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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장주기 요셉

2019.06.09 13:58

기도방지기 조회 수:215

 

제가 을사년(1845) 제천으로 옮겨가서 성교를 배우니 

성교는 실로 대군대부(大君大父)의 가르치심이옵니다. 

비록 형틀아래 만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배교할 이치는 만무하니 어서 처리하여 주십시오

 

성령님 사랑하올 영혼의 친구여 !

저희를 가르치시어 아무도 판단하지 않게 하시고

누구의 잘못도 기억하지 않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저희가 성 장주기 요샙을 본받게 하소서 !

성 장주기 요셉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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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위 성인 약전] 성 장주기 요셉

 

살던 집을 배론신학교에 기부, 신학생 뒷바라지에 전념하다 성 금요일날 참수

 

 

성 장주기는 1803년 경기도 수원 지지리(현왕리 근처)에서 한 부유한 외교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장주기는 호적상의 이름이고 본래이름은 장낙소(長樂詔)였다.

 

그는 본래 한문에 유식하였는 중병에 걸려 양지(陽智)에 가 있을때 열심한 신자였던 그의 형수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서 중국인 유 빠치피고 신부에게 영세를 했다. 그의 나이 23세(1826)였던 때다. 물론 그는 그이 가족들도 전부 가르쳐서 입교시켰다. 1836년 모방신부가 입국하자 신부는 장 요셉의 열성과 신심을 보고 그를 전교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20년간을 회장직의 임무를 대단히 열심히 완수했다. 즉 그는 박해시대의 회장으로서 매사를 대단히 슬기롭게 처리하였으며 그의 열심은 어느때 어느곳에서나 표리가 없는 항구한 열심이었다고 목격 증인은 말하였다.

 

그는 동분서주 활동하면서 살아남은 교우들을 찾아 다녔으며 서로 위로하며 격려하였고 신앙을 굳게 지켜나가도록 권면하였다.

 

그는 1845년 친척들의 성화와 박해에 못견디어 가산과 전답을 전부 정리하여 제천 배론에로 이사하였다. 그가 그곳에서 지낸 10년후 1853년 장 베르뇌 주교는 이곳 배론에다 신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뿌르때에 신 신부를 임명하였다. 이에 장 요셉은 자기집을 신학교 건물로 제공하였을 뿐만아니라 신 신부를 도와 신학생들의 뒷바라지와 인근 신자들의 회장직과 신신부에게 한국어까지도 가르쳤다. 그는 그가 하는 일의 댓가를 조금도 바람없이 부부가 합심하여 농사까지도 지어서 그 생산을 신학교에 바치고 자신은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12년간을 청빈과 봉사가운데 신학교에 살면서 활동하였다. 그는 많은 경험과 신심에 균형이 잡힌 인자한 회장으로서 그의 말을 거역하는 교우가 하나도 없을 만큼 존경받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항상 회장본분에 대하여 『회장본분이 비록 많고 중하나 대략 네조목에 돌아가니 첫째는 교중구령하는 일을 돌봄이요, 둘째는 외인의 미혹한 것을 열고 권하여 이단을 끊어버리고 정도로 돌아오게 함이요, 셋째는 병든이를 보살피고 위험한 이를 붙들어줌이요, 넷째는 영해들에게 대세를 붙여줌이니라』라고 말하였다.

 

1866년 박해가 일어나자 3월 1일 포졸들이 배론골짜기에 갑자기 들이닥쳐 신학교성직자들을 체포할때도 그는 선뜻 이들앞에 나서서 자기가 이집 주인이라고 말하였다. 장회장의 공적을 잘알고 있는 신뿌르띠에신부는 장요셉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헌들에게 돈을 주면서 그를 자유인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장요셉 회장은 끝내 사제들을 떠나지 않았다. 드디어 출발날이 내일로 다가오고 또 막상 다음날 포졸들이 장요셉도 함께 끌고 가기에 이르자 신 뿌르띠에신부가 나서서 만류하는 바람에 하는수없이 장요셉을 석방시켰다.

 

이에 그는 울면서 배론신학교로 돌아왔다.

 

그후 5일이 지나 식량을 장만하려고 「노루골」에 사는 한 교우집에 다다르자 그때 포졸들이 그를 체포하였다.

 

포졸들 중에는 신 뿌르띠에 신부를 체포할때 왔던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장요셉을 첫눈에 알아보고 그를 잡아 제천 군수에게로 보냈다

 

군수가 그의 죄상을 하나하나 문초하기 시작하자 장요셉은 『내가 참으로 이 서양 사람 집 주인이오』라고 확답하면서 몇몇 고발자들이 대어준 이 모씨를 대라고 할때마다 이들의 입을 막기위해 다른 죄상들을 그대로 다 시인하였다.

