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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2019.07.14 11:07

기도방지기 조회 수:125

 

나는 하느님을 배반 하느니 차라리 죽기로 결심하였소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영원히 아멘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저희가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를 본받게 하소서 !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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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는 충청도 임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본래 양반집에 태어나 

사서오경 등 유학공부를 많이 하여 과거를 보아 지방 관직에 봉직되어 한 마을의 관장까지 지냈다. 

그가 천주교에 영세 입교하자 모든 관직을 거절 하고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여 살았다.

 

그러나 박해로 인해 고향 임천(林川)을 떠나 이곳 저곳 여러지방을 다니다가 전라도 전주지방의 

교우촌 대성동 신리골에 들어가 그곳에서 안주하며 신앙 생활을 했다. 그는 학식과 교양과 인격이 

겸비한 사람이었는데 그가 입교 영세한 후에는 더욱 높은 덕행을 간직했으며 남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 왔었다. 그는 신리골에 들어온 후에도 교우뿐만 아니라 

외교인까지도 차별없이 상대했으며 당시 한국사회에서 행하여지는 예법이나 규범을 잘 가르쳤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모두 그에게 모든 예절을 물어서 행했다. 특히 교우들에게는 교회에 

관련된 예법이거나 교리에 밝았으며 또 소상하게 잘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모든 교우들이 그를 

대단히 존경했다.

 

전라도 지방에도 병인박해의 여파가 일어나고있다는 소문이 나돌게 되자 정 바르톨로메오는 

심부름꾼을 전주로 보내어 정세를 알아보게 하였다. 그의 심부름을 맡은 자는 오사영이란 자로 

외교인인 데다가 그 고을의 관직도 갖고 있는 자였으므로 전주 포도청을 자유로이 드나들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오사영은 또한 자원하여 교우들을 도와 성심껏 협조해주기도 하였다. 그가 보낸 오사영이 

떠나고 이틀이 지나도 아무런 전갈이 없자 정 바르톨로메오는 저으기 안심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수상하게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12월 3일 저녁、그마을에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두패로 나뉘어 한 무리는 성지동 마을로 들어가 조 베드로와 그의 아들 조요셉 그리고 이 베드로를 

체포하고 다른 한 무리는 대성 신리 마을로 침입하였던 것이다. 포졸들이 정 바르톨로메오집에 와서는 

담배를 살것처럼 주인을 찾았다.

 

집 주인인 정 바르톨로메오가 문밖을 나서는 순간 천주학생이라고 고발되었으니 가자고 하며 결박하여 

끌고 갔다. 이어 다른 세교우가 체포되어 이들 네명이 함께 근처 주막으로 끌려가 여기서 성지동에서 체포된 다른 교우 세명과 만나 함께 전주옥으로 향하였다. 다음날 이 일곱명의 교우들은 전주 감사에게 압송되어 가면서 모두가 마치 잔치집에 가는냥 얼굴에는 희열과 기쁨이 가득차 있었다고 한다. 감사에게 도착해서는 즉시 그곳 창고 같은 곳에 갇혀 있다가 얼마 후 불려나와 문초와 고문을 받기 시작했다. 처음엔 정 바르

톨로메오가 잠깐 유혹에 넘어가 배교할 뻔 했었는데 함께 갇혀 문초받고 있던 교우들 가운데 가장 열렬한 조 베드로의 권면과 격려에 의하여 그는 다시 생각을 돌리게 되고 참회하는 마음을 바로잡아 평온한 

마음으로 순교에 임할 단단한 마음의 각오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정 바르톨로메오는 순간적이나마 마음이 약해졌음을 참회하면서 더욱더 열심을 배로하며 고행과 기도를 하고 용감한 마음으로 온갖 혹심한 고문을 끝까지 잘 참아냈다. 그에게 배교를 강요하는 관장에게 그는 『나는 하느님을 배반 하느니 차라리 죽기로 

결심하였소』라고 서슴지 않고 말하였다. 수많은 고문과 옥중 고통중에 마침 처형날이 12월 13일로 결정되어 그들이 모두 감옥에서 나오는 마지막날에도 그는 여전히 희열에 가득찬 얼굴로 열심히 계속 기도만 하여 

병졸들을 놀라게 하였던 것이다. 전주 숲정이 형장으로 향하는 도중 그는 조 베드로를 향하여 『우리는 오늘 

천국의 과거 시험을 보러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오늘은 복된날입니다』라고 말하며 마치 벼슬을 얻기 위해 

과거 시험을 보러 가는 것처럼 비유하는 여유도 보여 주었다.

 

이 말을 받아 조 베드로도 『그렇고 말고요. 우리의 행복은 참으로 큰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끔찍한 

형벌중에 있지만 잠시 후는 곧 진복을 받으러 지금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응수하였다. 마침내 사

형선고문이 낭독되고 그들의 서명이 끝나자 처형 준비를 서둘렀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한결같이 평온한 

마음과 용덕을 갖추어 처형에 임하였다. 이때 정 바르톨로메오의 머리는 세번째 칼날에 잘려 땅에 떨어졌다. 

 

때는 1866년 12월 13일、그의 나이 66세의 고령이었다. 장소는 전주지방의 거룩한 순교지로、

오래전부터 그곳은 그들에 앞서 많은 교우들이 장렬하게 순교한 거룩한 곳이기도 하다.

 

聖 정 바르톨로메오는 신앙을 위해 자신의 영달이나 관직까지 초개처럼 버리고 오직 교우들이나 

외교인들에게 천주교의 진리를 전파하면서 여기 저기 유랑생활 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던 분이며 

그 당시 한국 교회의 정형적인 교우상을 그의 덕행실천을 통하여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자이며 

순교자였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의 순교는 그가 평소에 실천생활한 용덕의 필연적인 결과로 

보지 않을수 없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1985년 6월 30일, 김옥희 수녀(한국순교복자회, 오륜대 순교자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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