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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오메트로 오 베드로

2019.06.02 09:47

기도방지기 조회 수:238

 

베르뇌 주교는 편지를 통해 

“수련생 같은 이 키작은 신부는 조그만 기적들을 행한다”

그 착한 마음씨에다 온갖 정력까지 다 쏟아서 교우들을 훌륭하게 돌볼 뿐 아니라

신자들에게 성체께 대한 신심과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대단히 잘 가르치고 있다”고 전했다.

 

 

성령님 사랑하올 영혼의 친구여 !

저희를 가르치시어 아무도 판단하지 않게 하시고

누구의  잘못도 기억하지 않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영원하시고 자비로우신 아버지 저희를 불상히 여기소서 ! 

주님 저희가 성 오메트로 오 베두로를 본 받게 하소서 ! 

성 오메트로 오 베드로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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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피에르 오메트르(Pierre Aumaitre) 신부의 세례명은 베드로(Petrus)이고 한국 성은 오(吳)이다. 그는 1837년 4월 8일 프랑스 앙굴렘(Angouleme) 교구 뤼페크(Ruffec) 본당의 에제크(Aizecq)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조그만 농지를 경작하며 신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꾸려갔는데, 모두 5남매를 키우고 있었다. 오메트르가 성실은 하였지만 학업 성적이 뛰어나지는 못하여 그가 신학교에 입학할 때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그가 사제가 되고자 했을 때 본당신부는 그의 성품에는 감동했지만 성적을 보고는 반대했었다. 이런 어려운 과정을 거쳐 그는 소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공부의 부족함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우등생이 되기까지 하였다. 그는 1857년 10월에 앙굴렘 대신학교에 진학했고, 1859년 8월 18일에 소품자(小品者)로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 후 1862년 6월 14일에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자신의 전교지가 조선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박해로 인해 조선 입국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는 중국 어선으로 연평 바다를 거쳐 비교적 무사히 조선 땅을 밟게 되었는데, 이때가 1863년 6월 말이었다. 조선에 입국한 오메트르 신부는 우선 1개월 동안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와 함께 서울에서 지낸 후, 용인의 손골(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동천리)로 내려가 조선말을 익혔다. 그 후 1864년 9월에는 경기도의 한 구역을 맡아 사목하였다.

   입국한 지 2년 남짓 지났을 때 박해의 소문이 나돌았고,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할 때인 1866년 당시에 그는 수원의 샘골(泉谷里)에 있었다. 여기서 오메트르 신부는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를 만나기 위해 일단 교우들을 진정시키고 격려하면서, 미사 예절용 물건들을 모두 감추고 다블뤼 주교가 있는 신리 마을로 갔다. 이것은 오메트르 신부가 교우들에게 더 큰 피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 자수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다블뤼 주교의 집에 있던 포졸들은 다블뤼 주교뿐만 아니라 다른 신부들도 체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포졸들은 주교를 위시하여 위앵(Huin, 閔) 신부와 오메트르 신부를 홍주 옥으로 일단 끌고 갔다가 다시 서울로 압송하여 투옥시켰다. 문초를 받는 동안 주리 틀림 등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고백하였기에, 결국 오메트르 신부를 포함한 세 선교사들은 모두 사형선고를 받고 2백 50리나 떨어진 충청도 보령 수영(水營)의 갈매못 사형장으로 끌려가 1866년 3월 30일 참수 치명하였다. 바로 그 날이 성 금요일 주님의 수난일로 그들이 처형된 시간이 예수께서 운명하신 시간이었다고 전해온다. 그때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교구 순교자를 만나다] 성 오메트르 베드로

 

박해 겪는 조선에 서품 직후 입국… 29세에 순교

 

 

오메트르 베드로 성인 동상과 손골성지 성당. 가톨릭신문 자료 사진.

 

 

오메트르 베드로 성인은 수원 지역에서, 박해 속에 지친 신자들에게 성체신심과 성모신심을 전하며 사목했던 순교자다.

 

성인의 성은 본래 오메트르지만, 우리나라에서 사목하면서 오(吳)라는 성을 사용했다. 그래서 오늘날 103위 한국성인호칭기도 중에는 성인을 ‘오 베드로’라 부른다.

 

성인은 1837년 4월 8일 프랑스 앙굴렘교구의 조그만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성인은 성실했지만, 성적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성인의 부지런함과 신앙에 대한 열성을 본 본당 주임신부는 성인에게 라틴어를 가르쳤고, 성인 스스로 매일 새벽 먼 곳에 살고 있는 평신도를 찾아가 라틴어를 배우기도 했다. 그런 정성으로 낮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소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비록 낮은 성적으로 입학했지만 성인은 꾸준한 노력으로 학업을 보완해 나갔고, 후에는 우등생이 되기까지 했다. 성인은 1857년 10월 앙굴렘 대신학교에 진학했고, 1859년 8월에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했다.

 

1862년 6월 14일 사제품을 받은 성인은 자신의 전교지인 조선을 향했다. 성인은 조선에 극심한 박해가 이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지체하지 않고 서품을 받은 해 8월에 선교지를 향해 출발했다. 하지만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입국하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성인은 1년이 지난 1863년 6월, 우리나라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성인은 우선 경기도 용인 손골에 머물며 우리말과 문화를 익혔다. 1년 동안 손골에서 말을 익힌 성인은 이후 경기도 지역을 사목했다. 당시 베르뇌 주교가 쓴 편지에서 성인의 사목활동을 엿볼 수 있다. 베르뇌 주교는 편지를 통해 “수련생 같은 이 키작은 신부는 조그만 기적들을 행한다”면서 “그 착한 마음씨에다 온갖 정력까지 다 쏟아서 교우들을 훌륭하게 돌볼 뿐 아니라 신자들에게 성체께 대한 신심과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대단히 잘 가르치고 있다”고 전했다.

 

1866년 성인이 수원의 샘골(泉谷里)에서 사목하고 있을 무렵, 성인은 베르뇌 주교가 체포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성인은 동요하는 신자들을 진정시키고 격려하면서 성물과 미사도구 등을 모두 감췄다. 그리고 다블뤼 주교가 있는 신리마을로 갔다. 성인의 이런 조치는 자신이 잡혀 들어가는 대신 자신이 사목하던 신자들은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성인은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고백했다. 결국 1866년 3월 30일 충청도 수영의 갈매못 사형장에서 참수 당했다. 성인이 순교한 그날은 성금요일로 사형 집행 시각이 예수가 운명한 시각과 같았다고 한다. 순교 당시 성인의 나이는 29세였다.

 

손골 성지 십자가의 길.

 

 

신자들은 성인 순교 후 3일이 지나서야 성인과 다른 선교사들의 시체를 수습할 수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시신은 짐승들이 해친 흔적도, 부패의 흔적도 없이 깨끗했다고 한다.

 

 

성인 발자취 만날 수 있는 곳 - 손골성지

 

손골성지(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로437번길 67)는 성인이 우리말과 문화를 배우고 선교활동을 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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