 

이렇게 하여 장 요셉이 감옥에 갇히게 되자、군수는 그의 품위와 점잖은 얼굴을 보아 그를 살려 주려고 여러모로 꾀하며 기다렸으나 장요셉 회장은 끝내 천주교를 배반하지 않았다. 군수는 4명의 포졸들을 시켜 장요셉을 서울로 압송케 하였다. 결박도 하지않은 채 단지 머리에 누런 고깔을 씌우고 붉은 포승을 어깨에 걸치게 하였다. 장 요셉은 감옥에 갇힌 후에도 자칭 서양 선생님들의 집 주인이라고 하고、또 포졸들이 계속해서 이 모씨를 대라고 하는 바람에 많은 문초와 여러 차례 고문을 받았다. 1866년 2월 7일 그의 문초록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제천에서 문초받을 때 네가 사학에 물들었다는 사정과 네가 서양 사람을 모시고 10여년이나 함께 살아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다시 더 묻지 않겠다. 따지고 보면 너도 이 나라에 태어난 백성의 한 사람이 아니냐. 과거 네가 사학에 매혹되었다 하더라도 불문에 붙일 터이니 배교하고 나가서 농업이건 상업이건 네 소원대로살아 태평성세의 백성으로 산다면 어찌 즐거운일이 아니냐』 하였다. 이에 그는 대답하기를 『제가 을사년(1845) 제천으로 옮겨가서 성교를 배우니 성교는 실로 대군대부(大君大父)의 가르치심이옵니다. 비록 형틀아래 만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배교할 이치는 만무하니 어서 처리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감옥에서 많은 문초와 고문을 받은 후 안 주교 오 · 민 두 신부와 함께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보령 갈매못에서 처형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에 그는 1866년 2월 8일(양력 3월 24일)에 다른 순교자와 함께 참수되니、그의 나이 64세이며 그날은 바로 예수 수난날인 성금요일이었다.

 

그후 그의 시신은 신자들에 의하여 다른 성직자들과 함께 묻혀졌다.

 

[가톨릭신문, 1985년 6월 9일, 김옥희 수녀(한국순교복자회, 오륜대 순교자기념관장)]

 

 

 

요당리 성지

 

요당리 성지? 도대체 어디에 있는 성지일까? 수원교구 ‘요당리 성지’를 찾아 나서는 길, 지명조차 생소한 곳이기에 막연한 기대와 호기심으로 어느 때보다 설렌다.

성지 누리방(www.yodangshrine.kr)에서 내려 받은 지도를 따라 발안에서 안중 방향으로 39번 국도를 달리다 보니 발안산업단지(향남제약공단)를 지나면서 ‘요당리 성지’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 안내대로 ‘고잔성농원’ 입구로 국도를 빠져나와 지하도 아래로 좌회전 한 후 2km쯤 시골길을 달리니 성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200년 넘게 우리들 기억에서 잊혔던 곳. 하지만 이곳만큼 많은 성인과 순교자들의 얼과 발자취가 스며있는 곳도 드물다. ‘느지지’로 불렸던 요당리 성지는 장주기(요셉, 1803-1866년) 성인이 태어나 신앙 기반을 다지고 주위 친척과 교우들에게 신앙을 전파한 곳이다. 또 장씨 집성촌으로써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장 토마스(1815-1866년, 장주기 성인의 6촌)를 비롯해 장씨 일가의 터전이기도 하다.

장주기(요셉) 성인 신앙의 요람터  성 장주기 요셉 회장 영정.장주기 요셉 성인은 이곳에서 성장하며 세례를 받고(1826년) 가족과 일가친척에 복음을 전했다. 박해를 피해 배론 성지(원주교구)로 이주(1843년)한 후 자신의 집을 신학교로 쓰도록 봉헌하고, 신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는 등 신학생 및 선교사들의 뒷바라지에 헌신했다. 이후 병인박해(1866년) 때 체포돼 서울로 압송돼 1866년 3월 30일 성 금요일에 충남 보령, 현 갈매못에서 다블뤼 주교, 황석두 루카 회장 등과 함께 참수치명 당했다.

이곳 출신 순교자로는 지 타대오, 림 베드로, 조명오(베드로), 흥원여(가롤로)와 장주기 성인의 친인척인 장경언, 장치선, 장한여, 장요한, 방씨 등이 있다. 또 민극가(스테파노, 1787-1840년) 성인과 이곳에서 공소회장을 지낸 정화경(안드레아, 1808-1840년) 성인이 신앙을 전파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피신했다 체포되어 순교한 성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와 이를 도운 손경서(안드레아) 순교자의 얼이 서려있기도 하다.

