셨다. 1976년 6월 24일 다시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가 성인의 유해임을 밝혀져 1987년 1월 21일 대구대교구청 내 성모당에 안치되었고, 이날 대구대교구의 제2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다가 1991년 1월 20일 관덕정 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성인의 유해를 모시고 봉안식을 가졌다.

묘역 위에서 내려다본 성지 전경.


여우목 성지를 관리하는 문경 성당은 서공석 신부의 도움으로 교우촌 터 부근에 1255평 규모의 부지를 마련하여 1999년 서치보와 서인순의 묘를 이장하고 다음해 4월 대형 십자가, 11월 제대 · 성모상 · 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하고 꾸준히 조경 작업을 실시하여 2002년 9월 29일 안동교구 권혁주 주교 주례로 성지 축복식을 가졌다. [출처 : 안동교구 홈페이지,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6년 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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