선조들의 숨결과 얼, 박해의 피로 이룩한 요당리  특히 이곳은 신유박해(1801년)를 기점으로 서울과 충청도 내포 지역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주하면서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유서 깊은 교우촌(옛 지명 : 양간공소)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바닷물이 유입돼 뱃길이 열렸던 당시에는 충청도와 경기도 내륙, 서울을 잇는 선교루트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곳이며, 기해년(1839년)과 병인년(1866년)에 일어난 두 번의 박해 때 순교로 하느님을 증거했던 수많은 신자들의 신앙의 요람이라고 전해진다.

약 2만 500㎡(6200평) 부지에 아담한 성전과 깔끔한 조경이 참 아늑한 느낌을 주는 예쁜 성지다. 얼마 전까지 만해도 그 흔한 십자가나 성모상 하나 없이 허허벌판에 천막 성전과 컨테이너 사무실, 화장실이 전부이던 성지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다. 요당리 성지 초대 전담 김대영 신부는 2006년 12월 24일 이곳에 천막을 세우고 첫 미사를 봉헌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계단을 몇 개 오르니 ‘기도의 광장’이 먼저 순례객을 맞는다. 중앙에는 성모상이 모셔져 있고, 오른쪽으로는 십자가의 길이, 왼쪽으로는 묵주기도 길(로사리오 길)이 조성돼 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예수님의 수난을 묘사한 ‘십자가의 길 14처’로, 조각가 이숙자(체칠리아,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수녀가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많은 기도와 묵상 끝에 나온 걸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기도의 광장’ 중앙의 성모자상은 어딘지 낯이 많이 익다 싶더니 남양 성모성지의 성모상과 같은 것이다. 요당리 성지 개발 초기에 남양 성모성지 전담 이상각 신부가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14처를 따라 십자가의 길 기도가 끝날 무렵이면 ‘성역화 광장’에 이른다. 대형 십자가 아래로 요당리와 관련된 성인과 순교자들의 묘역이 조성돼 있다. 물론 시신이 안장돼 있지 않은 의묘(擬墓)이지만 성지에서는 장주기 요셉 성인의 유해를 모시고 순교선조들을 현양하고 있다.

성인과 순교자 묘역을 참배한 후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넓은 잔디밭 너머로 아름다운 성당이 한 눈에 들어온다. 2008년 3월에 착공해 1년 3개월여의 공사를 마치고 2009년 6월 4일 입당미사를 봉헌했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 나무 기둥과 서까래에서 솟아나는 은은한 나무향기를 맡고 벽화의 아름다움을 즐기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대성당과 소성당의 제대 벽화는 도예가 박성백(모세, 대구 신암동본당)씨 작품이다.

제대 앞 십자고상은 지금까지 본 성전 십자가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힘들어 보이는 십자가상이다. 힘없이 늘어진 팔과 어깨를 보면 그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컸을지 조금은 느껴진다.

관광 아닌 참 순례의 성지  소성당의 ‘십자가의 길 14처’ 역시 참으로 의미 있는 작품이다. 조각가 이효주(아나스타시아, 서울 중림동 본당)씨가 1998년 2월 뜻하지 않은 화재로 일부 소실된 서울대교구 중림동약현 성당의 불에 탄 목재를 소재로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불에 타다 남은 목재에서 아름다운 성물을 조각해 낸 것은 모진 박해를 겪고도 굳은 신앙의 싹을 피워낸 선조들의 숨결과 닮았다.

불과 얼마 전만해도 허허벌판의 초라한 모습이던 요당리 성지에 이렇듯 아름다운 성당이 세워지고 각종 성물이 갖춰진 데는 방윤순(마리아, 수원교구 과천 별양동 본당)씨의 봉헌이 큰 힘이 됐다. 경제 불황의 여파로 성지에도 후원이 크게 줄고 있는 상황에서 일궈낸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초대 성지전담 신부는 “순례객들이 좀 더 경건하고 아늑한 분위기에서 성지를 순례할 수 있도록 성당 건축과 조경공사를 서둘렀다”면서 “순교자들의 피와 얼이 서려있는 요당리 성지를 순례하면 공경심이 더 커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성지순례는 관광이 아닌 말 그대로 ‘순례’입니다. 단순히 볼거리를 찾기보다는 가족과 함께 경건한 마음으로 순례지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얻어 가시면 좋을 것입니다.”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1시에 성지미사가 봉헌된다. 단체 순례객들의 요청이 있을 경우 별도의 미사봉헌과 하루 피정(묘역 참배, 미사, 유해 친구, 영성 강의, 성시간)도 가능하다. 사무실에 미리 요청하면 식사(한식 뷔페)도 주문해 준다. 2014년 5월 6일에는 한국 103위 순교성인 시성 30주년을 기념해 대성당 앞에 장주기 요셉 성인 흉상을 제작 설치했다. [출처 : 평화신문, 2009년 9월 6일, 서영호 기자, 내용 일부 수정(최종수정 2015년 5월 18일)]

기도의 광장 성모상 뒤로 대성당이 보인다. 성모상은 남양 성모성지에서 기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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